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주 Sep 07. 2015

조선왕과의 만남(01)

태조릉_01


제1대 태조 1335~1408 (74세) / 재위 1392.07 (58세)~1398.09 (64세) 6년 2개월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건원릉(健元陵) 사적 제 193호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 4-2 (동구릉 내) 


[건원릉]은 고려의 왕릉 중 최고의 조형예술이 집대성된 공민왕노국공주현정릉을 참고하여 조성하면서, 능 주위에 곡장을 두르고 석물의 배치를 달리해 고려의 능보다 더욱 장엄하게 조성하려 했던 태종의 정성이 엿보이는 능이다. 


하지만 능의 언덕을 높이면서 능침도 높게 쌓아 위엄을 보이고 있는 반면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거리가 짧은데다 능원전체 조형이 좁고 답답한 구조로 되어있기에 조선을 건국한 왕시조의 능이라는 기대에는 다소 못 미치는 듯하다.


왕릉의 웅장한 능침(봉분)을 감싸고 있는 병풍석 12면에는 사방(四方)의 재앙으로부터 왕을 보호하기 위한 십이지신상을 새겨져있다. 병풍석 밖으로는 열두 칸의 난간석이 둘러져 있고 곡장(담장)내에는 왕의 혼령을 지키기 위해 영물인 석호와 석양을 네 마리씩 교대로 배치했다. 


健元陵

능침 앞에는 혼유석이 있는데 그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鼓) 모양의 5개 고석이 놓여있다. 능침아래에는 석마가 한필 딸려있는 문무인석 한 쌍이 고적한 혼령을 영접하고 있다. 건원릉은 혁명가 이성계가 잠들어있는 곳이다. 


나라와 도읍을 새롭게 세운 왕시조로 능호가 유일하게 두글자이며 [동구릉]의 아홉개 능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지만, 이곳 능은 그가 스스로 눕고 싶었던 자리가 아니었다. 맑은 가을하늘밑 동구릉은 좋은 휴식공원이었다. 명당 건원릉의 능침위에는 곱다란 잔디를 대신해 함흥의 억새풀이 무성히 자리하고 있었다.


동구릉內 건원릉은 조선 최초 왕릉이 조성되기 시작한 곳이다. 원치 않았던 최고의 명당에 묻혔지만, 죽어서도 부드러운 잔디 이불을 덮지 못하고 있는 이성계의 운명을 떠올려 본다. 철침처럼 숭숭 솟아 능침을 덮고 있는 억새풀 아래 태조가 누워있다. 


건원릉 억새풀

살아생전 함께 묻히길 원했던 그리운 여인 신덕왕후(계비 강씨)마저 멀리 서울 정릉에 누워있기에 그의 노여움과 외로움이 더해 보이는 듯하다. 이성계는 고려의 공민왕 시기부터 급부상한 신흥무장 세력이다. 그는 고려 중앙귀족 출신이 아니라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쌍성총관부 지역에서 힘을 키워가던 변방세력이었다. 


성총관부는 원나라가 1258년 (고려 고종) 고려에 침입하여 철령 이북 땅에 설치한 통치기구였다. 이 지역은 후일 공민왕이 다시 수복하기 전까지 근 100여 년간을 원나라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성계 고조부 이안사는 원래 전주 지역 향리였는데, 가솔을 이끌고 쌍성총관부 지역(지금의 간도와 함경도)으로 이주했다.


이후 그의 가문은 고조부부터 아버지 이자춘 때까지 원나라로 부터 천호라는 지방관을 지냈다. 원나라가 쇠퇴해지며 고려에 귀화하긴 했지만 고려 중앙과는 손이 닿지 않는 변방세력으로 이지역 고려인과 여진족 위에 군림하는 세력가로 성장하였다. 15세기 함경도는 여진족 땅이었다.  



중국의 원,명 교체기에 혼란한 국제정세를 틈타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고자 했던 공민왕은 1356년 원에 빼앗겨버렸던 땅,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려고 하였는데 이 지역을 탈환할 수 있도록 당시 20대였던 이성계는 아버지를 도와 원나라의 세력을 몰아내는데 일조하였다. 


그 공으로 1361년 이자춘은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로 임명되면서 동북면 지방의 실력자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왕권쇠락을 치닫던 고려말, 비록 변방 세력이지만 착실히 군사력을 키운 이성계 가문은 탄탄한 사병 조직과 지역 경제력을 갖고 있었다. 


