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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하늘 Oct 29. 2023

흑수저, 20억 자산가 되다.

빚에 허덕이다가 20억 자산을 만들고 파이어족이 되기까지.

프롤로그     



흑수저, 20억 자산가 되다.     


내겐 의사의 실수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행운의 탄생비화가 있다. 나는 1977년 대한민국이 100만 불 수출에 성공하고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때 흑수저 가정에서 태어났다. 1남 3녀 중 막내로 딸, 아들, 딸이 있는 집에 막내로 흔하고 서운하게 딸이 보태졌다. 아들이 귀한 집에 단 한 명의 아들만 둔 엄마는 불안했다. 2대 독자인 오빠를 위해 아들하나를 더 낳고 싶었다. “아들 맞아요? 딸이면 안 낳아요.” “이번은 확실하게 아들입니다.” 의사는 나를 아들이라고 오진했고 엄마는 아들을 낳기 위해 또 한 번의 출산을 감당했다. 그런데 태어난 아이에겐 고대하던 고추가 없었다. 엄마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고 의사에게 “딸이면 당신이 책임진다고 했으니 당신이 키워요”라고 했다. 그런데 의사가 나몰라 하는 바람에 부모는 어쩔 수 없이(?) 나를 키웠다.    

  

모님의 부모는 가난하지 않았다. 아빠의 부모님은 경기도 양주에서 동네 유지로 땅이 많았다. 엄마의 부모님도 충남 아산 둔포에서 부유하고 유복한 가정을 꾸렸다. 나의 조부모는 양가 모두 결코 가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대 우리네 부모답지 않게 조부모님들은 자식들 교육을 소홀히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중등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교육만 받아도 제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는 시대에 산 우리 부모님들은 교육을 받지 못한 탓인지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없었다. 당연한 부모의 상속도 어이없게 친지들에게 빼았겼다. 6~7,80년대 대한민국은 어수선한 사회에 기회가 넘처 났다. 그러나 나의 부모는 부를 챙기지 못했고 권력과는 멀게 살았다. 부모는 일개및처럼 일한것에 반해 가난한 살림을 꾸렸다. 부와 모는 각자 어린 시절 가난하게 살지 않았다고 하는데 내가 기억하는 나의 부모는 가난했다.     


4,5살때부터 초등학생 때까지 살았던 내 생에 첫 집은 다세대였다.  40평 건평의 집에 여덟세대의  단칸방이 2행 4열 직사각형으로 지은 집이다. 70년대 다세대 단칸방은 한집에 4~5평정도를 허용했다.  집의 입구는 반대방향으로 나있고 건물은 여덟집이 하나로 지어진 건물이라서 소음은 일상이었다. 단칸방 집은 부엌을 포함해도 5평을 넘지않았다. 똑같은 집 크기 만큼 각집의 형편도 그만그만 했다. 집터로 들어가는 골목이 있었고 그안으로 들어가면 나름 널찍한 마당이 나왔다. 각자의 집보다 더 큰 마당이 있었다. 단층이었지만 옥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름 운치가 있다. 마당의 넓이에 비하면 방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은 건물이다. 집에는 방한 칸에 부엌 그리고 다락이 있다. 방안에 있었던 살림으로 기억나는 건 비키니 옷장과 텔레비전이 전부다. 부엌은 좁아서 겨우 한사람정도 쪼그려 앉아서 수도를 사용할수 있었다. 부엌에는 연탄아궁이가 있었다. 화장실은 집 밖에 여덟 세대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화장실이 두 칸 있었다. 화장실도 다른 집들처럼 양끝으로 입구가 있었고 화장실 밑바닥 통은 하나였다. 화장실 위치는 바로 우리집 앞이었다. 급똥이 마렵거나 오줌을 눌 때 화장실 가는 건 좋았지만 비 오는 날에는 구더기가 창궐해서 집까지 들어오곤 했다. 수많은 구더기가 비만 오면 화장실을 탈출해서 밖으로 밖으로 기어나왔다. 비 오는 날에 구더기 무리는 마치 잘 정돈된 군대가 행렬을 하듯 전투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의 개체수는 꽤 많았기 때문에 집으로 침투하면 집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렸던 나는 비가 오는 날은 공포에 휩싸이곤 했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옛날 옛적의 동화 같다. 시간은 타임머신을 타고 21세기 2021년이 되었다. 44살까지의 나의 인생은 다소 막장드라마 같이 우여곡절을 겪었다. 알고보면 사람은 누구나 개인마다 특별한 역사가 있다. 내 삶도 그랬다. 그러나 마흔살이 넘어서 어느 순간 '이런 인생도 좋구나! 그래, 재미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희로애락이라는 감각 자체가 모두 '재밌다'라고 생각하게 됐다. 기뻤던것 화났던것 슬펐던것 즐거웠던것 모두가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내 인생의 어떤부분만 오려서 생각할수 있는게 아니다. 그저 모두가 통으로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살아있고 살아가는것, 느끼는 감각이 어떤것이든 살아있기에 결국 감사하구나!> 라고 깨달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지나온 순간들이 모두 감사할 뿐이었다. 막연하게 생각하던 것들을 감사일기로 기록하면서 더욱더 선명해졌다.       


