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멸치맛초코 Oct 23. 2020

나를 잃어내어 나를 찾는다

<어디갔어, 버나뎃 (Where'd You Go, Bernadette)>


 <어디갔어, 버나뎃>은 의외로 불친절하고 몹시 모호하다. 첫 시작과 함께 갑작스럽게 빙하 옆에서 평온하게 카약을 타고 있더니, 어느 순간 버나뎃(케이트 블란쳇)의 일상을 보여준다. 버나뎃은 딸(엠마 넬슨)을 아끼고 집에 있는 것을 평온해 하며, 사람 많은 곳을 극도로 싫어한다. 반사회적인 성향을 보이며 동네 주민들과의 관계를 꺼린다. 밖에 나갈 땐 항상 눈치를 보며 선글라스를 끼고 스카프를 두른다. 불면증이 심하고 극도의 불안장애를 갖고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버나뎃은 ‘만줄라’라는 온라인 비서에게 일거수일투족을 얘기하고 의지하며 집안일을 시킨다.


 어떠한 맥락도 없이 이상하기만 한 버나뎃의 특징들이 링클레이터 특유의 장황한 대사들과 함께 계속 나열된다. 이런 과도한 것만 같은 묘사들이 계속되는 즈음에 이러한 행동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가 등장한다. 지나가던 팬에게서 들은 버나뎃의 다큐멘터리.



 버나뎃은 한때 LA 건축계의 대표적인 건축가였다. 뛰어난 재능을 바탕으로 남성이 독식하던 건축계에서 대표가 되었으며 경이로운 결과물로 최연소 ‘맥아더상’(맥아더 재단이 매년 사회 각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과 잠재력을 보유한 미국 인재들에게 수여 하는 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그 맥아더상을 수상하게 한 집이 한 코미디언으로 인해 단 몇 개월 만에 사라지고 주차장이 되자, 좌절과 함께 의욕을 잃은 버나뎃은 남편(빌리 크루덥)과 시애틀로 사라졌다.


 그러나 시애틀에서 버나뎃의 고통은 오히려 가중된다. 여러 차례의 유산, 딸 비(Bee)의 몇 차례의 수술로 버나뎃은 자신의 모든 신경을 비에게 집중하였고, 그때부터 서서히 남편과 사이가 멀어진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이어지면서 버나뎃은 서서히 망가져 갔고, 의지할 사람 하나도 없는 낯선 곳에서 유일하게 바라보는 것은 딸일 뿐이며, 속 시원하게 말할 상대는 누군지도 모르는 온라인 비서 ‘만줄라’일 뿐이다.



 초반에 이어지는 정신없으면서도 정제되어 있지 못한 내용들은 버나뎃이 한 번, 그리고 자신과 동일시할 정도인 비가 나머지를 한 번 보게 되며 모든 것들이 하나로 꿰인다. LA에서의 절망, 그리고 그로 인한 20년의 경력단절, 유산의 고통이 버나뎃을 끊임없이 잠식하며 불안정한 상태를 지속시켰다.


 그리고 그 꿰인 플롯은 영화 제목처럼 버나뎃이 사라지며 훨씬 명료해진다. 이해심이 부족하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판단하는 남편으로 인해 버나뎃은 도망쳤고, 즉흥적으로 남극으로 떠난다. 아무런 계획 없이 오로지 남극에 가야겠다는 목표를 수행하던 버나뎃은 우연히 만난 남극 연구원에 의해 남극 기지가 재건축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버나뎃을 눌러오던 억압의 감정은 건축 설계라는 창작 활동을 통해 해소된다.


 초반에 링클레이터가 제시하는 버나뎃의 모습은 그냥 이상하면서 타인과 어울리지 못하는 도통 알 수 없는 여성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 또한 사연이 있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이었고 주체적이고 멋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경력이 단절된 그 시간 동안 버나뎃은 가장 무기력하고 의존적이며 능력이 없는 사람처럼 변모하게 된 것이다.


 의미 없는 삶에서 버나뎃은 끝없이 표류했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자기 자신을 진정하게 들여다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모두 다르다. 다름 속에서 우리는 같음은 아니더라도 비슷함을 찾아간다. 그러나 결국 같음은 찾지 못한다. 나는 나로 존재한다. 그런 나는 나만이 진정한 앎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남편은 버나뎃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신과 치료와 정신병원 입원이라는 방식을 사용하려 했다. 그러나 20년 만에 만난 옛 동료 폴(로렌스 피시번)조차도 알고 있는 버나뎃의 진정한 문제점과 해답을 남편은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버나뎃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처럼 어울리지 못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뿐이다. 모든 사람들처럼 같음을 바라던 남편은 결국 버나뎃을 도망치게 했다.



 그러나 버나뎃은 달랐다. 버나뎃은 남편이라는 타인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진정하게도 원하는 것을 주체적으로 발견한다. 결국 “인생을 재미있게 만드는 건 자신뿐”이다. 남들처럼 혹은 남들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행복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역설한다.


 결국 이 영화는 자신을 찾도록 가장 너저분하면서도 가장 설득력 있게 말한다. 마지막에 딸 비의 전화에 음성을 남길 때,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신나고 기대하는 버나뎃을 보며, 삶의 아름다움을 찾고 나 자신을 찾도록 <어디갔어, 버나뎃>은 독려한다. 더는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도록, 어떠한 것도 잃지 않도록. 나 자신으로 언제나 살도록 말이다.   

  

(★★★☆)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의 영원한 전설에 대한 발칙한 상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