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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혁 Jul 18. 2021

존 롤즈, 정의론

정의로운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롤즈의 정의론은 그가 이 책에서 제시한 정의의 기본 원리에 의해 널리 알려진 책입니다. 그의 정의론 책을 읽지 않았더라도 정의에 대한 이론을 접한 적이 있다면 그가 제시한 원리만큼은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요. 직관적이면서도 합리적으로 정의의 원칙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더 널리 알려지게 된 그의 원칙은 2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 자유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기본적인 자유에 대해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하며 이를 침해할 수 있는 것은 자유 뿐이라는 것입니다. 표현하기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첫 번째 원칙이 이야기하는 바는 밀이 자유론에서 이야기한 것과 통합니다. 누구에게나 최소한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며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첫 번째 원칙에 따르면 노예제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롤즈 이전의 공리주의적 관점에서는 노예를 통해 많은 사람의 행복이 증진된다면 이를 용인할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자유를 불가침의 영역으로 설정하게 되면서 롤즈는 이러한 부작용을 차단합니다. 이러한 첫 번째 원칙은 오늘날 우리도 누구나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지만 롤즈의 정의론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두 번째 원칙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두 번째 원칙은 2가지 세부 원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중 첫 번째 원칙인데요, 바로 '최소 수혜자의 최대 이익' 원칙입니다.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사회적 계약은 최소 수혜자가 최대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꿔 말하면,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최대한의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우리 사회의 규칙을 구성했을 때 공정한 사회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원칙을 통해 롤즈는 오늘날 우리가 나아가고 있는 복지 국가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롤즈가 이야기한 정의의 원칙은 그 자체로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복지 국가의 근거를 마련한 만큼 현대 사회에 영향력이 강하지만 원칙 만큼 더 중요하고 널리 알려진 것은 그 원칙의 근거가 된 사상입니다. 많이들 들어보셨을 수도 있는 '무지의 베일'이지요. 롤즈는 정의의 원칙을 만들기 전에 우리가 어떤 상태에서 정의의 원칙을 세워야 하는지부터 고민합니다. 롤즈는 개인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공정한 정의의 원칙을 세우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롤즈의 정의는 복지를 향해 있었기 때문에 개인이 가진 것 혹은 가지게 될 것을 어떤 의미에서는 제한할 수 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롤즈는 주관적인 개인이 아닌 '무지의 베일' 뒤에 서 있는 합리적이고 무관심한 제3자를 생각했습니다. 내가 어떤 신분으로, 또 어떤 가정에서, 어떤 능력을 가지고 태어날 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누구와도 이해관계가 없는 제3자일 때 가장 객관적인 정의를 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무지의 베일이 가지고 있는 논리가 정의를 고려할 때 단순하면서도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에 롤즈의 정의가 널리 알려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정의의 원칙보다 오히려 무지의 베일만 이해해도 그의 정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남들보다 잘 살고 있을 수도 있고, 남들보다 더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위해 '너가 가진 것을 나눠야 한다, 그들이 가능한 잘 살 수 있도록 우리 사회의 약속을 바로잡아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한다면 물론 그들을 돕기 위한 생각을 할 수는 있지만 충분한 정의를 바라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사람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타인의 가난과 고통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그 불편한 마음을 제거하기 위한 수준, 혹은 그들을 진심으로 위하는 것이 아닌 그들의 안타까운 상황을 동정하는 수준에서 사회의 정의가 만들어지게 되지 않을까요. 무지의 베일을 이러한 문제를 보완합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나는 남들보다 잘 살 수 있지만 무지의 베일에 서 있는 나는 앞으로 내가 어떤 삶을 살게 될 지 알 수 없습니다. 나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날 수도 있지만 내전이 일어나는 국가에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하루에 100만원씩 써도 부족함이 없을 수 있지만 하루에 1000원을 쓰기도 부담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무지의 베일 뒤에 서 있다면, 그래서 내가 어떤 삶을 살게 될 지 알 수 없다면 우리는 조금 더 공정함에 대한 생각을 객관적으로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롤즈는 이러한 베일 뒤에서 최소 수혜자의 최대 이익의 원칙이 나온다고 이야기합니다.


롤즈의 정의론은 많은 것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지의 베일을 이야기하고, 각자 그 뒤에 서서 나라면 어떤 사회를 원할지 생각해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제는 다시 돌아와서 우리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롤즈의 정의론 이후로 우리는 복지 국가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나라마다 복지를 추구하는 수준은 다르지만 복지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느 정도의 복지를 추구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일입니다. 최소 수혜자의 최대 이익의 원칙은 무지의 베일에서 등장한 합리적인 원리지만 현실은 조금 다릅니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최소 수혜자라고 할 때 이들이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여러분에게는 어떤 생각이 떠오르나요. 가난한 사람은,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나보다 노력을 덜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는 않나요. 혹은 굳이 그런 생각이 아니더라도 요즘 같이 팍팍한 세상에서 내 한 몸 건사하기도 어려운데 내가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내놓아야 한다는 것에거 거부감이 들지는 않나요. 마치 자신이 계발한 능력과 노력을 통해 얻은 것을 나태한 사람들과 공유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 불쾌한 감정이 들지는 않나요. 나아가 우리가 항상 두려워하는 공산주의가 생각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거부감과 두려움은 강력합니다. 복지를 통한 이익은 나에게 직접적이지 않지만 나의 이익을 포기한다는 것은 나에게 직접적이기 때문입니다. 거부감, 불쾌감, 두려움도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와닿는 감정이지요. 무지의 베일 뒤에 서 있는 나는 현실을 살고 있는 내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그가 하는 말이 이해가 가더라도 우리는 그의 말을 듣기 어렵습니다. 현실은 내가 살아가고 현실의 힘든 일이나 고통은 내가 감당하고 있는데 무지의 베일 뒤에서 생각만 하고 있는 그의 말만 들을 수는 없지요. 복지는 근본적으로 이러한 현실적 어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이 각박해질수록 복지가 가지는 현실적 어려움은 점점 더 심화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의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복지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로 포기할 수는 없지요. 복지의 선을 정하는 일은 항상 논의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논의는 롤즈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논리로만은 할 수 없습니다. 정의의 세계에서 논리는 현실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현실적인 판단을 하게 되겠지요.


