#15. 기술을 '언어'로 번역하는 법

제안서는 기술 나열이 아니라 명분을 쓰는 것

by 우주문과

제안서를 처음 쓸 때

컨소시엄 구성이 끝나면, 이제 제안서를 쓸 차례다.

제안서는 단순히 공고문 요구사항에 맞춰 빈칸을 채우는 작업이 아니다.

제안서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답변서가 아니라, '왜 우리에게 이 과제를 맡겨야 하는가'를 설득하는 전략서이다.


심사위원은 우리 기술의 전문가가 아니다

제안서 평가위원은 다양한 분야에서 구성된다.

우주 기술 과제라고 해서 심사위원이 모두 우주 전문가인 건 아니다.

위성 전문가, 발사체 전문가, 소재 전문가, 정책 전문가, 사업화 전문가 등 여러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다.

처음에는 이걸 몰랐다.

'우주 과제니까 당연히 우리 기술을 다 알겠지.'

그래서 전문 용어를 그대로 쓰고, 복잡한 기술 설명을 길게 늘어놓았다.

하지만 발표 후 질의응답 시간에 알게 됐다.

"이 기술이 정확히 뭘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데요?"

위성 전문가인 심사위원이 소재 기술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정책 전문가가 기술 구현 방식을 따라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우리가 제안하는 기술을 심사위원 모두가 알 것이라는 건 착각이다.


누가 읽어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제안서는 누가 읽어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기술 전문가가 아니어도, 우리 분야가 아니어도, 이 기술이 왜 필요하고 무엇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써야 한다.

지금은 제안서를 쓸 때 항상 이렇게 생각한다.

'이 문장을 정책 전문가가 읽어도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설명을 다른 분야 엔지니어가 봐도 따라올 수 있을까?'

그래서 복잡한 기술 용어는 최대한 쉽게 풀어쓴다.

전문 용어를 써야 한다면, 바로 옆에 쉬운 설명을 붙인다.


컨소시엄 기관들의 연구 내용이 연결되어야 한다

컨소시엄 구성으로 제안서를 작성할 경우, 또 다른 어려움이 생긴다.

각 기관이 제출한 연구개발 내용을 하나로 엮어야 한다는 점이다.

A사는 A사 내용, B연구소는 B연구소 내용, C대학은 C대학 내용을 따로따로 작성해서 보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이 보는 건 따로따로가 아니라 '전체'다.

"A사가 개발하는 기술과 B연구소가 개발하는 기술이 어떻게 연결되나요?"

"C대학의 연구 내용이 전체 과제 목표와 어떤 관계가 있나요?"

컨소시엄 내 다른 연구참여기관들과의 연구개발 내용 간 연관성을 고려해야 한다.

지금은 각 기관의 자료를 받으면, 먼저 전체 스토리부터 짠다.

A사가 개발한 부품이 B연구소의 시스템에 어떻게 통합되고, 그게 C대학의 성능 검증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각 기관의 연구 내용이 마치 퍼즐 조각처럼 맞물려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도록 제안서를 구성한다.

기관별 내용을 단순히 나열하는 게 아니라, 연결고리를 명확히 써주는 거다.


엔지니어의 언어를 번역한다

제안서 작성이 시작되면 엔지니어들은 나에게 기술 자료를 던져준다.

"고탄성 탄소섬유 복합재를 적용해 발사체 상단부 구조물의 무게를 기존 알루미늄 합금 대비 30% 감량하고 인장 강도를 확보하려 함."

처음 이런 자료를 받았을 때, 나는 이걸 그대로 제안서에 옮겨 적었다.

'엔지니어가 쓴 거니까 맞겠지.'

하지만 이 문장은 소재 전문가에게는 이해되지만, 정책 전문가나 다른 분야 심사위원에게는 와닿지 않는다.

지금은 이 기술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한다.

"발사체를 가볍고 튼튼하게 만드는 신소재입니다. 무게를 30% 줄이면, 그만큼 더 많은 위성을 실을 수 있습니다. 발사체 무게 1kg을 줄이는 것은 수억 원 가치의 위성 장비를 하나 더 실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기술 전문가에게는 '정확성'이 중요하지만, 제안서에서는 '이해 가능성'이 더 중요하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이라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사람의 평가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


정책과 기술을 연결한다

심사위원들이 가장 먼저 확인하는 건 이거다.

"이 사업이 국가 예산을 쓸 명분이 있는가?"

아무리 좋은 기술이라도 국가의 방향과 동떨어져 있으면 설득력을 잃는다.

그래서 제안서에는 항상 정책과의 연결고리를 쓴다.

처음에는 정책 키워드를 그냥 나열했다.

"본 과제는 우주경제 로드맵에 부합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쓰면, 심사위원 눈에는 그냥 '끼워 맞추기'로 보인다.

지금은 우리 기술이 국가 정책의 어떤 빈틈을 메우는지를 구체적으로 쓴다.

"현재 고성능 탄소복합재는 해외 의존도가 높습니다. 이 기술을 국산화하면, 수출 통제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생적 우주 산업 생태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정책 전문가가 읽어도, 기술 전문가가 읽어도, 둘 다 고개를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쓴다.


신뢰를 객관적으로 증명한다

제안서에서 정략적 목표 관련 많은 질문은 이거다.

"당신들이 측정한 데이터가 객관적인가?"

특히 새로운 기술이라 기존 표준 시험 절차가 없는 경우, 이 질문은 더 많아진다.

"우리가 자체적으로 검증하겠습니다."

이건 설득력이 없다.

기존에 표준화된 시험절차가 없다면 제3자 검증 계획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KOLAS 공인시험기관과 협력해 시험 절차를 수립하고, 국가 인정 기관의 감독 하에 시험을 진행해 성적서를 제출하겠습니다."

"우리 방식이 맞으니 믿어달라"는 호소가 아니라, "국가 표준 기구와 함께 검증 기준을 세우겠다"는 제안이다.


제안서는 번역과 편집 작업이다

제안서를 완성하는 건 문장력이 아니라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쓰는 힘'이다.

엔지니어가 로켓의 뼈대를 만들고 엔진을 설계한다면, 나는 그 차가운 금속 덩어리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고, 컨소시엄 기관들의 연구 내용을 하나의 스토리로 엮고,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명분을 붙인다.

심사위원 구성이 다양하다는 건, 우리 기술을 모르는 사람도 있다는 뜻이다.

그 사람들까지 설득해야 과제를 수주할 수 있다.

흩어져 있는 기술 데이터를 모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로 엮고, 각 기관의 연구 내용이 서로 연결되도록 구성하고, 국가가 투자해야 할 당위성을 증명하는 과정이다.

사업관리자에게 제안서는 단순한 서류가 아니다.

엔지니어들의 기술 용어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바꾸는 번역 작업이고, 컨소시엄 기관들의 연구 내용을 하나의 스토리로 엮는 편집 작업이고, 기술과 정책을 연결하는 설득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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