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1월 정부는 국제통화기금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로 하며 사실상 국가 부도를 인정했고 1998년 5월 월 20일까지 10회에 걸쳐 195억 달러를 차입하며 IMF 구제금융 위기를 맞이했다. 국민들은 IMF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실체를 모르고 있었다. 97년 12월 15대 대통령 선거에 김대중이 당선된다. 헌정 사상 최초로 야당이 집권을 하게 되며 정권교체가 이루어진다. 김대중 대통령은 오랜 세월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정치인이다. 염원하던 한반도에 민주화 꽃이 피기 위해 대한민국은 초유의 위험한 사태인 국가부도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부도난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김대중이 연단에 섰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요새 우리 경제 위기에 얼마나 당황하고 놀라고 계십니까? 이러한 기가 막힌 현실에 처해서 저는 정치하는 사람으로서 무한의 책임을 느끼고 여러분에게 무어라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여러분 충심으로 죄송한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가? 희망은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경제도 사람이 합니다. 우수한 국민, 애국심이 강한 국민, 절대 이대로 좌절할 수 없다는 그런 국민을 우리는 4,500만 명 가지고 있습니다." 그를 바라보는 국민들도 염원을 닮았다.
나는 당시 생애 첫 투표권을 부여받았고 투표에 참여했다. 정치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지만 나라가 부도가 난 상태를 직시해야 했다. 여론은 여전히 야당에 곱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이미 병들대로 병들어 버린 지역감정을 신문과 뉴스에서 들쑤시고 있었다. 5.18 운동이 민주주의에 의한 운동이라는 것도 계속해서 감추고 있었다. 이미 대학생들은 대모를 통해 5.18 관련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민들은 여론에 눈이 가려져 똑바로 판단하기 어려웠다. 결국 나라가 부도가 난 상태가 되어서야 국민들은 가려져 있던 현실에 직면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영웅은 난세에 난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몰아내고 영웅이 되었다. 1997년 대한민국은 부도가 난 상태에서야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이 땅에서 처음으로 민주적 정권교체가 실현되는 자랑스러운 날입니다. 여러분" 김대중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국민들 앞에 나섰다. "1998년, 나는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들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21세기의 개막은 단순히 한 세기가 바뀌는 게 아닌 새로운 혁명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중차대한 시기에 우리에게 6.25 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고 할 수 있는 외환위기가 닥쳐왔습니다."
갚아야 할 나랏빚 1,500억 달러, 외환보유액 불과 204억 달러. 거대한 빚더미. 그 무게를 지고 맡게 된 대통령직. "대한민국은 막대한 부채를 안고 매일 같이 밀려오는 만기 외채를 막는데 급급해하고 있습니다." 98년 당시 경제성장률 -7.5% 3,500여 개 기업 도산. 실업자 147만 6천여 명. "올 한 해 동안 물가는 오르고 실업자는 늘어날 것입니다. 소득은 떨어지고 기업 도산은 속출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땀과 눈물과... (말을 잇지 못한다.)... 고통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10초간 침묵으로 호소했다.
불과 50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대한민국은 빠르게 변화했다. 대부분 국민들은 농사를 짓던 농부들이었다. 그들은 급변하는 시대에 발맞춰 고향을 등지고 서울과 수도권으로 이주했다. 기름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대한민국. 영토의 70% 이상이 산으로 이루어진 대한민국. 산업화로 빠르게 세상이 변하고 있었다. 기술 양성, 가내수공업 등 우리나라가 성장할 것은 사람을 양성하는 것뿐이었다. 각 분야별로 7,80년대 공업화, 산업화가 진행됐다. 그러다가 90년대가 되어 퍼스널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정보화 사회를 열고 있었다. 1년 농사가 기본인 농사꾼 방식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변화에 적응이 필요했다. 한 달 월급을 받아서 생활하며 각 가정을 꾸려 나가는 게 대부분의 노동자인 국민들의 생계 방식이 되었다.
급변하는 세상은 신용카드라는 신세계를 보여주었다. 신용사회와 친해지기도 전에 신용생활에 발목이 잡히기도 했다. 개인들은 신용불량자가 되면서 카드 사용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신용사회에서 신용을 챙기는 방법도 차츰 몸소 부딪히며 배워 나갔다. 변화에 적응하기도 힘든 국민들은 개개인이 닥친 위험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 되는 애국심으로 하나가 됐다.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외환위기를 타계하기 위해 국민들은 앞장서서 동참했다. 98년 당시 금값은 한 돈 3.75g이 국제시장에서는 35달러에 팔리고 있었다. 금 1톤을 수출하면 천만 달러를 벌 수 있고 천 톤이면 백억 달러의 외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말이 뉴스에서 보도되었다.
