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일: 물속에서는 중력이 잠시 쉬어간다

하루하루의 의미 1월

by 장하늘

1월 2일: 물속에서는 중력이 잠시 쉬어간다

-오늘의 기록 프로젝트 2/365


새해 둘째 날이라고 해서, 세상이 갑자기 쉬워지진 않는다.


1월 1일이 '이제부터'라는 선언이라면, 1월 2일은 그 선언을 몸으로 확인하는 날에 가깝다.

어제는 달력이 넘어가는 소리만 들렸고, 오늘은 내 몸이 조금씩 ‘이동’하는 소리가 들린다.

12월에 미리 수영 레슨을 예약해뒀다. 1월 1일은 쉬는 날이라, 오늘이 첫날이었다. 레슨은 화·목이고, 오늘은 자유수영.

8개월 만인가. 오래 비워둔 장소에 다시 들어가는 일은 늘 주저함 혹은 약간의 죄책감이 함께 온다.

‘왜 이렇게 오래 멈춰 있었지?’

‘맞아. 이런 저런 상황들이 있었지.’

여러가지 소음을 뒤로하고 나는 내 몸을 물속에 잠깐 맡기기로 했다.

10시 시작인데 10시 10분쯤 도착했다.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도.

첫날이라 샤워 물품은 하나도 안 챙겨서, 빌려서 대충 씻었다.

완벽한 시작은 아니었다.

그런데 물은 그런 걸 따지지 않는다.

전에 다니던 곳보다 넓고, 천장이 높아서인지—소리가 위로 빠져나가고, 남는 것은 조용함뿐이었다.

아늑하다고 해야 할까?

물속에 들어가자, 내 몸이 잠깐 가벼워졌다. 이상하다. 살이 쪄서 무거워야 할텐데... 가볍다니.

가벼움이란 건 사실, '비계덩어리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오늘 느낀 가벼움이란 '문제가 사라졌다'가 아니라 '잠깐 내려놓을 수 있었다'에 더 가까운걸까?

우울은 종종 나에게 중력을 더 얹는다.

양말 하나 신는 데도, 마음이 무겁다.

그런데 오늘, 물속에서는 그 중력이 조금 쉬었다.

나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오늘을 기록할 이유가 생겼다.

1월 2일이 ‘둘째 날’이라는 것

1월 1일에는 몇몇분들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말한다.

그 말이 감사한건 맞았는데, 그 인사가 내게 “빨리 좋아지세요”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1월 2일을 이렇게 정의해보기로 한다.

1월 2일은, 새해를 ‘증명’하는 날이 아니라 새해를 ‘연습’하는 날.

첫날은 다짐이 가능하다.

둘째 날은 다짐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둘째 날은—그래서 더—진짜다.


역사 속 1월 2일에 있었던 일들


아래 사건들은 서로 닮지 않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결정이 현실이 되는 문턱’에 서 있었다는 것.

1) 1492년 1월 2일 — 그라나다가 항복하며 한 시대가 막을 내리다

스페인의 그라나다 왕국이 항복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마지막 이슬람 통치가 끝났다고 기록된다. 어떤 끝은 곧바로 새 질서를 부르고, 그 새 질서는 언제나 빛과 그림자를 함께 데려온다.

나는 이 ‘끝’의 기록 앞에서, 이상하게도 내 마음의 습관을 떠올린다.

우울은 '끝'을 과장한다.

그런데 역사는 말한다. 끝은 끝이지만, 끝만은 아니다. 끝 이후에도 사람은 살았고, 도시도 남았고, 계절도 돌아왔다.

2) 1777년 1월 2일 — 트렌턴(아선핑크 크리크) 전투, 버티는 밤

미국 독립전쟁 중 트렌턴 일대에서 벌어진 아선핑크 크리크 전투는 1777년 1월 2일에 일어났고, 미군이 방어에 성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좋아하는 지점은 ‘승리’가 아니라 그 밤을 버틴 방식이다.

우울의 밤도 비슷하다.

크게 이기는 날보다, 그냥 무너지지 않는 날이 더 많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런 날들이 모여서 나를 살린다.

3) 1788년 1월 2일 — 조지아, 헌법을 비준하다

조지아는 1788년 1월 2일, 새 헌법을 비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나라의 형태는 종종 한 장의 동의로 굳어진다.

내가 오늘 하고 싶은 비준은 거창한 게 아니다.

“나는 다시 수영장에 간다.”

“나는 내 몸을 버리지 않는다.”

이 정도의 동의면 충분하다.

하루는 국가가 아니지만, 그래도 하루에는 체제가 있다.

그 체제를 오늘 조금만 더 안전하게 바꿔보는 것.

4) 1839년 1월 2일 — 달의 사진을 찍으려 했던 사람

루이 다게르가 1839년 1월 2일, 달의 첫 사진을 찍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해진다(그 사진은 이후 화재로 소실되었다고도 한다). '보려는 시도' 자체가 기록으로 남는 날이다.

나도 요즘은 나를 비롯한 주변사람, 혹은 내 세상을 보다 잘 보려고 한다.

