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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Sep 09. 2015

조선왕과의 만남(03)

태조비릉


1대 태조원비 신의왕후 1337~1391 (55세)

 

▐  제릉(齊陵) 사적은 미지정(북한소재)  / 경기도 개성시 판문군 상도리


신의왕후 한씨이성계의 첫째 부인이자 정비(正妃)이다. 고려 동북지방의 쇠락해가는 호족가문 출신이다. 열다섯 살이던 해에 신분이 비슷한 열일곱 살의 이성계와 가례를 올렸다. 이성계는 오랜 세월 전장을 누비던 터라 집안에서의 가장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었겠지만 한씨는 묵묵한 내조를 통해 부군이 고려정계 1인자로 부상하는데 보이지 않는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남편이 개경에서 강씨를 경처로 맞이한 후에 그녀는 무늬만 정실인 건넛방의 붙박이장에 불과했을 것이다. 향처(鄕妻)의 설움을 이겨내야 했었던 한씨는 소생으로 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 6남과 경신, 경선 2녀가 있었다.



이성계가 시골구석에서 논밭 갈며 자식들 키우던 늙은 아내보다는 스물한 살 연하 강씨에게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음은 인지상정일 게다. 이성계에게 젊은 강씨는 자식뻘인 예쁜 소실일 뿐만 아니라, 당시 권문세족이었던 처가 또한 매력적 이었으리라. 향처 입장에서 보면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긴 셈이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5월 회군할 때 이방원이 포천 재벽동에 살던 친모 한씨와 철현에 살던 계모 강씨를 동북면으로 피난시키던 도중, 조정의 체포령 전갈을 듣고 숲속으로 피신하며 노숙했던 한씨는 위장병이 악화되어 조선개국(1392년) 한해 전 55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개국 후 태조2년 절비(節妃)로 추존되고 능호를 제능이라 칭했다. 정종 즉위년에는 [신의태왕후]로 추존하여 종묘에 신주(主)를 부묘하였다.




1대 태조비 신덕왕후  1356 ~ 1396 (41세)


  정릉(貞陵) 사적 제 208호 / 서울 성북구 정릉동 산 87-16


초가을 햇살이 중천에 머무는 오후 찾아간 정릉은 비탈길 양옆으로 주택이 빼곡히 들어서있는 깊숙한 골목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조선의 초대 왕비능이라 하기에는 언덕주변에 산재한 주택들로 인해 들어서는 입구가 너무 초라하다.


9만여 평의 [정릉 능원]은 대부분 울창한 숲을 이룬 산으로 산책길이 이어져 있고 실제 능역은 너무 조촐하다 못해 옹색해 보인다. 신덕왕후가 홀로 잠들어 있는 정릉태종 조에 현 위치로 천장되면서 왕릉제인 [병풍석]과 [난간석]은 사라지고 [장명등]과 [혼유석]만이 이곳으로 옮겨져 현재 남아있다.



따라서 정릉의 [장명등]은 고려 공민왕릉 양식을 따른 조선왕릉 조형물 중 가장 오래된 석물로 역사적 가치를 간직하고 있다. 신덕왕후 강씨는 버들잎 한 줌에 운명이 뒤바뀐 일화로 알려진 여인이다. 이성계가 젊은 시절 부하들을 거느리고 호랑이 사냥을 나갔다가 목이 말라 우물가를 찾았다.


말에서 내린 장수가 때마침 물 긷던 낭자에게 마실 물을 요구하자, 여인은 한 줌의 버들잎을 바가지에 띠워 올렸다. 이에 이성계가 연유를 물음에, "급히 물을 들면 목이 막힐 수 있으니 버들잎을 불어가며 천천히 드실 것을 권하였나이다." 찰나, 이성계의 검은 눈망울에 비쳐진 여인의 지혜와 미모가 그윽하게 스며들어왔을 게다.



이런 인연으로 그녀는 이성계의 경처(京妻)가 되고 개국과 동시에 초대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조선의 퍼스트레이디가 이후 브레이크 없는 과욕의 페달을 밟으며 질주하다가, 갑작스런 병사로 이승을 하직해 묻힌 능이 한(恨)많은 정릉(貞陵)이었다.


신덕왕후 강씨는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다 피지도 못한 10대의 아들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이성계이방원의 갈등을 250여 년 동안 감내하며 이리저리 찢기고 짓밟혔던 불행한 여인이다. 사후에도 부군과 나란히 눕지 못하고 외따로 떨어져있는 그녀의 쓸쓸한 무덤이 더욱더 처연해 보인다.


