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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혁 Jun 21. 2021

소크라테스의 변명

무지의 지, 그리고 올바른 것에 대하여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신을 믿지 않고, 천상과 지하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죄로 고발당해 재판에 처해진 소크라테스의 공개 변론을 담아낸 책입니다. 소크라테스 자신은 책을 남기지 않았으며 그에 대한 다른 많은 책이 그러하듯 이 책 또한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이 그의 말을 빌려 저술한 책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죄가 없음을, 죄가 없음에도 고발당한 이유를 그 자리에 있는 배심원단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는 올바른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말을 해서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그를 고발한 사람들이 말하는 죄가 없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자신이 신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신과 관련된 현상을 믿을 수 있는지, 그리고 신들의 자식인 신령을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신을 믿지 않는다는 죄를 씌운 사람들에게 그들의 모순을 지적합니다. 또한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것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그를 고발한 사람에게 질문을 하며 반박합니다. 물론 소크라테스의 반박 또한 완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통해 그의 죄 또한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린 것이지요.


자신에게 그들이 씌운 죄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한 뒤에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자신이 왜 고발당해 이 자리에 서게 되었는지, 자신의 생각을 밝힙니다. 이런 것이지요, '지금까지 나는 나를 고발한 사람들이 내게 씌운 죄가 없다는 것을 밝혔다. 또한, 나는 그들이 근거 없이 나를 고발한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부터 그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앎'에 대한 철학을 보여줍니다. 저는 이 부분이 소크라테스의 변명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신탁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그의 지인이 신탁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소크라테스다.' 신탁을 들은 지인은 소크라테스에게 이를 전하고 소크라테스는 믿지 않습니다. 자신은 아는 것이 많지 않은데 어떻게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지혜롭다고 불리는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정치인, 시인 그리고 공학자를 찾아가게 됩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소크라테스는 한 가지를 알게 되지요. 정치인과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는 사실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시인과 공학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그들은 자기 자신의 영역에 대해서는 소크라테스보다 많이 알고 있지만 그 단편적인 앎을 착각하여 다른 영역에서도 본인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모른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과정에서 자신이 미움을 사게 되었고 그것이 고발의 이유라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그는 이 여정을 통해 한 가지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신탁이 소크라테스 자신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한 이유는 그는 자신이 모른다는 것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그 외 지혜롭다고 불리는 다른 사람들은 실상 아는 것이 없으면서도 자신들이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입니다.

'무지의 지'는 시대를 초월해서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아니 오히려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점점 더 복잡해지며 그 의미가 더 깊어지는 듯합니다. 먼 옛날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대는 사람들의 생활이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그때도 세상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 가득하고 어려운 일도 많았겠지요. 하지만 다들 비슷한 집에 살고 비슷한 옷을 입고, 농사나 간단한 상거래를 하며 생활을 유지하던 시대와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개성을 표출하고 각자의 삶의 방식을 만들며 살아가는 오늘날은 현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에서 복잡함의 정도가 다르지 않을까요. 특히, 인터넷과 SNS는 무수히 많은 정보를 쏟아내고 또 연결해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세상을 급격히 복잡하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복잡한 세상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단순했던 시대에, 지혜로 후세에 이름을 남길 만큼 똑똑했던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나마 아는 것이 있다면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고 말이지요. 그래서 그는 포용적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아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만나는 사람마다 대화를 나눕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이 옳은지,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르면 어떻게 다른지 묻고 답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는 비록 언제까지고 모르는 사람일지언정 알아가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아는 상태를 1, 모르는 상태를 0이라고 했을 때 소크라테스는 스로 말한 것과 같이 절대 1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만, 그는 본인이 1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끊임없이 배우려 했기에 1을 향해 다가갔을 것입니다. 1은 아니어도 0.9, 0.99가 되어 갔겠지요. 오늘날 우리는 마치 아는 것처럼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사건이나 현상에 대해서 이미 모든 것을 안다는 마음가짐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사건에는 무수히 많은 배경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지만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알고 있는 것조차도 자신의 생각이 아닙니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누군가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아는 척 행동하는 것입니다. 아는 척하는 사람이 다시 아는 척하는 사람을 만들고 또 만들어갑니다. 아는 척하는 사람만 늘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제대로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모두가 아는 척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나와 같은 것을 아는 척하는 사람이 많을 때 내가 아는 것이 진실이 됩니다. 그러니 옳고 그름에 대해서 파고드는 것보다는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남들보다 빠르게 떠들고, 더 크게 떠드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사실이 진실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가 진실이 됩니다. 그리고 사실로서의 진실이 아닌 다수로서의 진실은 필연적으로 폭력을 낳게 됩니다.


