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대한민국 부도나다 2(원인, 과정)

셸 위 댄스-인생의 여정을 소개합니다

by 장하늘

56화




서양수국 (꽃말:교만, 허풍, 변심, 냉담, 처녀의 꿈)



대한민국 부도나다 2(원인, 과정)


1997년 폭설과 한파로 새해 연휴가 시작되더니 1월부터 계속 기업의 부도 소식이 전해졌다. 부도기업 앞에는 재계 서열 몇 위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었다. 1월 30일 한보 그룹 부도, 3월 20일 한미 그룹 부도, 4월 22일 진로그룹 부도, 5월 20일 대농그룹 부도, 6월 2일 한신공영 부도. 한두 개도 아니고 연이은 대기업의 부도를 국민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경제가 안 좋다고는 했다. 몇 년째 적자였던 무역수지는 96년 마이너스 230억 달러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은행들은 금리가 싼 선진국에서 단기로 빌린 돈으로 고금리인 동남아에 장기로 투자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남아 시장이 심상치 않았다. 호황을 누리던 동남아 경제가 몇 년째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떠나면서 화폐가치가 폭락했다. 7월 2일 태국 바트화 폭락, 8월 13일 인도네시아 루피아화 폭락. 위기는 동남아를 넘어 경제구조가 튼튼하다는 다른 아시아 나라까지 확산되고 있었다.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말레이시아, 타이완, 홍콩까지 흔들리자 소문이 돌았다. 다음 타자는 누구인가? 외국인들은 10월 한 달 동안 5,400억 원어치의 한국 주식을 팔아 치웠다.


10월 22일 기아 자동차 법정 관리 신청, 기아그룹이 방아쇠를 당겼다. 기아그룹은 한국에서 여덟 번째로 큰 기업집단이었다. 은행이 기아에 빌려준 돈은 무려 9조 4천700억 원. 이날 하루 외국인들은 333억 원어치의 한국 주식을 팔았다. 외국 은행들은 만기가 돌아온 한국은행들에 대해 기존 관행과는 달리 만기 연장을 거부했고 빚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은행은 달러로 빚을 갚아야 했다.


환율이 급등했다. 달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달러를 팔지 않았다. 달러를 구해야 하는 사람들만 넘쳐났다. 정부는 외화 보유고를 열 수밖에 없었다. 수출 부족으로 외화보유고도 충분치 않은 상황이었다. 정부에서 달러를 풀어도 금방 사라졌다. 원화 가치는 속절없이 떨어지고 달러를 구하지 못한 기업들은 쓰러졌다. 급기야 외화보유고가 바닥을 보였다. 현물환 거래량만 하루 100억 달러인 상황에 보유고에 남은 금액은 39억 달러뿐이었다. 석유도 사고 원자재도 사야 했다. 당시 한 달 수입액은 120억 달러였다. 정부는 11월 21일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다. 23일 IMF는 신속하게 실무협의단을 파견했다. 7월 태국 금융위기, 9월 홍콩 주식시장 붕괴 등 변동성이 매우 높았다. 타이완은 변동환율제를 패지 했다. 그래서 투자자들은 한국이 충분한 외화보유액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은행이 대출을 그만두면 단기차입금을 해결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갖기 시작했고 곧 현실이 되었다.


12월 3일 한국은 IMF의 조건을 거의 모두 수용하는 서류에 서명했다. 한국 경제의 중요한 결정은 모두 IMF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국민들은 분노했다. 하지만 빌린 돈을 갚기까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IMF의 요구사항은 부실금융기관 퇴출, 예금 전액 보장제에서 부분보장으로 대체, 관치금융 개선, 자본개방 확대, 기업 투명성 제고, 기업의 높은 부채 축소, 상호 채무보증 개선,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 등. '망하는 기업을 국가가 도와주지 말고 기업도 개인도 완전 경쟁 체제로 능력에 따라 살아남게 해라.' IMF의 요구는 복잡하지만 간단했다.


IMF의 겨울은 추웠고 혹독했다. IMF는 한국을 믿지 않았다. 약속한 지원금은 한국에 이행 과정에 따라 순차적으로 지급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불신은 시장도 마찬가지였고 환율 변동 상한선이 없어졌는데도 외환시장은 또다시 마비됐다. 환율은 널뛰기하며 1,200원 하던 환율이 1,600원 갔다가 2,000원 가까이 갔다. IMF는 한국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았다. 현직 대통령뿐 아니라 대통령 후보들에게까지도 IMF와의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서명을 요구했다. 12월 5일 56억 달러, 1차 지원금 이후 대통령 후보들이 서명을 한 다음날 12월 19일 35억 달러 추가 지원금이 들어왔다. 이것으론 충분하지 않았다.


