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아버지의 보상금 1

셸 위 댄스-인생의 여정을 소개합니다

by 장하늘

61화.




자미오쿨카스:금전수(꽃말: 행운, 번영, 금전, 돈)


아버지의 보상금 1


내가 중학생일 때 아버지는 처음으로 내 집마련의 꿈을 이루셨다. 15년 전 고향인 양주에서 갑작스럽게 상경해서 10여 년을 단칸방에서 수없이 이사 다녔었다. 자녀 둘은 자기 둥지를 틀며 결혼해서 따로 살았다. 15평 정도 되는 신축빌라였다. 방이 두 개에 거실 겸 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집이었다. 당시 나는 중학생이라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대출을 끼고 집을 샀다. 부동산 불패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오르지 않는 부동산이 있었다. 아주 긴 세월 동안 빌라에 속하는 집이 그랬다. 부천은 경기도 지역 중에서 집값이 비싼 편이었다. 90년에는 서울 변두리보다 더 비쌌다. 부천은 93년 이후에 제1차 신도시 중동이 개발되었다. 개발 전 중동은 모두 논과 밭이었다. 내가 살았던 동내는 도당동과 내동 쪽이었다. 그런 동네가 있다. 90년대에 비싼 편이었고 전혀 오르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내리는 지역이 바로 우리 동네였다.


부천은 옛날에는 복사골이라고 불렸다. 복숭아밭이 많아서 복사골이라고 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서울도 발전사를 보면 로또처럼 비약적으로 발전한 곳들이 있다. 땅이 있었다면? 혹은 집이라도 있었다면 강남, 여의도, 잠실 등처럼 멋지게 인생역전한 곳들이 있다. 한양이 수도일 때 최고로 알아주던 4대문보다 훨씬 더 땅값이 오른 곳들이 많다. 대부분 대한민국 곳곳이 이와 비슷하다. 부천도 서울과 비슷하다. 이전에 더 비쌌던 동내가 개발 유무로 오히려 저렴해졌다. 계획도시가 되려면 대대적인 재개발이 필요했다. 이미 많은 거주자가 살고 있는 곳에 재개발을 하려면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니 재개발은 논, 밭을 이용하는 게 효율이 높았다. 개발된 곳들은 이전에는 상대적으로 사람이 거주하지 않았던, 개발이 안 됐던 곳들이다. 재개발이 되면 사람들이 모이고 상권도 옮겨간다. 이렇게 부동산 가격은 변동하며 차등이 생기게 되었다.


부천 내동에 그때 산 빌라는 아직도 그곳에 존재한다. 당시 우리 아빠가 분양받은 후 빌라 주변에는 여러 채의 빌라가 생겼다. 동네가 모두 빌라촌이 되었다. 우리 집은 복도형으로 된 4층짜리 집이었다. 한 동에 여덟 세대가 살았다. 부모님이 산 집은 무려 1층이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임종을 맞으셨고 마당이 장례식장이 되었다. 한 동네에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집집마다 사정을 알았던 것 같다. 서로의 직업, 가정 형편을 동네 사람들끼리 공유했을 것이다.


나는 20대에 집안일에 관심이 없었다. 집은 그저 떠나고 싶은 곳이었다. 나는 간절하게 집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다. 아버지는 그 시대에 평범한 여느 아버지처럼 고지식했다. 성실하게 일했지만 일하는 것에 충실한 만큼 가정에 세심하진 않았다. 자식들에게 더 자상하지도, 살갑지도 않았다. 엄마는 자주 화가 나 있었고 늘 아팠다. 중학교 때 공부를 열심히 하면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하는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꿈은 무너졌다. 부모님의 바람대로 상업고등학교에 갔고, 고등학교 3학년 때 취업했다. 나는 나를 무너트리는 집을 떠나 훨훨 날아가고 싶었다. 그 시절 내 꿈이 여행가였다는 건 집으로부터 도망가고 싶던 바람이 만들어낸 형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부모님은 나를 무기력하게 하는 부정적인 존재였다. 그러니 더 집에 관심이 없었다.