IMF의 빚을 갚기 위해 금을 모으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나라의 어려움을 자기 일로 여긴 국민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장롱 속 금을 꺼내서 힘을 보탰다. 금 모으기 캠페인이 시작되고 열흘 만에 행사에 참여한 국민이 100만 명을 넘어섰다. 17일째 모아진 금이 100톤을 넘었다. 은행문이 열기가 무섭게 전국 은행에 금을 맡기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금 모으기 운동으로 폐물, 돌 반지 등을 기꺼이 내놓으며 351만 명이 나라 살리기에 동참했다. 전국 각지로 아나바다 운동이 퍼졌다. 하나로 뭉친 대한민국을 외신은 주목하고 있었다. 십시일반 모은 금을 수출하면서 일시적으로 국제 금 시세가 폭락하기도 했다. 혹독했던 IMF 사태를 이겨내려는 열망이 담겼던 '금 모으기 운동'은 모든 국민이 나라를 지키려는 염원, 그 자체였다.
금 모으기 운동과 함께 에너지 절약 운동이 전국에 퍼져 나갔다. 전기, 수도 등 가정과 각 사업장에서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직장인들은 임금동결에 아무도 불평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 정치적으로도 여야가 화합을 이루었다. "잘못은 지도층들이 저질러 놓고 고통은 죄 없는 국민이 당한 것을 생각할 때 한없는 아픔과 울분을 여러분과 같이 금할 길이 없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연설했다. "오늘의 어려움 속에서도 국민 여러분께서는 놀라운 애국심과 저력을 발휘하셨습니다. 기업은 수출에 전력을 다 함으로써 지난 3개월간 연속해서 큰 규모의 경상 수지 흑자를 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한국인의 애국심과 저력에 대해서 세계는 지금 경탄하고 있습니다."
예정보다 3년 빠른 외환위기 극복, 벼랑 끝에서 국민을 이끈 대통령 김대중. 그가 내세운 하나의 원칙을 믿고 국민들이 한마음으로 뜻을 모으고 있었다. "바르게 산 사람이 성공하고 그러지 못한 사람은 실패하는 사회. 그런 사회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고통도 보람도 같이 나누고 기쁨도 함께 해야 합니다. 땀도 같이 흘리고 열매도 함께 거두어야 합니다. 1998년, 지금 우리는 전진과 후퇴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고난을 딛고 힘차게 전진합시다. 조상들의 얼이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후손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 선두에 서겠습니다."
국민들이 모은 금은 무려 222톤으로 22억 달러에 달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인지 IMF 사태 이후 빠른 경기 회복세를 보였다. 1998년 말에는 수입이 줄면서 외화보유액이 520억 달러로 증가했으며, 1999년 말에는 135억 달러를 조기 상환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8월 23일, IMF로 빌린 195억 달러를 모두 상환했다. 뉴스에서는 이를 보도했다 "오는 23일, 정부는 97년 IMF로 빌린 195억 달러 가운데 그동안 갚고 남은 1억 4,000만 달러를 모두 상환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IMF에 진 빚을 상환 예정보다 3년이나 앞당겨 갚은 것이다. IMF 구제 금융 지원을 받은 지 꼬박 3년 8개월 만이었다. IMF 조기졸업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IMF와 김대중 대통령을 때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의 일대기를 잠시 기록으로 남기며 그를 기억해 본다. 국민을 존경하고 사랑했던 대통령, 김대중.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김대중
김대중 그가 연단에 서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납치와 망명, 가택연금 수많은 고난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세상과 단절된 감옥에서 수행 번호 9번, 사형수로 불렸던 적도 있었다. 굴곡진 현대사만큼 그의 삶도 파란만장했다. 그는 무려 네 번의 도전 끝에 대통령이 된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됩니다. 건국 이래 처음으로 여야 정권 교체가 이뤄졌습니다" 분단 이후 첫 남북 정상회담을 이끌어 내고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김대중 전 대통령. 그는 일생을 민주주의 수호에 앞장섰던 이 시대의 큰 어른이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여러분" 김대중 대통령 서거. 2009년 8월 한 시대가 저물었다. 그가 떠난 지 10년 후에 만들어진 영상을 참조했다.
