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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Sep 06. 2015

조선왕과의 만남

프롤로그


Prologue


역사의 강이 흐른다. 수천 년 세월이 흘러도 늘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며 무섭도록 거센 물줄기가 되고 때론 잔잔한 호수처럼 유유히 흘러간다. 그렇게 흘러가는 역사는 어찌 보면 반복의 연속이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고 삶의 지혜를 찾기도 한다.


 역사는 지나간 과거의 기록만이 아니라 미래로 이어지는 맥락과도 같아 어제를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있다면 남아있는 우리네 삶이 그리 팍팍하진 않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고교시절 내게 역사는 수백 페이지를 반복해 앵무새처럼 외워댔던 진학을 위한 학습일 뿐이었다.


세월이 흘러 반백이 되며 세상살이에 눈을 뜨게 된 요즘 역사에 풍덩 빠져본다. 이제야 비로소 자발적인 관심을 갖고 조금은 깊어진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게 된다.     


2010년 8월 29일은 일제침탈로 대한제국의 국권이 상실됐던 경술국치로 부터 100년이 되는 해였다. 조선왕조는 1392년 7월 16일(음력) 가 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개국하여 27대 순종을 끝으로 518년 만에 멸망하고 백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이 땅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


때마침 2009년 6월 27일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며 2010년 8월 은퇴를 기점으로 조선 왕릉을 둘러보며 잊고 있던 역사의 줄기를 끄집어내어 정리해 보기로 작정했다. 1년여에 걸쳐 계획한 작업이 쉽지 않은 일이라 생각됐지만 노력과 땀의 결실을 얻을 수 있는 보람된 작업이 될 수 있음을 스스로 확신하며 용기를 내어 일을 저질렀다.   

 


조선왕조는 통치이념인 유교의 예법을 충실히 따르며 왕실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장례절차와 왕릉조영 및 관리를 매우 중요시 다루었다. 따라서 능의 입지선정 및 조성된 능의 관리감독과 천장(遷葬) 등 왕릉과 관련된 사항에는 다양한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에 이해관계가 함께 뒤따랐다.


선왕의 장지선정과 장례절차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면 출세가 보장돼 조정대신들이 권력의 발판으로 삼기도 했으며 후왕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하면 삭탈관직에 목숨마저 내놓아야 했다. 왕릉의 조영에는 대부분 공사에 따른 보상이 따랐으나 막중했던 능역공사는 수천 명이 노역에 동원됨으로서 몇 달씩 차출된 백성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의 태종 조(朝)에 태조 이성계가 죽자 첫 국상을 치르게 되었다. 당시는 국가에서 행하는 각종 의식절차에 정해진 규범이 없어 송나라의 제도를 따랐으나 이로 인한 혼란을 겪으면서 세종은 하나의 통일된 규범을 제작토록 하여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 확립되기 시작했다. 


[국조오례의]에 의해 조영된 첫 왕릉은 문종의 현릉이며 이후 오례의는 많은 수정보완을 거쳐 성종 조에  신숙주등에 의해 완성되었다하지만 이후 능제는 계속 바뀌게 되어 오늘날 다양한 왕릉의 형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조선 초기 왕릉공사에는 약 5개월의 기간에 걸쳐 7천여 명이 징발되었다.


Illustrator / Oh Yeon

때문에 왕과 왕비의 장례기간은 5개월의 기간을 국법으로 정하였고 여름철 국상을 대비해 도성 밖 동빙고동과 서빙고동에는 한겨울 한강에서 얼음을 채취하여 보관했던 얼음 저장고가 있었다. 조선 왕릉의 특징은 대부분 왕의 하루 행차거리인 도성 100리 안에 능지를 택했으며 새로운 장지를 찾기보다는 기존 무덤 가운데 명당을 찾아 재활용코자 했다.     


특히 과거급제자를 많이 배출하고 장수한 집안을 최우선 대상으로 하였다. 풍수지리에 의해 능을 조성했지만 후일 흉터라고 상소가 올라오는 경우가 있어 천장한 사례도 많았다. 선왕대로부터 왕실의 불행이 이어진 경우 후왕은 더욱 민감하여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능지를 마련하기보다 조상대대로 출사(出仕)한 고명대신들의 선산에서 명당을 찾으려 했다.