다수로서의 진실이 낳는 폭력은 소크라테스의 이후 변명과 재판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고발당한 진짜 이유를 밝힌 소크라테스는 이어서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불의에 타협하라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지요. 그들은 소크라테스에게 당신이 굽히고 들어가면 된다고 말합니다. 억울하더라도 재판장에 피고인으로 서있으니 배심원에게 불쌍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지요. '좋게 좋게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물어보는 것을 멈출 수도 없으며 지금의 상황을 비굴하게 해결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신은 소크라테스가 가장 지혜롭다는 신의 말을 들은 것이기 때문에 이를 보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계속 확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또한 재판을 받는 자리에서 비굴하게 이 상황을 해결하는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아테네를 대표하는 지식인인 소크라테스가 비굴한 행위로 그 순간을 모면한다면 이는 모든 아테네 시민들을 모독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모두의 명예를 위해서 자신은 불의에 굽힐 수 없다는 것이지요. 잘못된 것이 있으면 바로잡고, 불의에는 저항하는 것이 옳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옳음'은 이후 배심원 표결에서 그를 유죄, 그리고 사형에 이르게 합니다. 소크라테스도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지요. 그런데 왜 옳은 말을 한 소크라테스가 그 이유로 사형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저는 올바른 것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는 불의에는 저항하는 것이, 비난을 받더라도 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어렵지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편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올바른 것이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괜히 찔리는 마음이 들지요. 누군가 내 앞에서 너무나 바른말을 한다면 그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 자신도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 한편이 불편합니다. 무단횡단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는 가끔 무단횡단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무단횡단을 하면 안 되는 것을 이야기하면 동의하면서도 그렇지 못한 자신에 대해 가책을 느끼지요, 불편한 감정이 듭니다. 괜히 나 자신이 비난받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듣고 있는 배심원도 같은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올바른 것은 알겠지만 그의 말이 불편합니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떳떳하다면 비굴하게 행동해서는 안된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과거에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비굴하게 행동했던 자신이 비난받는 듯한 느낌이 들지요. 그래서 자신을 비난하는 소크라테스는 거부합니다. 결국 배심원 투표를 통해 사형 판결을 받게 되지요.

옳다는 것은 이러합니다. 올바른 것이 이상적인 세상에서는 항상 올바른 결과를 낳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는 올바른 것이 항상 올바른 결과를 낳지는 못합니다. 인간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완전한 사람은 없다고 보는 것이 맞겠죠. 저는 그래서 옳은 것을 굽히지 않고 이야기한 소크라테스가 멋지면서도 아쉽습니다. 그가 조금 더 살아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갔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이미 고령이었기에 살 날을 조금 늘리는 것보다 올바름에 대한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 깨끗한 죽음을 택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선택과 같은 일은 우리에게도 일어납니다. 올바른 것을 굽히지 않고 주장할 것인가, 아니면 조금은 굽히더라도 오래 남아서 완전하지 않을지언정 더 많은 것을 이루는 것이 좋을 것인가. 정답은 모르겠습니다. 가늘더라도 긴 것이냐, 짧지만 두꺼운 것이냐 사이의 선택이겠죠. 다만,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 선택 앞에서 소크라테스의 선택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소크라테스의 변명, 그리 길지 않습니다. 재판장에서 소크라테스의 말을 옮긴 것이기 때문에 100쪽 남짓으로 쓰여 있지요. 길지 않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오히려 오늘날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것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무지의 지', '올바르다는 것의 역설', 이 두 가지가 소크라테스가 변명을 통해서 말하고자 했던 가치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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