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족 구성원에 변화가 있었다. 가족 한 명이 남남이 됐고, 새로운 가족이 탄생했다. 오빠는 새언니와 이혼했다. 개인 사정은 자세하게 물어보지 않았다. 아직 어린 조카 둘은 엄마가 맡게 되었다. 둘째가 겨우 3살인 게 걱정이지만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오빠가 같이 살려고 노력해 봤으나 잘 안 됐다는 것만 안다. 그리고 작은 언니의 아이가 6월에 태어났다. 남자아이인데 똘망똘망하게 생겨서 귀여웠다. 밤톨처럼 단단하게 생겼다. 이제 겨우 머리를 가누는 조카가 귀엽고 신기해서 한참 조카랑 장난치면서 놀았다. 언니는 같은 동네 근처에 집을 얻어 살고 있었다.
98년 여름, 아버지의 첫제사가 있었다.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맞은 제사라서 이것저것 챙길 것들이 많았다. 7월 중순 여름이라 음식 장만하는 것에도 신경을 썼다. 무더운 날씨에 자칫 잘못 음식을 관리하면 금방 상할 수 있기 때문에 음식량도 많이 하진 않았다. 그래도 조상님들 제사상보다는 여러모로 신경을 썼다. 여름이라서 야채 가격도 그리 안 비싸고 과일이 풍성해서 가짓수를 많이 준비했다. 일반 제사상에는 잘 안 올리는 음식들도 마련했다. 나는 강력하게 아버지가 평소에 좋아하셨던 음식들을 올리자고 주장했다. 아버지는 살아계실 때 날고기도 좋아하셨고 바덴바덴 소시지도 좋아하셨다. 장난을 잘 치셨던 아버지를 떠올리니 기분이 좋았다. 살아계셨을 때 아버지가 좋아했던 과자들도 샀다. 아버지는 무엇이든 잘 드셨고 군것질도 좋아하셨다.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일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장례식을 치를 때처럼 기운이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울증이 생기신 것 같았다. 아버지가 투병을 하실 때 이미 엄마에겐 남자친구가 있었다. 아무리 아버지의 투병이 오래됐고 많이 아프셨다고 해도 그게 너무 싫었다. 자식들 앞에서는 크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가끔 오는 아저씨의 행동에서 이미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도 한동안 그분과 연락을 했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아버지의 죽음이 현실이 되자 가장 많이 힘들어하셨다. 한동안 음식도 잘 안 드셔서 걱정이 될 정도였다. 투병이 길었을 때는 '왠수 같던 너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그리운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아버지는 살아계실 때 엄마를 무척 아끼셨다. 자식들 앞에서도 "니들은 엄마 외모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사실 엄마는 못생겼다. 음. 여하튼 객관적으로(?) 안 예쁘다. 자식들은 아빠를 많이 닮았고 외모가 아주 나쁘지 않다. 물론 내 생각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형제자매가 없으셔서 그런지 자식들을 예뻐했다. 그런데도 엄마가 제일 예쁘다고 늘 말씀하셨다. 우리가 어릴 때 엄마는 외출이 잦았고 아프셨기 때문에 집안일에 소홀했다. 집에 들어와서 엄마가 없으면 아빠는 엄마 찾아오라고 어린 자식들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우리는 엄마가 갈 만한 곳을 찾아 한참을 헤매고 돌아다녀야 했다. 그러나 막상 엄마가 집에 오면 아빠는 "왔어~" 하는 게 다였다.
반찬 투정도 없으셨다. 아버지는 엄마가 김치 한 가지에 밥을 줘도 늘 잘 드셨다. 엄마가 젊었을 때 담근 김치는 진짜 맛있긴 했다. 가끔 엄마가 반찬을 몇 가지 더 해놓으면 더 잘 드셨다. 어떨 때는 엄마는 간장 한 가지에 밥상 차려 주셨다. 그런데도 아빠는 한 번의 투정도 없이 잘 드셨다. 늘 엄마 기분을 염려했고 맞춰주려고 노력하셨다. 잘 사는 형편이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엄마에게만은 늘 관대하셨다. 가끔 자식들에게 엄하셨지만 엄마에게는 상냥했다. 어린 시절 부부 싸움을 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어린 내가 볼 때는 엄마가 늘 강자같이 보였다.