국제 신용평가들은 한국을 투자부적격 등급으로 하향 조정했다. 이것은 국제사회에서 그 어떤 국가도 마음만 먹는다면 한순간에 망하게 할 수도 있는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대한민국은 순식간에 투자 위험국으로 낙인찍혔다. 원 달러 환율이 2,000원을 돌파하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외신은 한국경제를 비관적으로 보도했다. 세계시장에서 한국은 위기의 나라일 뿐이고 거품이 빠져 가라앉고 있는 희망이 없는 나라였다.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다. 그 누구도 한국의 경제가 되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암담했던 그때 하지만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곳에서 희망은 싹트고 있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KBS다큐극장 인용]


IMF로 나라가 빚을 지게 되자 신용도가 바닥난 나라에 속해있는 내실이 있었던 많은 기업들 마저 도산했다. 대기업 하나에 관련된 중소기업은 수십 혹은 수 백 개에 달했다.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어떻게든 회사를 살려보려고 노력하는 기업들은 부동산을 내다 팔고 현금을 마련하는데 힘썼다. 대한민국의 화폐가치가 떨어지고 환율이 너무 올라서 모든 노력들이 빛을 잃었다. 직원들에게 급여를 밀리는 기업들도 속출했다. 부동산은 폭락했고, 주식도 폭락했다. 이율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대출이율이 고공행진을 하자 예금이율도 치솟았다.


대기업이 줄줄이 망하는 걸 국민들은 뉴스와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 종금사, 금융사, 카드사 등 금융사들도 하루가 멀다 하고 픽픽 쓰러졌다.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행은 망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믿음과는 달리 증권사가 도산하더니 은행마저 도산했다. 예금을 넣는 사람들이 예금자보호를 못 받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그 어떤 것도 안전한 건 없었다. 모든 상황이 불확실했고 위험했다. 3만 개 이상 되는 기업이 도산했다. 정규직 근로자 130만 명이 직장을 잃었다. 금융기관 1/3이 사라졌다. 뉴스에서는 연일 자살하는 가장들이 나오고 실직자들이 투신하는 등 자극적인 내용들이 흘러나왔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개월이 지나서 산행을 시작했다. 대부분 산에 오는 사람들은 S사에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유니텔 아이디가 공짜로 주어지다 보니 S사 직원들이 50프로 이상이었다. 주말이면 거의 매주 산에 갔다. 머리가 복잡할 때 높은 산을 오르다 보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산에서 느끼는 기운으로 매번 새로운 기운이 생겼다. 초창기엔 당일 산행만 갔다. 그러다 야간산행도 가고 지방에 있는 산들도 가게 되었다. 무박 산행도 가고 1박 산행도 참여했다. 매번 200명 이상이 산행을 하다 보니 거의 모르는 사람들 투성이었다. 자주 참여하다 보니 두 번 이상 보는 사람도 생겨났다.


산에서 몇 번 이상 만나게 되는 분들과 개인적인 이야기도 조금씩 나누게 되었다. 계열사별로 명퇴 희망자를 받는다는 말이 들었다. <명예퇴직>이라니 말이 참 거창하다. 나라의 일생일대의 명운 앞에서 직원들은 기업의 재무안정성에 보탬이 되도록 고통분담 차원에서 명예롭게 퇴직을 해야 했다. 아무런 여파가 없을 것 같았던 우리 회사에서도 어느 날 명퇴 희망자 명단을 받는다는 공고가 떴다. 처음엔 나이 40세 이상 자만 지원 대상자였다. 그러다 달이 지나며 명퇴자 지원 대상이 더 넓어졌다. 급기야 모든 정규직 직원이 대상자가 되었다. 처음보다도 명퇴 조건이 좋아졌다. 명퇴 희망자에게 돈으로 더 보상을 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명퇴라는 명목도 몇몇 회사일뿐 많은 기업들이 대규모 해고를 직원들에게 통보했다.


당시 직장은 단순한 회사가 아니었다. 회사도 직원들에게 충성심을 요구했다. 초과근무, 야근, 박봉은 회사를 키우기 위해 직원들이 함께 헤쳐나가야 하는 고난이었다. 회사를 키우는 것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사명감처럼 직원들은 자신을 희생했다. 평생직장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직원들은 회사를 믿었다. 회사는 곧 자신이었으므로 회사와 명운을 같이 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내몰린 현실은 회사를 살리려면 '아름답게 퇴직'을 해야 했다. 충성심이 강한 많은 회사원들이 회사를 살리기 위해 마지막으로 명퇴를 선택했다. 명퇴를 하고 명퇴 보상금과 퇴직금으로 그 어러웠던 IMF 때 많은 사람들이 자영업의 길로 뛰어들었다. 이때 치킨집 등 여러 종류의 음식점이 말도 안 되게 늘어났다.


퇴직을 선택할 수 없는 곳에서는 대규모 해고 통보가 연이었다. 대부분의 중소기업들은 급여와 퇴직금도 직원들에게 줄 수 없었다. 중고기업을 운영했던 많은 사장들이 돈 때문에 경찰서에 구속됐다. 경제 위기 속에 이혼도 급증했다. 수많은 아이들이 부모의 부재로 고아원에 맡겨졌다. 모든 국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자영업을 운영하던 많은 사람들도 냉각된 경기로 사업을 접어야 했다. 새벽마다 일용직을 구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났고 일자리는 부족했다. 실업을 한 많은 사람들은 살길이 막막해졌다. 어떤 사람들은 거리에 나앉았으며 노숙자로 전락하기도 했다.


작은 희망조차 찾기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하나가 되어 나라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각자 주어진 여건에서 열심히 노력했다. 일자리를 잃은 가장들이 더 많은 기회를 얻기 위해 해외로 나갔다. 이전보다 안 좋은 환경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풀뿌리 민족성을 갖은 대한민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닥을 찍은 상태에서 다시 비상하기 위해 바닥 다지기에 힘썼다. 국민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나라 살리기에 열중했다. 그러나 전 세계 어떤 곳도 대한민국을 믿는 곳은 없는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