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직업적 욕망의 크기와 모양을 확인해야 하는 이유
K는 간절히 바라던 직장에서 2주 만에 퇴사했다. 창업경험까지 고려해 높은 연봉을 제안해 준 기업이었지만, 회사에서 요구하는 수준을 해내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압박감과 좌절감을 컸기 때문이다. 나는 동굴로 숨어버린 K에 대한 아쉬움과 애정이 컸기에 조심스럽게 연락했고, K는 나의 연락을 계기로 힘을 내 새로운 직장에 지원해 입사하게 되었다. 또다시 퇴사할지도 모른다며 새 직장이 어딘지도 알려주지 않았던 K로부터 반가운 연락이 왔다.
"다행히도 첫 출근을 했을 때의 느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여전히 만족하며 잘 지내고 있어요. 회사가 기대했던 것보다 시스템이 잘 잡혀있고, 배울 수 있는 것도 많아요. 놀랍게도 데이터 축적도 잘 되어 있어서 휴직 기간 동안 공부해 왔던 실시간 데이터 출력도 가능한 환경이고요. 무엇보다 함께 일하는 분들이 좋고, 회사가 나아가는 방향도 제가 그리는 방향과 유사합니다."
아,,, K의 메시지를 읽는 순간 너무 기뻐 하트를 마구마구 눌렀다.
감당하기 벅찬 회사에서 편안함을 주는 회사로의 성공적인 K의 이직이 너무 반가웠다.
K는 새로운 회사로의 출근을 앞두고 나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었다.
자신의 고민과 경험이 누군가에게 도움 될 수 있다면 용기내어 공유해 보겠다며.
K의 편지에는 창업과 취업을 거쳐 내 일을 찾아가는 직장인의 고민이 생생하게 담겨있었다.
나 혼자만 보기에는 아까운 글이었지만 K가 새 직장에 잘 적응하길 바라며 노트북 파일 속에 넣어 두었다.
"편안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으니, K의 동굴탈출기가 누군가에게 희망을 건낼 수 있길 바라며 꺼내본다.
저는 예민한 사람이에요. 그렇기에 제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요. 이제는 알 법도 하지만 나란 존재는 여전히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이 고민이 결코 끝나지 않을 거란 걸 잘 알아요. 매 순간 '이젠 좀 알 것 같아'라고 말하다가 곧 또 '아닌가 봐, 그런 줄 알았는데'라고 말할 거예요. 그렇다면 끊임없는 자아서핑을 즐겨야 하는데, 늘 포기하고 싶고, 숨고 싶고, 멀미가 납니다. 그래도 적당한 망각 덕분에 또다시 다음 파도에 몸을 실어봅니다. 새로운 직장에 합류하는 과정에서 또 다시 파도를 타며 겪게된 서핑일지를 문답형태로 소개해 볼게요.
저녁이 있는 삶이면 했어. 그럼 창업했을 땐 저녁이 있었니? 아니, 전혀! 일당백으로 일하면서 하루종일 부엌데기로 살았고, 택배 싸고, 손님응대하고, 퇴근하면 컴퓨터 켜서 패키지 디자인하고 외부 행사기획서를 썼어. 휴일에도 잘되는 상점에 가서 눈으론 배우면서도 맘 속으로는 조급해했지. 어휴! 머릿속에 일이 떠날 일이 없었어.
그럼 워라밸이 안 좋다고 생각했겠네?
아니 전혀! 그런 생각 1도 안 들었고, 그냥 내 일이 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왜 직장인이 되고는 저녁있는 삶을 운운하는 거야?
정말 날 것의 단어로 말해볼까? 그건 내 일이 아니잖아!
내 브랜드를 운영했을 땐 일이 곧 자아실현이었어. 일하는 시간만으로 모든 게 충족됐지.
하. 지. 만! 직장에서의 일은 자아실현 보다는 직장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나를 사용하는거지. 그러니 하루 12시간 회사 일에 파묻혀서 사는 직장은 절대 원하지 않아. 연봉을 2배를 올려 준다 해도 말이야. 하지만 또 언젠가 이 생각도 바뀔지 몰라.
정말 의기투합해서 누군가와 회사를 차린다거나 또는 미치도록 일하고 싶은 회사나 함께 하고픈 리더가 나타나게 된다면!
데이터 감각을 가진 마케터가 되고 싶어.
"데이터 기반으로 움직이고 싶어서 전 직장에 간 거 아니야?"
"응! 맞아. 난 여전히 데이터에 기반한 크리에이티브를 펼치고 싶은 사람이야."
하지만 되고 싶은 거지, 이미 그런 사람은 아니었어. 하지만 전 직장에선 어느 미팅을 가든 나를 '프로모션 전문가'라 불렀어. 부담스러웠지. 어쩜 못난 거일 수도 있어. 높이 생각해 주는 걸 즐기고 적당히 일하면 될텐데 말이지.
"그럼 배운다고 생각하면서 일하면 됐잖아?"
"음... 글쎄, 데이터 중심 회사라고 들었는데 기대했던 것만큼의 환경이 구축되지 않은 상태였어. 회사에서는 내가 맡은 분야를 중대한 과제로 인식하고, 이 분야의 틀을 잡아보려는 상황이었어. 부담감이 컸지. 나홀로 헤쳐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막막하고 힘들었어.
"우선순위 정해가면서 하면 되잖아. 안 되는 건 안된다고 하고!"
음...... 여기서부터 나만의 핸디캡이 발생해.
과도한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으면 공황증상이 생겨. 아니 그런 사람이 창업을 했다고? 응! 그때는 전혀 문제 되지 않았어. 나만의 속도로 일하면 됐기 때문이야. 직장인이 되고부터 이런 증상이 불편함으로 다가왔고 상담치료를 받기도 했어.