2024년에 나는 77년생으로 올해부터는 만나이로 표기하기에 46살이다. 2021년 3년전 44살의 나를 소개하면 이렇다. 나는 혼자 사는 44살의 위풍당당 아줌마가 되었다. 23살에 임신을 해서 결혼을 했고 29살에 이혼했다. 싱글맘이 되고 나서 친정식구들과 함께 살았다. 슬하에 자식을 한 명 두고 있다. 01년생이고 아들이다. 아들을 키우면서 단 3년 동안만 양육비를 받았다. 35살에 재혼을 했고 38살에 다시 이혼했다. 2021년 아들은 군대에 입대해서 6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아들이 군대에 가서 잠시 혼자 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당시 기준 자산 30억을 만들었다.     




2021년 44살, 파이어족이 되다.     


12월 겨울, 자축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누군가에게 떠들썩하게 이야기하는 축하 자리는 아니었다. 조용하고 단순하게 내 마음 하나 고쳐먹고 '돈을 버는 일을 그만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것이다. 깊게 생각한 건 아니었다. 낙서로 시작된 메모지가 어느새 꽉 차 있었다. 매달 지출되는 생활비 목록, 앞으로 돌아올 전세입자들 만기일을 적었다. 복잡하고 난해한 부동산 세법이 개정되면서 전세금도 5% 상한제가 생겼으니 5%에 대한 내용도 기록했다. 나열된 숫자들을 한참 보았다. 그러다 순간적으로 마음을 꿀꺽~삼키듯 먹어 버렸다. ‘너무너무 일하기 시르다. 싫은 건 그만하자!!!’ 19살, 고등학교 졸업 전부터 근로자로 돈을 벌기 시작했고 쉼 없이 생활비를 버느라 전전긍긍하며 돈 버는 기계로 살아온 지 25년 만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집에 있다가 세탁기를 돌리고 거실에 나와서 빨래를 널었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12월의 선물은 눈 내리는 것으로도 충분하구나' 싶게 눈송이가 크고 풍성해서 마음까지 달큼해지는 듯했다.     


주차장에는 눈이 쌓이고 있어서 머릿속에 걱정이 잠시 스쳤다. 파주 금촌에 살 때는 그나마 지하 주차장이 있어서 차에 말썽은 없었는데 파주 법원리는 달랐다. 내 몸은 파주 법원리의 추위를 내복, 온수 매트, 보일러로 견뎌냈지만 내 차는 법원리 매서운 추위를 견디기 힘들어했다. 벌써 몇 차례 서비스를 불렀고 끝내 배터리 교체까지 했다. 차 배터리가 또 말썽일까 봐 걱정이 돼도 지금 당장 차를 움직일 것이 아니기에 시동 확인하는 게 무의미한 일이라 마음을 내려놓았다. 다음날 외출할 때 시동이 안 걸리면 서비스를 부르던지, 점검을 받아야 할 것이다. 빨래를 널며 창밖 내리는 눈을 보다 저 멀리 산등성이에까지 눈길이 내달렸다.     


