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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혁 Jun 25. 2021

데카르트

진리를 탐구하는 방법에 대하여

흔히들 데카르트를 근대를 열어젖힌 철학자라고 부릅니다. 학교에서 데카르트에 대해 간간히 듣게 되는 내용은 그의 대표적인 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같은 것, 혹은 누워있던 데카르트가 천장에 붙은 파리를 보고 떠올렸다는 좌표 체계가 아닐까 생각되네요. 어떤 곳에서는 철학자로 배우게 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수학자로 배우게 되는 사람, 물론 오래 전의 철학자는 철학뿐 아니라 수학, 과학, 미술, 음악 등 여러 학문을 가리지 않고 그들의 생각을 남겼던 것과 같이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데카르트에게 수학은 자신이 탐구하고자 하는 여러 학문 중 한 가지로만 여겨지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데카르트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진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한 사람입니다. 인간이 탐구해야 하는 진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으며, 그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을 따라야 하는지, 그리고 그 예시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를 그의 책에서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수학이 진리 탐구를 위한 대표적인 방법이었던 것이지요. 물론 제가 그의 생각에 대해 세세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늘 그렇듯 제가 이해하는 선에서 데카르트의 철학에 대해, 그리고 나의 생각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려 니다.


모든 철학이 시대적 배경 속에서 태어나듯, 데카르트의 철학 또한 중세가 끝나고 근대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물론 그 과도기적인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후 근대를 대표하는 결정적인 생각을 보여줬기 때문에 데카르트가 근대를 연 철학자라고 불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간단히 중세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중세가 있고, 근대가 있고 그 변화에 데카르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중세를 대표하는 개념은 흔히들 알고 있듯 '신'입니다. 가톨릭으로 대표되는 중세의 신은 중세의 진리였습니다. 중세의 진리가 신이었다는 게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모든 문제의 근거를 신이 제공해주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윤리 그리고 자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근거는 신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지진이나 홍수는 신의 분노였고, 사람이 선행을 해야 하는 이유는 선행을 해야 죽어서 신과 함께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고민할 것이 없었던 시대였지요. 현대의 우리가 충분히 공감하기는 어려울 수 있어도 당시에는 신이 있다는 믿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줬을 것입니다. 오늘날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탐구를 통해 세상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된 우리들도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마주하게 되면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고 초월자를 찾는데 당시에는 더 큰 의지가 되었겠지요. 아무튼, 그렇게 모든 것의 근거가 되고 사람들을 안정적으로 지지하던 신의 권위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게 되며 약해집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현상, 삶의 근거를 제시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누군가는, 무엇인가는 대체해야 했습니다. 이 자리에 인간의 '이성'을 놓은 것이 근대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을 놓은 대표적인 사람이 데카르트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근대의 이성중심주의, 그리고 아직도 그 이성중심주의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데카르트의 시대에는 그 전환이 너무나도 큰 변화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자신의 여러 저서에서 인간이 어떻게 하면 자신의 능력으로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지에 대해 탐구합니다. 인간 이성을 진리 탐구의 시작이자 근거로 제시했지만 인간 이성의 힘을 아무렇게나 사용한다고 진리를 탐구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그의 저서 이름이 '방법서설', '정신지도규칙'인 것과 같이 이성을 통해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방법과 규칙을 제시합니다. 실제로 그의 책은 이러한 규칙들 제시하고 설명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물론 하나하나의 규칙을 읽어보고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대의 눈으로 보게 되면 하나하나의 규칙이 크게 흥미롭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규칙을 탐구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의 시대였던 중세에는 신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는 방법이나 규칙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신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진리였기 때문에 틀린 것이 없고 올바른 것뿐입니다. 신이 말하는 것을 잘 듣기만 하면 진리가 됩니다. 그것을 어떻게 듣거나, 어떻게 사용해야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인간의 이성을 진리의 근거에 두지만 신과 같이 완전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인간 이성은 진리를 탐구하는 데 사용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고, 한계 또한 명확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성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아야 하고, 이성이 어디까지 탐구할 수 있는지 또한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야 틀리지 않는 것이지요. 데카르트가 제시한 방법은 연역과 직관입니다. 그리고 연역과 직관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순서를 지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큰 것을 한 번에 이해하려 하지 않고 기초적인 것에서 시작해서 연역과 직관을 통해 옳은 것과 그렇지 않을 것을 판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작은 것에서 시작해서 나아가 보편적인 진리를 찾아가는 것, 이것이 데카르트가 말하는 진리 탐구의 방법입니다. 실제로 이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정신지도규칙'에서는 21가지에 달하는 규칙을 통해 규칙을 제시하고 설명해가며 이야기합니다. 책을 읽다 보면 데카르트라는 사람은 이성을 중심에 올려두긴 했지만 이성의 불완전함을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아주 강한 체계를 만들려고 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성이 진리 탐구의 질료가 된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이성은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운 질료인 만큼 이를 잘 활용하기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부단히 노력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가 좋은 방법이라고 제시한 연역과 직관이 수학과 이어집니다. 그가 생각했을 때 연역과 직관이 이성을 통해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방법인데 지금까지 봤던 학문 중 이를 가장 잘 실천하고 있는 학문이 바로 수학이라는 것이지요. 모호한 것을 논하지 않고, 직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진리에서 시작해서 연역적으로 탐구해나가는 수학의 모습이 그가 생각하는 이성의 진리탐구 방법과 가장 적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수학을 탐구했고, 그의 책에서도 수학 공부를 권합니다. 데카르트는 철학과 수학을 각각 생각한 것이 아니라 진리, 즉 보편적인 원리를 탐구하는 그의 철학에서 가장 진리 탐구와 가까운 학문으로 수학을 생각했던 것이지요.


