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축제

셸 위 댄스-인생의 여정을 소개합니다

by 장하늘

50화




아도니스:복수초(꽃말: 추억, 아픈 추억, 영원한 행복, 영구한 행복, 회상)



축제


1996년 <축제>라는 영화가 있었다. 치매를 앓고 있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가족들이 상을 치르기 위해 모여든다. 5년이 넘게 노망을 앓아온 87세 할머니의 죽음은 상가에 온 사람들을 그리 슬프게는 하지 않는다. 더러는 노골적으로 호상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가족이 하나둘씩 집으로 모여든다. 그러면서 그동안에 가족들 간의 갈등과 불화를 풀어나간다. 그리고 문상을 온 사람들과 장례식을 치르는 절차에 대한 갑론을박을 하기도 한다. 상갓집에서 치러지는 놀이판에서 사람들 간의 갈등도 묘사된다. 97년도에 영화 <축제>는 백상예술대상 감독상을 받았고, 96년도 청룡영화상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과 한국 영화평론가 협회상 등을 받았다.

우리 아버지는 집에서 돌아가셨고, 97년만 해도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게 보편화되어 있을 때였다. 병원이 아닌 집에서 사망할 경우 장례를 치르기 위해 필요한 절차가 있었다. 장례식을 치르려면 우선 사망진단서가 있어야 하는데 사망진단서는 병원에서 발급하기 때문에 병원에 연락을 취했다. 병원에서 의사가 나와서 확인 후 사망진단서를 발급해 줬다. 이후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일부 가족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곳저곳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전화로 시키고 장의사를 소개받아 연락했다.


당숙 어른들이 연락을 받고 집에 찾아오셨다. 그러나 아직 장례식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어서 한바탕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가 났다. 친지들이 한분씩 도착할 때마다 예순살도 안 돼서 돌아가신 게 불쌍하다며 아빠를 소리 높여 불렀다.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고 말하며 곡소리를 높였다. 곡소리가 과도하게 큰 것은 기이한 느낌이었고 그들의 과장된 목소리와 몸짓이 연극 같아 현실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숙분들의 방문으로 집안이 잠시 시끌벅적하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당숙분들은 다음날 일찍 오신다며 엄마에게 인사하고 돌아가셨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 장의사가 서류 가방을 들고 늦은 밤 시간 집으로 들어왔다. 책자를 펼쳐놓고 가격을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관은 어떤 것으로 할 건지, 수의는 어떤 것으로 할 건지 물어봤다. 옆에서 지켜보는 나는 뭐가 뭔지 도무지 모르는 말들이었다. 모든 물건들은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다. 가격대 별로 최상, 상, 중, 하, 최하 정도로 구분되어 있었다. 각각의 물품들은 상품마다 품질 차이로 가격에도 차등이 있었다. 가장 비싼 관의 경우 최소 100만 원 정도씩 차이 나기 때문에 금액별 격차가 심했다. 엄마도 생소한 상황에 능숙한 대처를 못하는 듯 그저 상 혹은 중 정도의 상품들을 고르는 듯 보였다. 집안 형편을 고려하거나 예산을 짤 수 있는 경황 따위는 없었다. 엄마는 "이제 죽어서 마지막 가는 사람인데 형편 것 좋은 걸로 해야죠 네네~" 장의사와 연신 맞장구치며 넘어갔다. 그리고 혼잣말을 하듯이 '형편이 안 돼서 그저 면목이 없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장의사는 수완이 좋았고 엄마는 그대로 상술에 넘어가는 듯 보였다.

