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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슨한 연결의 생명력

[20.10.14 세계일보 사이언스프리즘/내 글]

대학 1000년간 살아남은 비결
학과·구성원 차이에 대한 존중
약한 연결 장점 활용 노하우로
조직 변화 대한 적응성 갖춰야


취업에서 가족이나 친한 친구 등 강한 유대를 가진 사람보다는 업무상 안면 있는 정도의 약한 유대를 가진 사람이 큰 도움이 된다는 이론이 있다. 그래노베터라는 학자가 1973년 미국 사회학회지에 발표하면서 널리 알려진 이 이론은, 일자리 찾기에서 직무상 관계 외에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필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한 번도 직접 뵌 적이 없고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대화를 해오던, 다른 나라에 계시는 분이 상당히 좋은 직장에서 일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물론 그분은 학회활동을 통해 신분이 확인된 분이었다. 그분이 나의 무엇을 보고 이런 중요한 제안을 할까 생각도 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소셜미디어상에서 내 연구에 관한 대화를 했던 부분에서, 오히려 어릴 적부터 자주 만나온 ‘절친’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측면도 있다고 생각되었다.


            

느슨한 연결을 잘 보여주는 예가 또 있다. 바로 대학이다. 칼 윅이라는 학자는 하부조직들이 고유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서로 느슨한 연결로 이어져서 큰 조직을 만드는 형태를 느슨하게 연결된 체계(loosely coupled systems)라고 불렀고 대학을 그 대표적인 예로 들었다. 대학에는 적게는 수십 개에서 많게는 100개가 넘는 학과가 있고, 각 학과의 구성은 상이하며, 그러한 구성에서 서로 다른 문화가 꽃피게 된다. 예를 들어 학위수여 기준에서도 어떤 학과는 구술평가를 중시하는 반면, 어느 학과는 지도교수와 협업을 통해 저명 학회나 학술지에 게재했을 때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할 준비가 된 것으로 판단한다. 교수 평가에서도 그렇다. 무용이나 성악을 하는 학과의 교수 승진 기준이 수학이나 물리학과 같을 수는 없다. 심지어 같은 학과 내에서도 전문 분야에 따라 저자별 기여도 인정 방식이 상이한 경우도 있다. 특히 대학이라는 제도를 오랜 기간 성장시켜온 서구에서 이러한 하부시스템(학과 또는 행정부서) 간 차이는 도드라진다. 그렇다면 대학은 1088년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처음 등장한 이래 어떻게 이렇게 제각각인,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시스템으로 1000년 가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일까?



바로 차이에 대한 존중이 한 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학과나 구성원들이 전문성을 갖추고 있었기에 차이에 대한 존중이 꼭 필요했고, 그러한 존중이 교육, 연구, 사회봉사라는 직무를 더 용이하게 했기 때문이다. 또한 개별 학과나 행정 단위들이 조금씩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으므로, 서로 다른 혁신을 시도해보기 좋은 환경이다. A 학과가 학생들의 희망에 따라 매년 정기적으로 지도교수와 만나는 제도를 도입해 좋은 성과를 얻는다면 캠퍼스 안에서 행정직원 간의 유대, 교수 간의 소통, 공식적 회의 등을 통해 입소문이 나게 된다. 요즘은 온라인 커뮤니티가 발달해서 이러한 입소문의 전파는 더욱 빠르다. 결국 작은 혁신들이 시도되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그러한 내력이 서로 공유되면서 대학은 변화에 대한 적응성을 갖추게 되고 1000년 이상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대학의 사례가 보여주는 느슨한 연결의 장점을, 글로벌 경쟁에 노출된 일반 기업이 바로 도입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대학이 기업보다 의사결정이나 문제해결력이 떨어지는 경우도 많다. 게다가 요즘 대학가에는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시대에도 이러한 느슨한 체계가 대학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이 크다. 하지만 ‘진짜 사나이’나 ‘가짜 사나이’가 보여주는 일사불란한 조직 문화가 정답은 아니다. 그러한 군대형 조직은 위기대응에 유효한 조직형태로서 리더십이 실패할 경우 조직 전체가 공멸할 수밖에 없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다행히 요즘은 군대나 기업도 하부조직에 미래를 스스로 개척해보라는 자율권을 부여해서 약한 연결의 장점을 도입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대기업의 독립적 사내 벤처로 있다가 지금은 독립해 엄청나게 성장한 기업들이 점점 늘어날수록 약한 연결의 장점을 활용하는 노하우는 점점 커질 것 같다. 똘똘 뭉쳐 하나가 되겠다는 구심력과 자꾸만 기존의 틀을 벗어나려는 원심력이 절묘한 조화를 이룰 때 조직은 살아남을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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