서울 잠실은 원래 섬이었다. 지금 같은 도시를 갖추게 된 건 1971년부터다. 백사장이 육지로 바뀌던 그때 사람들의 초미의 관심사는 대선이었다. 1961년 쿠데타 이후 박정희는 벌써 세 번째 대통령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다. 이에 맞서는 야당 후보는 혜성처럼 등장한 40대 정치 신예 김대중이었다. 31살에 정치에 뛰어든 김대중은 세 번의 낙선 이후 마흔 살에 국회에 진출한다. 무려 5시간 19분의 필리버스터로 김대중 이름 석 자를 각인시켰고 단숨에 대선후보로 부상했다. 그가 일으킨 돌풍에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됐다. 두 번의 임기를 마치고 헌법까지 고쳐가며 세 번째 대선에 도전한 박정희가 연설한다. "내가 이 자리에 나와서 여러분들에게 나를 대통령으로 한 번 더 뽑아주십시오 하는 정치 연설은 오늘 이번이 마지막 연설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반면 "이번에 박정희 씨가 승리하면 앞으로는 선거도 없는 영구집권의 총통 시대가 온다는 것에 대한 확고한 증거를 나는 가지고 있습니다."라며 총통 시대를 예언하며 김대중이 연설한다. 둘은 박빙의 대결을 펼쳤다. 하지만 부정투표 논란 속에 약 95만 표 차이로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당시 외신들은 '김대중이 선거에서 이겼지만 투기 표에서 졌다'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듬해인 1972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을 단행, 대통령 직선제를 없애 버린다. 김대중이 예고했던 박정희 영구집권이 현실이 된 것이다.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국민 앞에 선서한다. 그리고 이것은 앞으로 김대중이 겪게 될 고난의 서막이기도 했다.
1971년 정부는 대선을 치른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총선을 치르겠다고 발표했다. 국회 장악을 노린 기습 결정이었다. 갑작스러운 총선 결정에 김대중은 전국을 누비며 선거 지원 유세를 했다. 그러다 광주로 향하던 도중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다. 2명이 사망한 대형 사고. 김대중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이 사건 이후 평생 다리를 절게 된다. 죽음의 고비는 또다시 찾아왔다. 일본에서 유신 반대 운동을 하던 중 도쿄의 한 호텔에서 괴한에게 납치를 당하기도 했다. 손과 발이 묶이고 눈과 입이 가려진 상태로 바다에 수장될뻔했지만 김대중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 "그 사건이 내 체험으로 해서 개인의 힘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과연 어느 단체, 누가 했느냐에 대해서는 저는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이 인터뷰한다.
가까스로 집에 돌아왔지만 가택 연금으로 정치활동은 일체 금지됐다. 이때부터 87년까지 김대중은 동교동 감옥을 사실상 벗어나지 못한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유신 체제가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막을 내렸다. 독재의 그늘에서 벗어나 민주화 열망이 들어 끌었던 서울의 봄. 그러나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은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김대중은 체포했다. 신군부의 김대중 체포 소식은 광주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당시 국내에 보도되지 않았던 광주의 모습은 외신을 통해 세계에 알려진다.
외신에서 흘러나온다. "많은 시민들과 군인, 경찰이 죽었다는 소문은 사실이었습니다. 병원 한 곳에서만 시신 30여 구 이상이 깃발 아래 쌓여 있었습니다. 다른 병원도 이런 상황입니다. 많은 시민들이 가까운 거리에서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외국 기자가 도착하자 시민들이 환영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 세계에 알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가 김대중의 석방과 계엄령 해제, 신군부 전두환의 퇴진이라고 말했습니다."
"신문에는 김대중 채포 소식을 듣고 광주 시민들이 몰려들어서 시위했는데 계엄령 해제하라, 김대중 석방하라 만 신문에 나게 했어요. 전두환 물러가라 하는 것은 빼고 그 두 가지만 신문에 나게 했어요. 그래도 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죽었다는 것, 그리고 나를 구속한 것에 대한 항의에서 일어났다는 것 이런 것들 때문에 너무 충격받아서 잠시 의식을 잃었어요. 쓰러져서." 김대중이 인터뷰한다.
신군부는 김대중에게 협력하면 대통령직 이외의 모든 직책을 주겠다고 회유했다. 하지만 그는 타협하지 않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사람들 하고는 한치도 타협할 수 없다. 광주시민들은 나를 위해서 항쟁하다가 이렇게 죽었는데 내가 어떻게 이 자 들하고 타협을 하느냐. 그런 생각이 아주 철석같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죽자! 죽는 길밖에 없다. 이자들이 타협 안 하면 죽는다니까 죽자라고 결심했어요." 김대중 대통령이 인터뷰한다.