도망가고 싶었던 이기적인 마음은 결국 항상 나를 공격했다. 그걸 깨닫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마흔 중순이 되어서야 그걸 알았다는 게 신기하다. 이래서 무식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이 있는 것 같다. 나 자신을 알기까지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쓰는 이 글은 나를 반성하는 글이다. 또한 <가족들의 민낯과 나의 과오에 대한 돌아봄>이다. 그리고 현재를 어떻게 채워나가는지를 써 나가는 기록물이다. 나는 늘 회피하고 싶었던 나와 가족을 몇 년 전에야 제대로 보게 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진심으로 이야기를 쓰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유로 나이가 서른이 넘어서야 알게 된 집안 사정들이 많다. 모든 건 원인과 과정, 결과였을 뿐인데 세상이 나를 공격하는 줄만 알았다.


동네 사정을 알고 지내던 빌라에 1층에 사는 옆집 이웃분이 엄마에게 아버지 질병을 물으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호흡기질환으로 오랜 기간 고통받으셨고 폐쇄성 폐 질환과 심장판막증 질병을 얻어 결국 돌아가셨다. 이를 근거로 옆 아저씨가 엄마에게 이런저런 서류를 준비시켰다. 아버지 질병을 상대로 부천시에 보상금을 요구하자고 했다고 한다. 그 모든 과정에 자식들은 배제됐다. 엄마가 서류를 준비했고 엄마는 옆집 아저씨께 모든 걸 위임하셨다. 몇 차례 소송비용은 엄마가 낸 적도 있고, 옆집 아저씨가 도움을 주셨다고 들었다. 살다 보면 이렇게 타인의 도움을 받거나 생각지도 않은 좋은 일도 있기 마련인가 보다. 여하튼 열심히 서류를 준비해서 엄마는 옆집 아저씨에게 착실하게 전달해 주셨다.


보상금이 나올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았고 나오더라도 보상금액이 얼마 정도 일지 확실하지 않았다고 한다. 엄마는 그저 기다리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서류를 넣고 시간은 3년 정도 흘러갔다. 몇 번의 추가 서류가 필요했다고 한다. 근속 기간, 직책 등의 서류가 필요하면 엄마가 시에 가서 서류를 뗐다. 병원에서 진단서와 치료 내용 등 병원비 관련 서류도 마련해서 전달해 드렸다고 한다. 소송이라는 게 빠르고 간단하게 진행되는 게 아니었다. 가끔 한 번씩 엄마는 추가 서류를 마련했다고 한다. 가족들은 이런 과정을 거의 몰랐다. 각자 자식들은 일상들을 이어갔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건 서른 중반이 넘어서였다. 모든 과정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20여 년을 청소 말단직으로 시작해서 바닥청소부터 시작하셨다. 당시 일을 하다가 도둑을 잡으셨고 그 일로 대통령 상을 받으셨다. 덕분에 특진으로 승진했고 조장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 조장에서 감독으로 승진했고 오랫동안 부천에서 제일 높은 직책인 감독으로 일하셨다. 평생 동안 새벽에 1시에서 2시 사이에 출근했다. 말단 직일 때는 부천의 포장, 비포장길을 청소하셨다. 이후 조장이 되었을 때부터는 관리직이 되어 오토바이를 타고 몇 개 구를 돌아다녔다. 감독이 되면서 새벽시간에 매일 부천 전 지역을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다녔다. 당시 대한민국은 전 지역이 개발하느라 공사 중인 곳이 많았다. 아버지의 일 자체가 먼지와 투쟁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네 명의 자녀를 둔 가장이 30년 가까이한 직장에서 일을 했다. 일과 관련된 일이 호흡기, 폐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병을 얻었고 정년 퇴임을 채우지도 못했다. 투병생활을 6년을 넘게 했다. 결국 나이 60이 되기 전에 생을 마감했다.

아버지는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을까?

받을 수 있었다면 생명 값으로 얼마의 보상금이 나와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