비처럼 꽃잎처럼 풍성하고 아련하게 흩날리는 눈꽃 송이에 홀려 '집에만 있기는 손해다' 싶은 생각이 들자 '잠시 나갈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집 앞 커피숍이 떠올랐다. 서둘러 세수를 하고 로션을 발랐다. 옷을입고 거울속에 나를 보며 싱긋 웃어보였다. 그런데 뭔가 허전했다. 립글로스하나로 밋밋한 얼굴에 포인트를 주고 더욱 환하게 나를 보며 웃어주었다. "오~ 좋아, 이쁘네 이뻐~" 자뻑하는 멘트를 날리며 혼자서 희죽희죽 웃었다. 옷을 단단히 입고 모자를 눌러쓰고 혼자서도 뭔가가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집을 나섰다. 길이 미끄러워서 종종걸음으로 발을 옮겨야 했다. 다소 을씨년스럽게 보이는 동네가 하얗게, 뽀얗게 덥혀져 엽서 속에 나오는 풍경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집에서 10분 이상 걸어가면 마트가 있다. 평소에 마트를 갈때는 보통 차를 가져간다. 외출했다 돌아올때 마트를 가기때문이다. 순수하게 마트만 가는일은 거의 없다. 집에서부터 마트까지의 거리 중간정도에 카페가 있다. 눈이 내리는 길을 종종걸음으로 걷다보니 카페 앞에 도착했다. 막상 도착해서 가까이서 보니 스쳐지나가면서 볼때와 다른 매력이 느껴지는 카페다. 카페안에 들어서자 산장 속 깊은 곳에 있는 장소처럼 외딴느낌이 물씬 풍겼다. --- 부천 토박인 나는 1년전 파주 금촌이란 곳으로 이사를 했다. 금촌에서 6개월 살다가 다시 파주 법원리로 이사 와서 집과 집 근처 마트만 갔다.--- 남자 사장님 한 분이 카운터를 지키고 계셨다. 사장님이 쓴 모자 모양이 예사롭지 않다. 사장님의 모습도 왠지 모르게 그림을 그려놓은듯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아서 내가 애니메이션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카페는 창이 넓어 밖이 훤하게 보였다. 차창밖에는 좀 전보다 다소 굵어진 눈송이가 조용하지만 화려하게 내리고 있었다. 카페 안에 자리 잡은 소품들이 파티를 앞두고 잔뜩 치장한 아름다운 처녀들 같다. 알록달록 눈을 즐겁게 하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들이 매력적이다. 카페의 아늑함에 한층 기분이 좋아졌다. 자리를 먼저 잡고 앉으며 가지고 온 책을 책상 위에 놓고 주인장을 향해 갔다. 평소 제일 좋아하는 (고소하고 커피 향이 진하면서 우유의 부드러움이 잘 조화를 이뤄 입에서는 쌉쌀하며 향기롭고) 목 넘김이 부드러운 카페라테 한 잔과 조각 케이크를 시켰다.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먹고 달달한 케이크가 입안에 들어갔다. 커피숍까지 걸어오면서 얼었던 몸이 녹으며 말랑해지고 몰캉한 기분에 취하는 것 같았다. 커피 향이 코를 자극하고 새콤달콤한 케이크가 호르몬을 기분 좋게 활성화시켰다. 커피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는 손이 분주해졌다. 기분이 좋아지고 입고리가 올라갔다. 얌전히 앉아있지만 기분은 탱고를 추듯 들썩거렸다. 창밖에 내리는 눈은 몸과 마음을 깨끗하고 충만하게 채워주는 듯했다. 따뜻한 공기와 뜨거운 커피가 몸을 녹여 주었다. 12월답게 크리스마스 캐럴이 조용하게 또는 신나게 흘러나왔다. 머리와 가슴이 온통 빨갛게 초록으로 형형색색 불을 켜며 알록달록하게 물들었다.     


