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년 후 분양전환되는 임대 아파트에 입주했다. 24평 아파트로 큰 평수는 아니지만 방이 세 개, 화장실이 두 개 있는 집이다. 이사하면서 예전부터 사고 싶었던 살림살이를 몇 가지 장만했다. 안방 한쪽벽 창문옆에 침대를 들여놨다. 안방에 침대와 장롱이 같이 있으니 안정적이고 편안해 보였다. 방 하나는 아들 방으로 꾸며주고 제일 작은방에 시어머님 서랍장과 옷을 두었다. 이삿날 이후 며칠 동안 짐 정리를 했다. 포장이사를 하더라도 살림 위치를 재배치하고 청소하다 보면 며칠 동안 꼬박 정리를 해야 했다.
처음으로 아들 방이 생겼다. 아들 방을 어떻게 꾸며줄까 이런저런 궁리를 했다. 제일 먼저 생각한 건 책장이었다. 아들이 이제 제법 커서 의젓한 다섯 살이 되었다. 아들방에도 침대를 놓아주었다. 이사 온 첫날부터 아들을 따로 재울 생각을 한건 아니었다. 아직 어린 아들이 혼자 자는 걸 싫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상황에 맞춰서 서서히 옮겨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들은 신기하게 이사 첫날부터 혼자 자는 것에 대해 거부반응이 없었다. 아들을 침대에 누이고 침대맡에서 책을 읽어주면 이내 잠이 들었다. 혹사라도 자다가 깨거나 무서우면 말해달라고 했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자다 깨서 울거나 무섭다고 하지 않았다.
이사 후 일주일이 지났지만 짐 정리가 모두 되지 않은 상태라서 매일 늦은 시간까지 정리를 하다가 잤다. 정리를 하느라 자정이 넘었고 새벽 2시가 넘었는데 남편이 집에 오지 않았다. 그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반복되는 패턴에 화가 났다. 또 외박을 하는듯했다. 정리를 멈추고 잠을 자야 다음날 출근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잠이 오지 않았다. 이사하면서 나는 그에게 여러 가지 당부를 했었다. 그도 수긍했고 다짐했다. 시어머님이 요양병원에 입원한 후 그가 집을 나가는 버릇과 외박은 또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반복되는 외박과 집을 나가는 행동으로 더 이상 그가 몇 번째로 집을 나간 건지 헤아리지 않았다.
그때마다 작성했던 각서들이 책장 한편에 쌓여있었다. 이사하면서 다짐받았던 것은 간단했다. 그에게는 내가 알 수 없는,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만의 힘듦'이 있었다. 늘 힘들다고 했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 집은 잘 살 거고 집도 생겼으니 더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고 그에게 자주 안심 시켜주는 말을 했다. 우리 둘이 서로 조금씩 더 노력해서 사이좋게 잘 살아보자고 부탁했다. 짐 정리를 하다가 책장에 꽂혀있는 각서를 꺼냈다. 각서는 늘 싸움이 끝나고 '화해'라는 절차에 다짐을 위한 약속을 기록한 일종의 계약서였다. 치열하게 싸운 후 어떤 다짐과 맹세를 했는지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각서에는 보통 내가 불러주는 대로 그가 기록한 문구들이 적혀있었다. 각서를 읽다가 나는 이번에야말로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굳은 다짐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다음날 퇴근하면서 아무 일도 없는 듯 집에 들어왔다. 나는 다짐을 크게 했기 때문에 날을 잡은 것처럼 그에게 따져 묻기 시작됐다. 소원하던 내 집 마련을 이룬 이때에 나는 일생일대의 각오를 한 것처럼 그와 대치했다. 몇 년 동안 준비해서 한 단계 한 단계 올라온 성지인 내 집에서 나는 행복하게 내 인생을 꾸미고 싶었다. 말싸움은 격렬해지고 나는 이전과 달리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는 각오로 싸움에 임했다. 그가 자꾸 집을 나가는 것은 나에겐 가정을 지키기에 아주 큰 위협이 되는 장애물이었다. 더 이상 그가 가정을 버리는 행동을 허용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내 가정에 더 이상 함부로 하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그에게 강경하게 맞섰다.
어릴 때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걸 여러 번 보며 자랐다. 큰소리가 나고 살림살이가 깨지고 엄마가 아빠에게 욕을 했다. 아빠가 밥상을 엎으면 엄마가 집안에 있는 그릇을 모두 깨버렸다. 내가 더 어렸을 때는 아빠가 엄마를 때린 적도 있다고 들었다. 18살에 시집온 엄마는 시어머니와 치고받고 싸운 적도 있다고 했다. 나는 아주 어릴 때 기억은 별로 없다. 미취학아동 때의 일은 단편적인 몇 가지의 사건사고만을 기억할 뿐이다. 내가 기억하는 시기의 우리 부모님의 부부 싸움에 아빠가 엄마를 때린 적은 없다. 엄마가 늘 강자 같았다. 그 모든 것이 엄마가 아빠를 길들인 것이라고 듣고 자랐다.
남편이 이렇게 된 것에 나는 내 태도 때문인 탓도 있다고 생각했다. '초장부터 문제가 된 것은 사생결단의 마음가짐으로 버릇을 고쳐야 했던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좀처럼 뒤로 물러서지 않는 나에게 남편이 더 화를 냈고 싸움을 하는 둘의 목소리도 더 커지게 되었다. 참다못한 그가 다시 집을 나가려고 몸을 일으켰다. 나는 울고 소리치며 다시 나갈 거냐고 사력을 다해 매달렸다. 다시 집을 나가면 이대로 끝이라는 말을 하는데도 그는 나를 뿌리치며 나가려고 했다. 그에게 마지막 엄포를 놓으며 나가려면 나를 죽이고 나가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그는 나가려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울고불고 그를 부여잡았다가 거실로 걸어가서 칼을 가져왔고 그에게 나를 죽이고 가라고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