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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Jan 05. 2024

나와 '발 없는 새'

바람 속에서 쉬는 새처럼 책 속에서 쉬는 나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이 새는 나는 것 이외는 알지 못해. 날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 대. 딱 한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



장국영이 출연한 영화 <아비정전>에 나오는 대사다. 정찬의 소설 <발 없는 새>에서 만난 문장. 오늘 나는 ‘발 없는 새’가 된 기분이었다. 날다가 지쳐도 바람 속에서나 쉴 수 있는, 죽기 전에는 어디에서도 쉴 수 없는 발 없는 새 말이다. 

 

실업급여 때문이었다. 나는 퇴사를 하고 구직급여, 소위 말하는 실업급여를 받게 되었다. 사전에 인터넷에서 구직신청을 하고, 지역 고용센터에 가서 직접 신청을 한 뒤, 오프라인 교육을 받고, 구직활동 카드를 받아야 한다. 4주 전, 버스를 타고 마포에 있는 서울서부고용센터를 찾아갔었다. 번거로웠지만 돈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견뎠다.

 

막상 고용센터에 방문하고 보니 기분이 묘했다. 나는 일을 하는 오랜 기간 고용보험을 성실하게 납부했다. 때문에, 나의 권리를 당당하게 찾는 것인데도 그들은 계속 의심했다. 자격이 안 되는 것 아니냐, 부정수급자가 아니냐, 계속 확인했다. 그리고 '넌 실업자야, 고용보험을 아무리 많이 냈어도 하루 최저생계비까지만 국가가 책임져 줄게. 그 이상은 안돼. 월 190만 원으로 생활할 수 있지? 답답하면 취업해. 창업을 하든지. 네가 낸 고용보험은 국가가 잘 배분해서 쓸 거야.' 이런 식이었다. 고용센터에 가서 구직신청을 하고 구직활동을 증빙하는 과정은 마치 내 돈을 빌리러 가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그랬다. 

 

오늘은 구직활동을 인증해야 하는 날이다. 4주에 한 번씩 그동안 구직을 위해 활동했다는 증빙을 해야 한다. 그래야 하루 일당 66,000원씩 계산해서 지불한다. 그것도 그 사이에 자문이나 강의 등으로 수입이 생겼다면 제하고 준다. 나는 연구보고회에 참석했기 때문에 자문료 20만 원을 뺀 금액을 받게 되었다. 이럴 거면 자문을 하지 말았어야 했나, 씁쓸했다. 

 

나는 구직급여를 받는 참에 내일 배움 카드로 플로리스트 공부를 하려고 했다. 내가 좋아하는 식물을 만지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한 것이었다. 실업자 대상 교육기관과 프로그램을 알아보고 수강신청을 했으나, 교육은 지원자가 없어 폐강되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인터넷 취업강의를 들었다. 리더십 특강, 리더십 교육은 이제 그만 들어도 되는데 말이다. 여기까지 하느라 오전 내내 매달렸다. 책도 읽지 못하고, 글도 쓰지 못했다. 

 

지난 4주 동안 나는 바빴다. 회사 다닐 때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30분 요가를 하고, 아침 독서와 모닝페이퍼를 썼다. 그리고 오전에는 글을 썼다. 또 세미나를 준비하고, 철학공부를 했다. 그리고 브런치에 일주일에 2~3개씩 글을 공개했다. 사진을 찍고, 고르고, 예전에 쓴 글을 다듬어서 올렸다. 또 가장 중요한 일, 책을 기획했다. 서문을 쓰고, 목차를 만들었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회의도 했다. 바빴다. 이렇게 바빴는데 구직활동이 아니란다. 나는 아직 작가가 아니고, 작가가 직업이 되려면 수입이 있어야 하니까. 나는 아직 직업이 없는 사람, 수입이 없는 사람, 즉 실업자인 것이다. 

 

뭐 아무려면 어떤가? 국가가 나를 실업자라고 호명하면 어떤까? 나는 오늘도 읽고, 쓰고, 걸었다. 내일도 그럴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는 무엇이 되어 있겠지. 또 무엇이 안되면 어떤가? 나로 살면 되지. 

 

마침 오늘 도서관에서 빌려 온 정찬 작가의 「발 없는 새」가 무척 재밌다. 책을 읽다 보면 오늘의 불쾌감을 잊을 것이다. 그나저나 ‘발 없는 새’는 누구일까? 어떤 사연이 있어서 ‘발 없는 새’가 되었을까? 소설 속 등장인물에 드리운 삶의 그림자가 ‘발 없는 새’의 흔적(251쪽)인가?

 

바람이 분다. '발 없는 새'가 쉬어갈 바람이 분다. 책이 내 손에 있다.


2023년 1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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