"창업 이후 들어갔던 첫 직장에서는 어떻게 일할 수 있었냐고?"
"고비를 잘 넘겼어. 상사와 동료들이 있었고, 좋은 치료사를 만났고 무엇보다 배우자가 큰 힘이 돼줬지."
불편하긴 했지만 일을 못할 수준은 아니었어. 견딜 수 있는 수위였던 거지.
하지만, 직전 회사는 난이도가 높았어. 연봉을 올린 만큼 나 역시도 돈값하는 사람이고 싶었던 마음도 컸고. 스스로 납득할만한 수준이 안된다고 생각하면 깊은 동굴로 숨어버리고 싶어져.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내가 견딜만한 곳을 찾아보기로 결심했어.
'성과와 매출' 보다는 '매출'과 함께 '가치'를 고려하는 곳에 가고 싶었어.
하루종일 심장이 쿵쾅대고, 잠도 잘 못 자고, 식욕도 없고, 패배감 쩔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또 아무 일도 못할 것 같은 사람이란 생각만 들었지. 남편은 내게 '당분간 좀 쉬어, 그리고 당장 돈 못 벌더라도 너의 일을 해보는 게 어때?'라고 권유했어. 난 스스로 쉴 타이밍이 아니라고 생각했어. 이미 충분히 쉬었거든. 세상에 어떻게든 쓰이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일단 집에서라도 쓰이는 사람이 되자라며 장보기앱을 켰는데 급 슬퍼졌어. 사용자가 쓰기에 좋은 UX, 매력적인 카피와 상품, 편리한 서비스!
아... 난 왜 이런 걸 못 만들고 방에 앉아 누리기만 하는 거지?
나도 그런 서비스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또 당장 돈을 못 버는 게 싫었어. 남편 돈을 잘 못쓰는 스타일이야. 대학교 때부터 내 용돈을 내가 벌어썼어. 창업할 때도 꽤 오랫동안 50만 원이 월급이었는데 그 돈으로 살았었지. 내가 하고 싶은 게 있고, 배우고 싶은 게 있다면 그 돈은 내가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컸어.
우선 조인스타트업 장영화 대표님이 날 일으켰어. 침대에 꼼짝달싹 누워있던 나를 의자에 앉혔거든. 누워서 전화를 받는 건 좀 아니잖아ㅎㅎ 그리곤 용기를 얻었고, 이어서 내가 가고 싶은 방향에 있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했어. 전 직장 상사, 가족, 친구들에게 내 상황을 털어놓고 만나러 다녔지. 조직과 일에 관한 책도 읽었어. 배민 CCO가 쓴 '말랑말랑 생각법', 최인아책방 대표님이 쓴 '내가 가 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도 읽었어. 절실한 상황이라 그런지 문장들이 내 맘에 콱콱 박혔어. 소중했지!
운동도 했어. 운동은 몇 년 전부터 내 삶으로 훅 들어온 즐거움인데, 여전히 큰 힘을 얻고 있어. 늘 하던 대로 필라테스, 수영, 등산을 했고, 당근마켓으로 '밸런스보드'를 하나 들여서 집콕형 운동 도 하나 추가했어.
어땠냐고? 점점 동굴밖으로 나오게 됐어. 내가 여기저기 퍼뜨려놓은 SOS 씨앗들이 날 끌어당겼고 점점 의욕이 생겼어.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가치와 매출을 함께 쫓는 워라밸 좋은 직장에 가서 밥벌이를 하고, 차근히 내 일을 준비하자! 는 생각에 다다랐어. 그래서 평소 늘 마음엔 있었지만 보상과 업무환경은 다소 부족할 것 같아 망설였던 직장에 지원서를 썼어. 지원서를 쓰는 동안에도 계속 공황증세가 있어서 커다란 고래인형을 꼭 끌어안고 키보드를 두드렸어. 쓰는 내내 이게 맞나 싶기도 했지만
결국! 가봐야 아는 거잖아
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 서류를 냈고, 2번의 면접을 봤고, 잘 냈다 싶었고, 합격했고, 입사날짜를 받았어. 물론 또 안 맞을까 봐 걱정도 커. 진짜 너무너무너무! 근데 진짜 안 가보면 모르잖아. 또 가봐서 이게 아니다 싶어야 또 다른 방향을 도전할 수 있는 거고! 정말 그 생각 하나로 또 가보려고.
공간을 얻고 싶어. 머든 그래야 시작이 되더라고! 월 50만 원 미만의 사무실을 얻어서 남편이랑 가서 책을 읽든 글을 쓰든 요리를 하든 인테리어를 하든 영상을 찍든 모임을 하든 전시를 열든 벼룩시장을 하든! 머든 해보려고! 집에 있으면 잘 안되더라고. 일단 전에 운영했던 브랜드를 어떤 방식으로든 이어나가고 싶어. 이전에 크래커를 만들어 팔았는데 레시피책을 내보고 싶은 게 오래전부터 바람이었어. 지금 이 맘 때면 달래크래커를 만들었는데, 그게 정말 맥주안주에 제격이거든! 여름엔 감자크래커를 만들고, 가을엔 생강크래커를 만들겠지?! 더 다양한 제철재료를 엮어서 책 비슷한 걸 만들어보려고. 또 사워도우(천연발효종빵)를 잘 굽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것도 기록해 보고, 내가 컬렉팅 하는 그림들로 전시도 열어보고 싶어.
다이어트의 시작은 헬스 1년 회원권 이듯!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 월세를 내보려고!
헌데 이 모든 건 다 회사에 잘 적응하고 나서부터야. 정말 느으으으으으으으린 속도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