내 마음. 내 하루.

완벽한 결과는 없어도, '보려고 한 날'은 그만큼의 의미로 남는다.

오늘은 내가 나를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본 날로 채워야지. 물속에서, 또 물밖에서.

5) 1920년 1월 2일 — ‘두려움’이 사람들을 한꺼번에 붙잡던 밤

미국에서는 ‘레드 스케어’ 시기인 1920년 1월 2일 전후로 대규모 단속(팔머 레이드)이 벌어졌다고 전해진다. 두려움은 종종, 가장 먼저 자유를 체포한다.

우울도 비슷하다.

우울이 내게서 먼저 빼앗는 건 기쁨이 아니라 움직임이고 연결이다.

“나가기 싫어.”

“집 밖은 위험해.”

“아~ 만사가 귀찮아.”

스멀스멀 압사하는 무기력은 내 안을 온통 이끼로 잠식해간다.

그래서 오늘 나는 반대로 했다.

나갔고, 움직였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작은 탈출. 아주 조용한 탈옥.

6) 1900년 1월 2일 — 한국 신우편국, 처음으로 미국에 우편물을 보내다

기록에 따르면 1900년 1월 2일, 한국 신우편국이 최초로 미국 우편물을 발송했다. 누군가의 말이, 바다를 건너기 시작한 날이다.

나는 이 사건에 놀랐다.

지금의 나는 쭈그리가 되버려서 '먼저 말 걸기'가 어려워지는데,

역사는 말한다. 말은 생각보다 멀리 간다.

오늘 내가 쓴 이 글도, 누군가에게는 작은 우편물일지 모른다.

그리고 나에게는, 나에게 보내는 우편물이다.

7) 1886년(음력) — 태어나는 순간의 족쇄를 끊으려던 규칙

1886년(음력) 1월 2일 기록에는, 노비 세습을 막아 새로 태어난 노비 자녀에게 세습을 금지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정해지는 운명을 줄이려는 시도다.


족쇄를 끊으려던 규칙- 나는 오늘 이 문장을 마음속에 적어두고 싶다.

예전부터 나에게 삶이라는 것이 감사가 충만했던 이유는 '시대(나는 1977년생인데 우리세대는 참으로 많은 것들을 겪었고, 느꼈으며, 경험하면서, 하다못해 전자기기만 봐도 무궁무진하다.)'와 '지리(나는 현시대에 대한민국에서 태어난게 좋다. 내가 어렸을때만해도, 아니 불과 30대에만 해도, 외국에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북'인지 '남'인지를 물었다. 지금은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오징어게임 BTS 등 외국인들이 많이도 안다.)'에 대한 탁월성이 큰 몫을 했었다.

그런 축복의 시대와 지리에 태어났으니, 노비로 대물림 되지도 않는다. 그런데 하물며 지금의 감정을 계속 '세습'처럼 물려 받지는 않겠지.

그건. 안다.

앎에도 불구하고 지금이 전혀 힘들지 않은것은 아니다. 힘들다. 자주 운다. 그런게 모두 우울증의 모습일꺼다.

그럼에도.

오늘의 컨디션이 내 평생의 운명은 아니다.

오늘이 무겁다고 해서 내일도 무거워야 하는 것도 아닐테고.

무엇이든 바뀔 수 있다. 천천히라도.


새해의 압박에서, 물로 한 발 도망치기

오늘 수영장에 늦게 도착했을 때, 내 안의 목소리가 말했다.

“어이구, 좀 서두르지 이게 뭐냐?”

그런데 물속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10분 늦어도, 들어오긴 했네.”

나는 그 목소리를 더 믿어보기로 했다.

수영은 이상하다.

팔을 휘저을수록 앞으로 가는 게 아니라,

숨을 고르고, 물을 믿을수록 앞으로 간다.

새해도 그렇지 않을까.

힘을 잔뜩 주는 방식이 아니라,

숨을 고르고, 하루를 믿는 방식.

나 자신을 너무 세게 몰아붙이지 않는 방식.

오늘의 나는 내모든 감정을 이기지 않았다.

대신 수영장에 갔다.

그리고 그 사실만으로도—오늘은 조금 달라졌다.


오늘을 위한 기록

오전 스트레칭을 했다.

아침 샐러드를 챙겨 먹었다.

아침 설거지를 하고 출발했다.

영양제를 먹었다.

10시 시작인데 10시 10분쯤 도착했다(그래도 도착했다).

샤워 물품을 하나도 안 챙겨서 빌려서 씻었다(그래도 잘 씻었다).

8개월 만에 물속에 들어갔다.

새로 간 수영장은 넓고 천장이 높아서 조용했고, 아늑했다.

물속에서 내 몸이 잠깐 가벼워졌다.


오늘의 문장.

“완벽하게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 물은, 조금 차가웠지만 막상 들어가니 미지근하게 느껴졌고,

숨도 쉬고, 잊어버린게 아닐까 걱정했지만 초보로서의 자유형을, 마치 8개월이란 시간을 쉬지않은것 처럼 했다. 물에 들어가니 물이 나를 받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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