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주 Sep 07. 2015

조선왕과의 만남(02)

태조릉_02


제1대 태조 1335~1408 (74세) / 재위 1392.07 (58세)~1398.09 (64세) 6년 2개월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건원릉(健元陵) 사적 제 193호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 4-2 (동구릉 내)


태조는 조선 역대 왕 중 가장 늦은 58세 나이에 즉위하였다. 그 당시의 수명으로 보면 뒷방 늙은이가 되기에도 늦은 나이였다. 요즘 세상에서도 정년퇴직감이 아니던가. 그는 용맹과 추진력으로 뭉쳐진 인물이었다. 하지만 지혜와 성찰이 보충되지 않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한 여름 밤의 꿈으로 끝났을 것이다. 


이때 이성계를 사나운 장수에서 군왕으로 이끈 선지인(先知人)이 바로 무학대사였다. 고려 왕조의 무능과 부패를 보며 탄식하던 무학대사이성계의 충실한 스승이었다. 태조는 즉위 후 천도(遷都)를 위해 무학과 여러 번 한양을 답사했었다. 


어느 날 왕십리를 궁궐터로 잡으려고 둘러보던 중 소를 타고 가던 노인이 소를 치며, "이놈아, 무학만치나 미련한 소야!"라는 소리를 듣고는 다가가 절을 하고 길지를 물으니, "여기서 십리를 더 들어가시오"함에 그곳의 지명이 왕십리(往十里)가 되었다 한다. 하여 그곳서 십리를 더들어간 곳이 지금의 경복궁(景福宮)이다. 



1394년 무학대사의 도움을 받아 한양에 도읍을 정하여 수도를 이전하고, 주야로 궁궐공사를 진행해 이듬해 9월 경복궁의 낙성을 보게 되었다. 이는 조선이 개경을 벗어남으로서, 고려 기득권층을 배제하고 신진 지배계층을 형성하려는 의도였다. 


그는 유학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관제를 마련하고 드센 개국공신을 견제하며 각지의 인재들을 아울러 왕권을 견고히 하고자했다. 또한 경제육전을 편집하게 하여 법치주의에 입각한 국가체제정비도 추구하였다. 경제육전은 후대 조선 500년간 기본법전이 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성계는 조선을 세우며 숭유억불농본주의사대주의를 3대 기본정책으로 삼았다.



이는 건국 이념적 사상이었다. 고려시대 불교의 폐단을 없애면서 성리학을 신봉하고, 송나라에서 시작된 성리학 사상의 경제적 바탕이던 농업을 국가산업으로 하며, 분수를 알아 큰 나라를 모시고 주변과 교린하는 성리학적 사대주의가 조선을 이루는 중심사상이 되어 조선 500년의 정체성을 이루는 근간이 되었다. 


맹자(孟子) 글 중 이소사대(以小事大: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섬김)를 대외정책으로 택함으로써, 당시 조선은 국내안정과 국제정세에서의 실리를 추구하고자 한 것으로 판단해 본다. 새로운 나라 조선을 건국했던 이성계에게도 국가수성은 창업보다 어려웠다. 한때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 잡았다는 천하의 맹장인 그도 짧은 재위(6년 2개월)로 권력의 맛을 마음껏 누리지는 못했다. 


정도전(鄭道傳)

왕위에 스스로 오르는 영웅적 삶을 살았던 태조였지만 말년에는 자식들이 벌이는 골육상잔(骨肉相殘)의 권력다툼 앞에서 왕위를 물려주며 환란의 세월을 겪었다. 그가 나라를 개창(開創)할 때에 신진 사대부의 힘도 컸지만 첫째 부인 한씨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과 두 번째 부인 강씨도 큰 공을 세웠다.


개국공신에게 논공행상이 있듯이 집안의 논공행상은 다음 왕위를 잇는 세자자리였다. 하지만 왕권과 신권의 조화로운 정치를 추구하던 성리학의 신봉자 정도전에게는 강한 성격의 이방원이 다음 왕위를 잇는 것이 부담이었고, 강씨도 자신에 내조의 공을 전실 자식인 이방원이 가져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健元陵

비극의 시작은 세자 책봉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개국(1392년) 한 달 뒤 계비 강씨 소생 막내아들 방석이 11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이방원은 그토록 미워하던 계모 강비가 죽고 태조도 병환 중이던 1398년 8월 25일, 왕자의 난(1차)을 일으켜 자신의 사병을 데리고 정도전을 급습해 죽이고 이복동생 방석과 방번을 모두 살해했다. 