엄마는 남편이 죽자 청상과부가 된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그러나 엄마는 이미 손주 셋에 손녀도 둘 본 할머니였다. 엄마는 18살에 아버지에게 납치당해 시집오셨다고 했다. 그리고 이듬해 큰언니를 낳았다. 큰언니는 이른 나이부터 객지 생활하며 공장에 다녔고 21살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 그해 큰언니가 첫 조카를 낳았다. 당시 엄마 나이는 고작 39살이었다. 엄마는 30대에 할머니가 되었다. 요즘 같으면 TV에 나올 일 일지도 모른다. 너무 어린 나이에 시집왔고, 할머니가 됐고 40대에 남편이 죽었다. 그래서일까? 엄마는 세상에 원망이 많았다. 세월이 한참 흘러 지금 엄마는 70대가 되었다. 아직도 세상에 불만이 많은 엄마가 때론 밉고 한편으로는 너무 안쓰럽다.
음식 장만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옛날 일들을 떠올리며 가족들끼리 이야기를 나눴다. 접시에 담은 음식들을 상위에 올려놨다. 오빠는 음식들을 이리저리 방향에 맞게 옮겼다. 낮에 미리 창호지를 사 와서 지방은 내가 써 놨다. 아버지 제사상에 마련한 음식들을 놓고 나니 이전에는 못 봤던 제사상이 만들어져 있었다. 예전엔 늘 제사상 음식 정리를 하는 건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투병이 너무 심했던 몇 년 동안은 제사상을 못 차렸다. 오랜만에 차려진 제사상은 이제 더 이상 조상님을 위한 제사상이 아니었다. 우리 자식들이 한 번도 못 본 조상님이 아니라 지난해까지 우리 곁에 있었던 아버지의 제사상이었다. 아버지의 제사상을 엄마와 우리 자매들은 아버지께 한 끼 식사를 대접하는 마음으로 차렸다.
오빠가 젓가락을 손에서 떨어트리며 탁탁, 상에 두 번 소리를 낸 후 음식들에 올려놨다. 모든 자식들과 어린 손자들까지 함께 절을 했다. 절을 하면서 보니 우리 가족이 참 많아졌다. 아버지가 마지막 제사를 지낼 때는 아빠. 오빠, 나, 작은언니가 다였다. 작은 언니는 그마저 절은 안 했다. 나는 조상님께 제사를 지낼 때도 어릴 때부터 늘 함께 절을 했다. 엄마는 뒤에 계시고 음식 전달하며 늘 그랬듯이 절은 안 하셨다. 큰언니, 큰 형부, 큰언니네 아이 조카 둘, 오빠, 오빠 아이 조카 둘, 작은언니, 작은 형부, 작은 언니 아이 조카 한 명 나 이렇게 열두 명이 함께 절을 했다. 그리고 한 쌍씩 돌아가면서 술잔을 올렸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만 술을 드셨다고 들었다. 나는 아버지가 술을 드시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다. 제사상에서 계속 술을 따르자니 아버지가 너무 과음을 하시는 것 같아 걱정됐다.
아버지로 인해 이렇게 가족들이 늘어난 것이 나는 왠지 울컥했다. 어느 날 갑자기 당숙분들이 안 오시고 쓸쓸하게 제사를 지냈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부지 이제 우리 식구만으로도 방이 가득 차요. 다 아부지 자식들이에요. 아부지 이제 안 아프죠? 아부지 편안하세요. 많이 드시구 가세요. 엄마는 우리가 돌볼게요. 아부지가 자식들 많이 도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