자리에 앉아 가져온 책을 펼쳐 몇 장 읽었다. 그러다 메모지를 꺼내서 낙서를 시작했다. 의미 없는 낙서를 하다가 생활비 내역을 적고 앞으로의 일정이나 계획을 적어 내려갔다. 그러다 보니 자금계획을 적은 메모가 된 것이다. 지나온 여러 가지 역경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래서 영업을 할때도 즐겁게 일할수 있었다. 그렇게 일에 열중했었는데 일로 연결된 사람들에 마음을 다쳤다. 한번이 아닌 도미노처럼 사람들에 걸려 넘어졌다. 심신이 지쳐서 잠시 쉬고 있었다. 그때 놀기 위한 플랫폼에서  만난 어떤 여자아이를 명예훼손으로 형사고소한 일도 떠올랐다. 머리식히러 간곳에서 머리를 가격당했다. MBTI를 검사하면 나는 늘 똑같은 유형이 나온다. ENFJ는 정의로운 사회운동가라고 불린다. 그 특징 그대로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ENFJ의 별칭이 있는데 인간 골든레트리버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또 다른 별칭은 호구가 있다. 사람 좋은 게 이용당해 주겠다는 게 아닌데 왜 누군가는 그렇게 쉽게 이용하고 심지어 기망하고 없는 말까지 만들어내는 것일까? 사람을 만나는 게 싫었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무게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성인이 된 후 매달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는 무게감에 조바심을 내면서 살았다. 한 달이라도 쉬면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어서 일을 그만둔다는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메모지를 보면서 웬걸~ 그만둬도 될 것 같았다. 조용하고 급작스러운 혼자만의 생각이었고 스스로 하는 다짐일 뿐이었다. 그날로 나는 파이어족이 되었다.     


12월, 선물처럼 꽃잎처럼 흩날리는 눈을 보면서 눈 결정처럼 천차만별의 새로운 세상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내가 이뤄낸 성과는 사실 보잘것없다. 그리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하려고만 한다면 방법은 간단하고 쉽다. 내가 이뤄낸 자산은 현재 20억 정도에 불과하다. 그것도 순자산은 더 적다. 그러나 중요한 건 나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점이다. 여자로 태어나서 불알 두 쪽도 없다. 내가 가진 건 가난, 빚, 가족, 아들, 꿈, 그리고 나 자신이 전부였다. 그런 내가 했다면 누구든 할 수 있다. 나는 지금도 많은 꿈을 꾼다. 버킷리스트도 계속 추가한다. 나는 앞으로도 꾸준하게 재미를 쫓으며 살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끼고 좋아하고 챙기며 살고 싶다. 의미 있는 삶에 대해 생각하고 배우고 익히는 재미를 느끼며 하루를 채워나갈 것이다.      


돈의 힘을 알고 돈을 벌기 위해 꿈을 접는 10대를 보냈다. 을 떠안고 빚을 내고 빚을 갚는 빚과 함께하는 20대를 보냈다. 30대에는 가족들을 부양하고 가장으로 살면서 빚을 내기도 했고 수많은 빚을 갚아 나가고 종잣돈으로 돈을 굴려보기도 했다. 그리고 40대에 다시 돈의 시험에 들고 돈의 속성을 이해하고 돈을 마주볼수 있게 되었다. 돈이 나를 괴롭히고 돈이 나를 무너뜨린 순간들이 지나갔다. 아니 아직도 여전히 돈은 아직 나와 썸을 탄다. 돈은 우리가 살면서 반드시 알아야 하고 친해져야 하는 생물이다. 그 돈과의 친목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부끄러운 일들까지도 꺼내보기로 했다.     


2023년 안타깝게도 희망회로에 문제가 생기면서 파이어족 생활이 중단됐다. 부동산 하락에 직격탄을 맞고 나의 재무상태에 경고등을 켜며 내 삶에 영향을 미쳤다. 그 때문에 2023년 행복한 백수생활은 잠정적 휴업을 하게 됐다. 2023년 다시 노동자가 됐다. 매달 나가야 하는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래도 몇 년 만 버티면 다시 자산이 늘어날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총자산이 20억으로 줄었지만 20대를 생각하면 비약적인 발전이다.


빚에 굴레에 갇혀 있던 나는 어떻게 자산 20억을 만들었을까? 그 모든 방법, 과정을 글로 기록하려고 한다. 생각보다 쉽고 간단해서 놀랄 수도 있다. 당신도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할 수 있다. 다만 돈이란 생물을 진짜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면 돈에 진심이길 바란다. 그래야 돈이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고 승하게 한다. 우리 모두 돈을  사람이 아닌 돈의 주인이 되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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