가족들이 모여 앉아 사진첩을 보고 있었다. 아버지 영정사진을 전혀 준비하지 못한 것을 그제야 알았다. 아버지는 6년 가까이 병증을 앓으셨다. 4년 정도는 집안에서 투병생활을 하셨다고 해도 무방하다. 1년 정도 전부터 사망선고를 받았고 사망선고가 내려지고도 1년 정도를 살았다. 그런데 그 오랜 시간 동안 그 누구도 아버지의 사진을 찍을 생각을 못 했다. 사진첩을 보면서 아버지가 괜찮게 나온 사진이 없는지 살폈다. 잘 나온 사진이 없었다. 더구나 아버지 혼자 찍은 독사진은 찾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있는 사진들 중 표정이 좋은 사진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한참을 사진첩을 보다가 표정이 나쁘지 않은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그 사진은 넘겨져서 틀에 맞게 확대되어 영정사진으로 쓰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은 놀라움과, 어수선함과, 분주함 속에 밤이 깊었다. 우리 형제자매들도 각기 회사와 친구들 몇 명에게 연락을 취했다. 밤이 깊어 갔으나 좁은 집에 모인 가족들 대부분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새벽부터 장례물품들이 도착했고 친지 몇 분과 동네 어른분 몇 분이 일을 돕기 위해 모였다. 좁은 집에서 북적이며 음식을 하느라 잔칫날이 된 듯 집 밖까지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집 앞마당에 처마를 치고 의자들이 놓이고 자리도 놓았다. 집안이 너무 좁다 보니 마당 바닥에도 사람이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상이 차려졌다. 집안 부엌에서 큰솥으로 육개장이 끓여졌고, 마당에도 큰솥이 놓여 두 개의 솥에 육개장을 끓였다. 홍어무침도 대용량으로 만들었다. 친족들의 빠른 손놀림으로 맛있는 음식들이 뚝딱뚝딱 만들어졌다. 부엌과 마당에는 갖가지 전들이 부쳐지면서 기름냄새가 동네로 퍼져 나갔다. 마당 한편에 가스불에는 큰 솥 안에 웃는 모양을 한 돼지머리가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면서 익고 있었다.

오전 내내 집안밖에 음식 냄새가 가득했다. 안방에는 미리 도착한 장의사가 염을 진행했다. 내가 볼 수 있었던 건 염하는 모든 절차가 아니다. 일부는 가족들에게 나가있게 했고 일부만 가족들에게 공개했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 정돈된 상태의 아빠를 볼 수 있었다. 아빠는 멋들어진 모습으로 누워계셨다. 하늘을 날 것 같이 가볍고 칼같이 각진 수의는 신선 같은 모습으로 보였다. 병증으로 거무스름 변했던 얼굴색이 핏기를 잃어 창백하고 하얗게 변해 뽀얀 모습이 되었다. 잠깐 아빠를 볼 수 있었지만 이내 아빠는 병풍 뒤에 모셔졌다. 아빠의 모습이 가려지고 단상이 생기고 앞에 탁자가 놓였다. 탁자 위에는 국화꽃 생화가 조금 놓였고 향을 꽂는 향 항아리가 양쪽에 놓였다. 15평 조금 넘는 좁은 공간의 집에서 부엌과 마당에는 잔칫날처럼 음식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 있는 안방은 장례식장의 모습으로 바뀌어졌다. 장례절차로 우리 형제자매들은 안방으로 불려 가기도 했고 밖으로 나와서 일을 돕기도 했다.

가족들 모두 저마다 상주로써 안방에 들어가면 장례절차로 이런저런 지시에 따라 움직이며 각자 자신만의 추억과 입장으로 눈물을 쏟아냈다. 그러나 안방을 벗아나면 주방에서는 음식 하는 거 도우랴 심부름하랴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일하러 온 사람처럼 바쁘게 움직였다. 마당으로 나오면 물건을 정리하고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했다. 의지가 없는 인형처럼 여기저기 시키는 대로 움직이며 쫓아다니기에 급급했다. 수시로 표정을 바꾸고 감정 상태를 옮기는 희극 속 연기자가 된 듯이 현실감이 없었다. 아버지와 마지막 이별을 하는 슬픈 마음과 상관없이 광대놀음을 하는 상황에 메스꺼운 듯 속이 울렁거렸다. 입안에 삼켜도 없어지지 않는 쓰디쓴 약을 물고 있는 듯 쓴맛이 느껴졌다.


영화 <축제>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에 많은 상을 받으며 더 세상에 알려졌다. 나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이후 영화를 접하게 됐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아버지의 장례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 97년 영화 <축제>가 상을 받을 때, 우리 집에서도 슬프고 아픈 축제가 한마당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