신덕왕후 貞陵

조선조에서 외따로 떨어져 홀로 있는 외로운 고혼(魂)들의 무덤은 정릉(태조계비), 장릉(단종), 사릉(단종비) 3기뿐이다. 강씨는 판삼사사 강윤성의 여식으로 고려 말 권문세족이었던 그녀의 친정은 이성계의 권력형성과 조선개국에 큰 힘이 되었다.


지방출신의 한계로 개성 권문세족 배경이 필요했던 이성계와 세력신장을 도모했던 강씨 문중 간에 정략적 혼인을 한 것이었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 강씨는 현비로 책봉 되었다. 조선최초의 공식 왕비였다. 태조의 총애를 한껏 받으며 아들 방번, 방석경순공주를 낳았다.


강씨는 자신 집안배경을 바탕으로 한 정치적 역량과 지략이 뛰어난 여인이었다. 그녀는 1392년 3월 이성계해주에서 말을 타다가 떨어져 크게 다친 것을 계기로 정몽주가 그를 제거하려 했을 때, 생모인 한씨의 묘에서 초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던 이방원을 급히 해주로 보내 이성계가 화를 면해하게 하였다.    


Illustrator / 이철원

또한 방원이 그해 4월 자객을 보내 정몽주를 죽였을 때도 그를 함부로 죽였다며 크게 꾸짖던 이성계의 분노를 무마시킨 것도 강씨였다. 정치적 수완과 결단력을 갖춘 그녀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남편의 목표를 위해 즉흥적 수단을 동원하는 대담성을 발휘하기도 했다.


강씨정도전, 남은 등 쟁쟁한 개국공신들과 합세해 조선 개국 한 달 뒤인 1392년 8월 차남 방석을 세자로 삼는데 성공했다. 태조의 이러한 처사에  분통해하던 혈기왕성한 26세 청년 이방원은 절치 부심하며 와신상담(臥薪嘗膽)하고 있었다.


조선을 건국할 당시 태조는 58세의 고령으로 영구적인 조선의 안녕(安寧)을 위해 세자 책봉이 시급했다. 적장자인 방우가 세자에 오르는 것이 당연지사였지만, 방우는 자신이 고려 관리로서 아비의 역성혁명을 반대하고 있었기에 태조정도전배극렴, 조준 등의 의견을 물었다.



배극렴조준이방원을 염두에 두고 공이 있는 자를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한 반면, 정도전강씨를 지지하고 나섰다. 정도전은 성리학을 기초로 사대부가 중심이 된 신권(臣權)과 왕권이 조화를 이루는 나라를 꿈꾸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일등공신이다.


그는 이방원이 후계자가 되면 자신의 이상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해 11세의 방석을 세자에 앉혔다. 이는 자신의 피붙이를 왕으로 세우려던 어미와 조정의 주도권을 쥐려 했던 정도전의 욕심이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하지만 강씨방석방원처럼 뛰어나지 못한 것에 늘 불만을 갖고 있었다.


방석이 15살이던 어느 날, 어미의 불만을 떨쳐내고 자신이 더 이상 어리지 않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백주(白晝)에 대궐로 기생들을 불러 모았다. 이를 전해 들은 이방원태조를 찾아가 북을 쳐대며 한바탕 큰 소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태조신덕왕후를 불러 크게 화를 냈고, 강씨는 방원의 행동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그 화병으로 머리를 싸매고 드러눕게 되었다. 세자 책봉 후 네 해가 지나 강씨는 방원의 소란으로 인한 화병으로 친아들의 등극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때에 태조는 군왕의 위엄마저 망각하고 통곡했으며, 상복을 입은 채 안암동과 행주로 직접 능 자리를 보러 다니기도 했다. 왕후가 위독할 때에는 내전에 승려 50명을 모아 불공을 드리도록 하였고 심지어는 "백관이 반열을 정돈했는데 조회를 보지 않고 흥천사로 거동했다."라고 태조실록이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태조가 무척이나 사랑했던 왕비였음이 느껴진다.


태조는 시호를 신덕왕후로 정해 궁에서 가까운 도성 안에 정릉을 조성했다. 이토록 태조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으니 아비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방원신덕왕후를 좋아할 리 없었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으로 실권을 장악한 방원의 보복은 무자비했다.