근대와 데카르트, 그리고 이성중심주의는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본다면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대단한 전환이었다고 이해할 수는 있지만 지금의 이성 수준이 당시보다 높아졌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실로만 이해하면 충분하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아직 우리는 근대의 사상이 지속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불안정하던 그 시작보다 지금이 대단하게 느껴질 수 있지요. 그런데 데카르트가 그 이성이 시작되는 시기에 이성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 부단히 체계를 만들려고 노력했던 것을 보다 보면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 이성은 대단합니다. 그건 사실이지요. 다른 어떤 종도 이루지 못한 것을 순수하게 인간 이성의 힘으로만 우리는 이뤄왔습니다. 자연의 비밀을 밝혀내고 우리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들고 과거에 상상만 하던 것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성이 많은 것을 이뤄오는 동안 우리는 이성이 가진 불완전함은 조금씩 잊어가는 듯합니다. 마치 인간 이성이 날것 그대로의 상태에서도 옳다고 믿게 되는 것 같아요. '내가 보고, 내가 듣고, 내가 느끼고 거기에 대해서 내가 생각했기 때문에 옳다.', '집단 지성이 항상 옳다.'이렇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좋다고 믿어지는 그 어떤 것도 부작용이 없는 것은 찾기 어려운 듯합니다. 이성이 '선'의 방향에 속해 있는 것은 맞지만 이성만을 추구하는 것에는 부작용이 따릅니다. 이성은 그것을 통해 만들어 낸 결과에 권위를 부여하게 됩니다. 한 가지에 권위를 부여한다는 것은 그 반대되는 것을 배척하게 되는 것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필연적으로 이성의 발현은 이성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배척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더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데카르트가 제대로 된 이성의 발현을 위해서 많은 규칙을 제시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이성을 통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과정에서 올바른 규칙을 지켜내야 합니다. 사실 여러 규칙을 만들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이성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한 단 한 가지 규칙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저는 '의심하는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데카르트 또한 여러 규칙을 제시했지만 의심하는 것을 중요하게 이야기합니다. 또한 그의 대표적인 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또한 존재하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을 통해 의심할 수 없는 것만 남겼을 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근대를 시작하며 우리는 이성이라는 말을 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성을 통해 인간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으로 말을 달리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빠른 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말이 제대로 된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지 항상 의심해야 합니다.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의심 없이 달리기만 하는 말은 우리를 낭떠러지로 데려갈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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