왕릉이 조성되고 나면 능 주변의 8km 둘레로는 능 밖의 불길이 능으로 번지지 못하도록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자라지 못하게 화소(火巢) 구역을 만들고 왕릉 인근마을의 사람들에게는 부역의무를 지어 능수호군의 역할을 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동구릉 탐방(2010.08)

올여름 왕릉 탐방계획을 짜다보니 제일 먼저 동구릉이 떠올랐다. 동구릉(東九陵)은 학창시절 몇 차례 소풍갔던 곳으로, 당시 왕릉에는 관심조차 없었고 단지 넓은 잔디에서 김밥도시락 먹던 기억만 남아있다. 3개월에 걸쳐 둘러본 왕릉은 자연의 정기를 호흡할 수 있는 공원으로 사색과 명상을 갖게 하는 도시사람들의 휴식처였다. 


방문했던 왕릉은 각기마다 고유한 분위기와 표정이 있었다. 주위산세가 다르고 상설의 세부가 조금씩 다르며 크기와 표정도 제각각이다. 문인석은 관복에 홀을 쥐고 있고 무인석은 갑옷에 투구를 쓰고 칼을 잡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키가 다르고 옷매무새도 조금씩 다르다.


동구릉 배치도

굴의 표정도 다양하다. 문무석인을 보면 조선시대 조상들의 얼굴을 볼 수 있으며 그것을 만든 각 시기의 시대상과 문화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지난 5개월간 많은 관련서적을 뒤적이며 원고작성을 강행군하여 이제 조선 제14대 왕인 선조(祖)에서 원고를 접고 2010년 한해를 마감하게 되었다.      


시중에 출판된 책들과 논조를 달리하여 동세대가 재미있게 공감할 수 있도록 조심스레 써내려가며 신묘년 정월부터 제 1대 태조를 시작으로 매주 연재하고자 한다. 어느새 조금은 지쳐가지만 명년 유월까지 남은 원고를 마감하기 위해선 배전의 노력이 필요할 때인 듯싶다. 


풋내기 아마추어 글쟁이로서 부족한 점도 많겠지만 이글을 통해 왕릉에 조금씩 다가가며 그곳에 묻혀있는 사연과 역사의 교훈을 함께 깨닫는 기회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 庚寅年 동짓달 그믐날

                                



【왕릉상설도 해설】  


①곡장(曲墙)  능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동,서,북 삼면을 둘러쌓은 담장

②능침(陵寢)  왕과 비의 무덤으로 능상, 봉분이라고도 함

③병풍석(屛風石)  호석(護石)으로 능침아래를 12방위 면에 십이지신상을 새겨 두른 돌

④난간석(欄干石)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봉분 둘레에 설치해 놓은 돌난간

⑤혼유석(魂遊石)  석상(石床)으로 혼령이 나와 쉴 수 있도록 능 앞에 설치한 직사각형 돌

⑥망주석(望柱石)  봉분 좌우측에 세운 기둥

⑦장명등(長明燈)  고인의 장생발복을 빌기 위한 석물로 밤에 불을 밝히는 등

⑧예감(瘞埳)  제향 후 축문을 태우던 곳

⑨비각(碑閣)  능에 세우는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로써 왕의 일대기가 쓰여 있음

⑩정자각(丁字閣)  제사를 올리는 건물로 丁字모양으로 정자각을 조성함

⑪신계(神階)  정자각에 혼령이 오르내리는  계단

⑫어계(御階)  정자각에 왕과 제관들이 오르내리는  계단

⑬신도(神道)  혼령이 다니는 길

⑭어도(御道)  왕이 다니는 길

⑮수복방(守僕房址)  능을 지키는 수능관이나 수복이 지내던 곳

⑯판위(板位)  왕의 능 행차 시 능을 바라보고 절을 하는 곳

⑰홍살문(紅箭門)  혼령이 출입하는 문

⑱금천교(禁川橋)  궁궐의 금천교를 모방해 석축으로 축조한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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