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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Nov 03. 2023

사울 레이터와 아들

조현병과 동거하는 아들의 전시 관람기

사울 레이터 전시 :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2021.12.18.~2022.3.27.)


사울 레이터, 그를 만났다. 언제나 젊은 이방인 사울 레이터,


“난 그저 누군가의 창문을 찍는다. 그게 뭐 대단한 업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창문에 비치는 아이의 눈망울과 창문 너머 굽은 노인의 등, 주근깨가 잔뜩 있는 여자아이의 반항적인 눈빛, 눈, 습기를 가득 품은 창문, 빗방울, 빨간 우산, 파란색 차. 눈을 맞고 걸어가는 굽은 뒷모습. 이런 장면들이 둥둥 떠다닌다. 멈춰있는 사진이 아니라 영상의 한 장면 같다. 사진 하나하나에 스토리가 꽉 차 있다.


전시 한 번으로 오래 무명이었고, 짧게 유명했고, 죽고 나서 더 유명해진 그의 작품을 이해하긴 쉽지 않겠다. 우선 그에게 영감을 받았다는 영화 「캐롤」을 보고, 그다음 사울 레이터의 다큐멘터리를 보기로 한다. 그리고 전시를 다시 봐야겠다. 조금 더 알고 싶은 세계다.    

 

영화 <캐롤>부터 보고 전시 관람 준비


오늘 전시는 아들과 함께 갔다. 아들은 설레었는지 전시 시간보다 2시간 일찍 와 있었다. 엄마와의 데이트가 얼마만인가. 게다가 전시는 처음일 것이다. 반차를 내고 올라오는데 아들이 참다못해 두 번 전화를 했다. 드디어 만났다. 아들은 먼 길 온 내게 커피를 사 주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예약한 티켓을 교환했다. 코트와 가방을 사물함에 넣어두고, 큐알을 찍고 체온을 잰 다음 소독제를 바르고 전시장에 입장했다.(22년 1월 상황) 전시공간은 넓지 않았다. 1층은 초기 흑백 사진, 2층은 컬러 사진 순서로 전시되어 있었다. 아들은 어둡고 좁은 공간을 불편해했다. 결국 전시를 끝까지 못 보고 먼저 나갔다. 그래도 이 정도가 어딘가. 기다려 주다니.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데이트의 꽃은 식사니까. 아들이 예약해 둔 태국 음식점까지 걸어갔다. 가는 길에 또 처음이라는 명동성당에 들렀다. 아들은 명동성당에서 미사 드리는 게 소원이란다. 그까짓 소원 들어줄게. 이번 주일에 오기로 했다.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불안이 밀려오나 보다. 잘 참고 식사를 끝까지 했다. 집으로 돌아올 때에도 불안은 잦아들지 않았지만 아들은 잘 참았다. 엄청난 진전이다.


노을이 지는 시간에 그는 자주 불안해한다. 불안 때문에 저녁 외출은 꿈도 꾸지 못했던 때도 있었다. 이제는 불안도, 망상도, 환청도 조금씩 친해지는 중이다. 14년 동안 아주 아주 조금씩. 아들은 가끔 불안한 눈빛으로 “엄마가 가짜로 느껴지는 건 내 망상이지?”라고 묻는다. 아들의 망상은 엄마가 가짜로 보이는 것이다. 까그라 증후군(Capgras syndrme), 어떤 사기꾼이 위장을 하고 나와 가까운 사람의 행세를 한다고 믿는 증상이다.


만 11살 2개월에 조현병이 발병한 아이는 불안, 망상, 환청, 조현병의 3대 증상을 모두 가지고 있다. 웬만한 약은 듣지 않는다. 조현병 치료제 중 가장 독하다는 클로자핀을 먹어야 하고, 약도 모자라서 주사를 맞아야 한다. 이제 27살 청년이 된 아들에게 증상은 여전히 너무 무겁고 견딜 수 없는 혼란이다. 모든 순간은 도전이다. 혼자서 전시장을 찾아오는 것도, 전시를 보는 것도.


그래도 병과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에 아침에 4알, 저녁에 12알의 약을 먹고, 두 달에 한번 주사를 맞는다. 하루에 12시간을 자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학교를 다니고, 자전거를 타고, 컴퓨터를 조립한다. 축구 중계를 보고, 야구 시즌에는 롯데 자이언츠를 응원하고, 테니스는 조코비치 경기를 즐겨본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할머니께 전화하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쌀을 씻어 저녁밥을 하고, 하늘이 간식을 챙긴다. 이 아이에게도 생활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하고 싶은 것이 있다.


창문 너머 어렴풋이_조현병 필터를 끼고 살기

사울 레이터가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 사물을 본 것처럼, 아이는 조현병이라는 필터를 끼고 세상을 살아간다. 이 아이의 세상은 어떨까. 나도 살아보지 못한 세계다. 그냥 엿볼 뿐이다. 해 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다만 포기하지 않고 지치지 않는 것이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다. 언제나 이방인, 그에게도 인생이 있다. 그만의 세계가 있다.


불안이 잦아들었는지 아들이 밝은 목소리로 “엄마, 오늘 나는 좋았어. 내가 불안해서 더 놀지 못했네. 아쉬웠죠? 다음에는 사울 레이터 영화도 보러 가요.”란다. 그래, 그러자. 아들. 또 놀자.



 * 2022년 1월 21일 금요일, 뒤늦은 관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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