이렇듯 롤즈의 정의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가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이상 논리가 아닙니다. 더 현실적인 이유가 필요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일하고 공부하고 그로 인해서 지치고 힘들어하는 현실의 나를 설득할 이유가 필요한 것입니다. 무지의 베일 뒤에 있는 제3자를 더 이상 설득해봐야 현실의 나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복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회적인 연대를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며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나눠야 한다는 것이지요. 더 건강한 사회가 더 강하고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각 개인으로서 진화론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서 진화론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복지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나는 혼자 살아가고 있지 않지요. 우리 가족, 친구들, 우리 나라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과 사회적으로 얽혀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도 한계가 있습니다. 사회라는 울타리는 정하기 나름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나의 것을 포기하고 복지를 증진시킬 생각이 충분히 듭니다. 우리 가족을 위해 내가 가진 것을 내어 놓고, 힘들어하는 친구를 위해 도움을 주는 것은 얼마든지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되면 이러한 복지는 근거를 잃습니다. 남이 되는 순간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내어 놓는다는 말은 내 자유를 제한하겠다는 말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 내가 번 돈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나요.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나의 자유를 박탈해도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물론 엄밀하게 정의와 자유를 논하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이해하면 안된다고 이야기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의 사람들에게 복지는 그런 의미입니다. 나의 노력을, 나의 자유를 제한해서 타인을 위해 쓰겠다는 말입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과거의 고생했던 내가 지나가고 침해되어서는 안되는 나의 자유가 떠오릅니다. 자유의 이름으로 결사 반대하게 되지요. 우리에게는 더 근본적인 이유가 필요합니다.


결국 정의에 대한 논의는 자유와 부딪히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롤즈의 정의론은 첫 번째 원칙에서 자유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자유는 가장 기본적인 자유입니다.  하지만 노예가 되지 않을 자유가 자유의 전부를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내 돈을 마음대로 쓸 권리,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유는 이것에 가깝지 않을까요. 그리고 내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유는 필연적으로 복지와 충돌합니다.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부분은 이 지점이 아닐까요. 당신은 타인의 이익을 위해 당신의 자유를 포기할 수 있나요.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듭니다. 우리는 왜 자유를 추구할까요. 자유는 그 자체로 목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헌법에 목적으로서 명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자유는 다 목적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생각할 수 있지는 않을까요. 물론 다른 사람이 나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의 천부인권적인 자유를 논하려는 것 아닙니다. 아까 이야기한 내 돈을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유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이러한 자유를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자유로워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우리가 각자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는 서로 같지 않습니다. 태어난 곳, 자라온 환경, 부유한 정도, 그 어떤 환경도 동일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똑똑함, 건강함, 악기를 다루는 재주, 그 어떤 능력도 동일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만들어달라고 한다면 억지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공정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사회에 바라는 정의는 내가 다른 사람과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나의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남들이 가지고 태어난 조건은 10이지만 내가 가지고 태어난 조건은 5일 수 있습니다. 5를 10으로 만들어달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5만큼 발휘하는 사회가 되어줬으면 하는 것이지요. 물론 내가 거기에 노력을 더해 5를 6으로, 7로 또 그 이상으로 만들 수도 있겠지요. 내가 가진 것만큼은 충분히 계발하고 실현할 수 있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가 아닐까요. 그게 우리가 사회에 바라는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정의로워야 하고, 공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는 개인이 각자의 능력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어야 가능합니다. 자유와 평등은 모두 좋은 가치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헌법에 명시하고, 모두가 이를 지킬 것이라는 약속을 하면서 만들고 싶은 궁극적인 사회는 나의 가치를 충분히 실현할 수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자유도, 평등도 언제나 이러한 사회를 향해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다시 자유로 돌아가게 되면, 자유는 그대로 둔다면 공정함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각자 다르게 태어나기에, 다른 환경과 능력을 가지기 때문에 그 상태를 그대로 둔다면 결과는 달라집니다. 여기까지는 각자의 운이지만 이 결과는 대물림되기 시작합니다. 자유는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불공정을 낳습니다. 그리고 불공정은 우리가 자유를 통해 지키고 싶어 하는 사회의 모습을 잃게 합니다. 더 이상 우리는 내가 가진 것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는 사회에 살아가게 됩니다. 다음 세대는 더욱 그런 사회를 살게 되겠지요. 자유의 목적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자유라는 녀석은 이렇습니다. 우리를 잠재력이 충분히 발휘되는 사회라는 목적으로 데려다 주는 훌륭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대로 방향을 잡아 주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 목적지와는 반대로 달릴 수 있는 도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의를 떠올려야 합니다. 공정을 논의해야 합니다. 복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게 진정한 자유를 위하는 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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