이자춘의 노력으로 고려조정에 나간 20대 청년 이성계는 뛰어난 무예에 힘입어 곧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었다. 당시 잦았던 외적의 침입으로 약화된 고려 조정에서 이성계는 무장으로서 하늘이 준 기회를 십분 발휘할 수 있었다.



이성계는 1361년 박의의 난을 진압하고 그 해 겨울, 10만 명의 홍건적이 개경을 함락 시켰을 때 고려, 여진족으로 구성된 사병조직을 이끌고 수도 탈환에 참가해 수장(首長)을 활로 쏴 죽이고 개경에 제일 먼저 입성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듬해 원나라 장수 나하추 침입을 격퇴시키고 1364년 덕흥군을 옹립했던 최유가 원군사를 앞세워 침입하자 안주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또한 외종사촌 여진족 삼선(三善), 삼개(三介)의 난을 평정해 동북면의 안정을 되찾음으로서 변방무장 이성계는 반원정책의 물살을 타고 중앙무대서 탄탄한 입지를 확보하며 중요인물로 떠올랐다.


그는 동북쪽 전과(戰果)외에 해안과 내륙으로 침입해 약탈을 일삼던 극악한 왜구를 황산에서 섬멸함으로서 황산대첩의 큰 공을 세웠다. 이후 북쪽과 남쪽을 오르내리며 근 20여 년간을 고려조정을 위해 싸웠다. 그는 싸우는 전투마다 모두 승리함으로서 난세 구국의 영웅으로 이름을 떨쳤고 고려조정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하여 그의 인기와 명성을 좇아 많은 사람이 주변에 모여들게 되었는데 이때 이미 운이 쇠한 고려를 뒤엎고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생각을 품은 신진 사대부들도 있었다. 자신의 능력으로 승승장구했지만 변방지역 출신이란 꼬리표로 그의 성장엔 한계가 있었다. 


막강 권문 세족들이 버티고 있었고 특히 이성계와 함께 외적을 퇴치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권문세족 출신의 최영장군 만큼은 이성계로서는 넘어서기 어려운 존재였었다. 이즈음 국제 정세는 원이 북쪽 몽골지역으로 쫓겨 가고 명이 중국 본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명나라는 고려에게 철령 이북의 땅을 다시 반납하라는 억지를 부리며 이 지역이 명나라 소유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고려 우왕은 명의 억지에 반발하며 명나라 초기의 불안한 정국을 틈타 요동까지 정벌코자 했다. 이때에 이성계는 사불가론(四不可論) 상서를 올려 공격을 반대하였다. 



그것은 여름철 농번기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부적당하고,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쓰기 힘들며, 요동을 공격하는 사이에 남쪽왜구가 침입할 우려가 있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의견은 완강했던 최영우왕에 의해 무시되었다. 결국 우왕 명을 받은 이성계는 우군도통사가 되어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요동정벌 길에 올랐지만,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가기 전 위화도에서 큰 비를 만나 더는 앞으로 나갈 수없는 위기에 봉착했다. 


병사들의 무모한 익사가 예견되는 기로에서 그는 조민수를 설득하여 회군을 선택해 요동정벌에 참여한 대군을 끌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때 수많은 전장에서 생사를 함께했던 사병(私兵)의 역할도 컸을 것이다. 결국 태산 같았던 최영이 제거되며 이성계는 드디어 권력의 정점에 서서 우왕을 내쫒고 고려정계의 일인자가 되었다.


위화도 회군

안팎으로 혼란스럽던 고려말 정국은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정계내부에서부터 시작된 개혁바람은 고려 왕조를 유지하면서 개혁을 추진하려는 온건파와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급진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역성혁명 중심이었던 신흥무장 세력 이성계는 급진파 정도전과 결탁하여, 혁명을 부정하며 고려에 대한 충성을 주장하던 정몽주를 마지막으로 제거함으로서 새로운 왕조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신진사대부들과 함께 고려를 무너뜨린 이성계는 이 시기 조준의 건의에 따라 전제개혁을 단행하였다. 


구세력의 경제력을 박탈하고 신진 사대부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함으로서 새로운 나라를 향한 신진 지배계층의 입지를 확고히 하였다. 정몽주 제거 후 4개월 뒤 정도전 등의 추대를 받아 1392년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그는 개경에서 공양왕에게 선위를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라 개국하였고,  이듬해에 [朝鮮]이란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조선왕과의 만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