결국 그는 5.18 배후 조종자로 지목, 내란 음모죄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감옥 생활을 할 때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인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것 때문에 고민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또 내가 감옥 생활을 한 것이 그만큼 이 나라 민주화를 위해서 의미가 큰 거니까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독재는 반드시 망하고 민주주의는 일어난다. 그리고 우리 국민은 언제까지나 독재자를 용납할 국민이 아니다. 국민에 대한 신뢰, 역사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한 번도 좌절해 본 일은 없어요." 김대중 대통령의 인터뷰다.
1987년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된 김대중이 광주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무려 16년 만의 방문이었다. 시민들은 김대중을 연호했다. 플랫폼을 가득 매운 환영 인파는 플래카드와 피켓을 흔들며 환호했다. 정거장마다 그러기를 반복하며 열차는 광주에 도착했다. 그를 보기 위해 광주역에 모여든 사람들. 광장은 민주주의의 열망으로 가득했다. 국민들은 김대중을 부르며 연호했다. 망월동 5.18 희생자 묘역 주변에서 그는 참았던 눈물을 쏟아 냈다. "나는 5.18 유가족과 부상자들을 껴안고 그냥 울어야 했다." "얼마나 울었던지 그때의 광경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김대중 대통령의 인터뷰 내용이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쟁취한 대통령 직접선거. 국민들은 야권 단일 후보가 나오길 열망했다. 하지만 후보 단일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김대중은 평민 당 후보로 대전에 나섰다. 그는 지독한 지역감정과 싸워야 했다. 대구 유세에서는 연설을 하기도 전에 돌과 계란이 날아들었다. "왜 이와 같이 방해하는지 아십니까? 독재 정권은 영호남의 단결이 무섭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독재 정권은 여러분들 힘이 무섭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여기서 지면 민주주의는 안 됩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연설한다.
87년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이어지는 13대 총선에서 평민 당은 압도적인 지지를 얻게 된다. 우리나라 의정사상 최초로 여소 야대 국회가 구성됐고 김대중은 제1야당 총재로 오공 청산과 민주화 개혁 추진에 앞장섰다. 노태우 대통령이 연설한다. "새로운 정당으로 합당한다" 1990년 여소 야대 정국은 초유의 3당 합당으로 무너지고 만다. 민주주의를 거스른 밀실 야합에 거센 항의로 부딪혔다. 노무현이 TV 화면에서 소리친다. "이의 있습니다, 토론과 설득이 없는 대의가 어디 있습니까?"
1992년 치러진 14대 대선, 김영삼 대통령에게 패배한 김대중은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로써 국회 의원직을 사퇴하고 평범한 시민이 되겠습니다. 이로써 40년의 파란 많았던 정치 생활에 사실상 종막을 고한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한 심경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하나도 갚지 못하고 물러나게 된 점 가슴 아프고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15대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은 마지막 승부를 결심한다. djp 연합으로 김대중은 네 번의 도전 끝에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정부 수립 50년 만에 처음 이뤄진 여야 간 정권교체를 여러분과 함께 기뻐하면서 온갖 시련과 장벽을 넘어 진정한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킨 국민 여러분께 찬양과 감사의 말씀을 드려 마지않습니다. 역사를 보면 결국에는 국민의 마음을 잡고 또 국민을 따라간 사람이 폐배 한 법이 없어요. 물론 일시적으로는 패배하더라도 그 사람이 죽은 후에라도 반드시 그 목표가 달성되고 성공해요. 이승만 정권을 타도한 국민의 역량. 또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도 3선 개헌을 반대하던 그런 국민의 역량. 71년 나를 지지하던 그런 국민들의 열광적인 행태. 이런 것을 보면 이 국민이 반드시 민주주의를 하지 않을 리가 없다는 내 소신. 해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 앞에 서서 희생하는 사람. 불 붙이는 사람, 소리 지르는 사람이 필요한데 그들 중 하나가 '나'다. 남이 안 하더라도 내가 해야 한다. 그런 생각 가지고 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지지는 곧 민주주의를 향한 의지였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온 국민이 험난한 여정을 함께하며 이룬 것이다. 그래서 그는 늘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KBS다큐 고 김대중 대통령의 파란만장한 삶. 영상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