그의 생부 이성계가 번연히 살아있는 와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예순네 살의 노인 태조는 식음을 전폐했다. 패배를 모르고 휘달렸던 30년 장수의 삶, 그가 누렸었던 권력 앞에 인면수심(人面獸心)으로 행동하는 자식들의 권력다툼을 보며 그는 인생무상의 비애를 느꼈을 것이다.


태조1, 2차 왕자 난을 거치며 상왕과 태상왕(太上王)이란 이름을 달고 시름의 날을 보냈다. 이빨 빠진 늙은 호랑이는 마른 눈물을 삼킬 뿐이었다. 그 후 그는 분노와 증오, 울화병을 한 아름 안고 고향 함흥으로 돌아가 무상(無常)의 세월을 엮었다. 


illustrator / 정윤정

왕위를 차지한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로부터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태상왕 도성으로 모셔오려고 함흥으로 여러 번 사신을 보냈으나 이성계 사신들을 죽이거나 잡아 가두어 돌려보내지 않으면서 함흥차사(咸興差使)로 모한 주검이 계속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이방원은 무학에게 간곡히 청하여 함흥에 머물던 태상왕을 설득토록 했다. 이성계는 오랜 친구인 무학대사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통곡하였다. 결국 1402년 한양으로 돌아와 불도 정진의 나날을 보내다 창덕궁 별궁서 74세로 이승을 하직하여 단릉(單陵)인 건원릉에 홀로 누워있다.



태조는 생전에 선왕들(이성계의 4대조)의 능지를 정하고자 조선팔도에 왕지(王址)를 찾도록 명하였는데 한 풍수가가 입궐하여 아뢰기를, 구리 구룡산 옆 검암산 동편 능선에 명당이 넓게 자리한다 진언하였다. 이에 무학대사와 동행해 검암산(劍岩山) 아래에서 정상을 살펴보니, 실로 천하의 명당임에 매우 흡족해 했다. 


환궁 길에 선왕보다는 자신의 묘로 하는 것이 좋다는 무학대사 말을 듣고 고갯마루에서 자신이 보았던 능지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흠잡을 곳이 없어 감탄하며 "내 이제 모든 근심이 사라졌도다. 이제 한시름을 놓았다"라 하여 승정기록원이 망우(忘憂)라 하고 이곳을 망우고개라 기록했다. 


또한 그곳을 관리하는 마을을 조성하라는 엄명으로 동창(東窓)마을(해 뜨는 양지바른 마을)이라 명명하고 관료를 보내 관리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강비가 먼저 이승을 고하자, 태조는 그녀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연민으로 궁궐 가까이에 정릉(貞陵: 현 영국 대사관 자리)을 조성하고 자신도 사후 그곳에 묻히고자 했다. 


망우(忘憂)고개

그런데 생전에 부자간 반목과 계모와 큰 갈등을 겪었던 이방원은  태조가 죽자마자  정릉을 현재 성북구 정릉동으로 이장해 버리고 봉분을 깎아버렸다. 또한 원래 정릉에 있던 강비능병풍석 석물일부를 광통교(청계천)를 보수하는데 사용하였고, 더욱이 능을 묘로 강등한 후 강비를 후궁으로 격하시키기까지 하였다.


말년 태조는 인생의 허망함을 느끼며 차라리 고향인 함흥에 묻어 달라 유언했었지만 태종은 조선개국 시조를 먼 곳에 묻을 수 없다는 이유로 부왕에 고향 함흥의 흙과 억새풀을 뽑아와 봉분을 덮고 유언을 대신하였다. 이곳의 억새는 자주 깎으면 풀이 죽기 때문에 1년에 단 한번 한식(寒食) 날에만 깎아준다고 한다. 


태종이 검안산(劍岩山) 산릉지에 최고의 명당을 조성해 불효를 면하려했던 건원릉에는 숫한 사연을 보듬은 태상왕이 고즈넉이 잠들어 있다.


"전하께서 창건(創建)하신 나라, 그토록 미워했던 자식으로 인하여 세종과 같은 세기(世紀)의 성군을 배출하옵고 후손들은 518년간의 국가안위를 지탱해가며 장수를 이뤘나이다. 하오니 이제 노여움을 푸시고 부디 편히 잠드시옵소서..."        



매거진의 이전글 조선왕과의 만남(0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