청계천 광통교

이방원은 즉위하자마자 정릉 파괴를 시작했다. 태종은 정릉 능역 100보 근처까지 주택지로 정해, 세도가들이 정릉 숲의 나무를 베어 저택을 짓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때 태종의 뜻을 간파한 영의정 하륜이 앞장서 사위를 거느리고 정릉을 선점해 광대한 능역 내 소나무 숲을 베어내 사가(私家)를 지었다.


뒷방 늙은 호랑이는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덕수궁 옆 정릉이 있던 자리는 [영국대사관]이 들어서 있는데, 현재 지명만 정동(貞洞)으로 남아 옛 정릉(貞陵)이 있던 곳임을 짐작케 한다. 1408년(태종8) 태조가 죽자 정릉의 운명도 곤두박질 쳤다.


도성 안에 능을 조성하는 것의 부당함을 앞세워 도성 밖으로 이장토록 지시하고 강씨가 원비가 아닌 계비임을 들어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정릉을 옛 양주 사한리(현 서울 성북구 정릉동)로 옮기고 능을 묘로 격하시키고, 이장 시 원래 정릉병풍석을 허물어 궁궐공터에 야적하였다.


광통교 축대로 사용된 병풍석물

이듬해 청계천의 광통교(廣通橋)가 홍수에 유실되자 문양이 새겨진 병풍석물을 가져다 일부는 거꾸로 세워 돌다리를 짓는데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정월 대보름날에는 한양 백성으로 하여금 다리에서 지신(地神)밟기 놀이를 하도록 하여 계비 강씨를 철저히 능멸하였다.


태종의 명에 의해 현재의 자리로 천장해 온 정릉은,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參道)가 "ㄱ" 자로 꺾여있어 일반적으로 일직선을 이루고 있는 조선왕릉의 [참도]와 차이를 보인다. 아마도 능의 기가 생동하지 못하도록 하였을 게다.


또한 정릉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으며 능을 지키는 무인석도 없다. 고려양식을 계승한 장명등과 상석을 받치는 고석 등의 석물만 옛 능에서 옮겨온 것이고 나머지 대부분 석물은 현종 때 새로 조성된 것으로 옛 정릉의 수난과 현 정릉의 복원에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ㄱ" 자로 꺾인 참도

조선왕조 태종실록 16년(1416) 음력 8월 21일 기사(記史)를 보면, 태종이 명재상(名宰相) 유정현에게 묻기를 "계모란 무슨 뜻인가?"하니,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들어와 어머니가 된 사람이 계모입니다."라고 답하였다.


이에 "그렇다면 강씨가 내게 계모인가?" 라 되물으니 "그 당시 생모께서 돌아가시지 않으셨으니 어찌 계모라 하겠습니까?" 함에, 태종은 "강씨는 내개 조금도 은의(恩義)가 없다. 나는 어머니 집에서 자랐고 장가를 들어서는 따로 살았으니 어찌 은의가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 해는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 되던 해였건만, 태종이 그토록 신덕왕후를 미워했던 걸 보면 그녀는 태종 당대 최대 정적(政敵)이었던 것 같다. 태종의 핏줄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어진 성군 세종마저도 강씨에 대한 박해는 계속 이어졌다.



세종 즉위년, 나라에서 지내던 정릉의 제사마저 폐하고 족친들로 대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으며, 세종 8년에는 신덕왕후 영정을 불살라 버리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었다. 세종 역시 직계존속에서 벗어난 신덕왕후를 정비(正妃)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오랜 세월 정릉은  대역 죄인에 버금가는 무덤으로 변해 있었다. 그로부터 172년 후인 1580년(선조 12)에 이르러 사림정치가 본격화 되면서 신덕왕후 복위에 대한 상소가 있었다. 조선 시조(始祖) 왕비의 부묘를 폐하고 능을 옮긴 것이 하늘의 뜻에 어긋난다는 주장이었다.


정릉(貞陵)

선조는 "오늘의 신하는 오직 현세의 일만 논하라" 하여 신위 복위는 유야무야 되었으나, 제사는 조정에서 맡아 지내도록 명하였다. 1669년 11월 1일, 그날은 떨어진 낙엽을 적시는 겨울비가 주룩 주룩 내리고 있었다. 조선 18대 현종송시열의 상소를 받아들여 260여년 만에 비로소 정지각을 세우고 종묘에 신덕왕후 신위를 태묘로 배향함으로써 태조비의 명예회복과 복권이 이루어졌다.


이날에 내린 비를 원한을 씻는 비라하여 "세원지우(洗寃之雨)"라 하며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태조의 등극 전 죽은 첫째 부인 한씨는 그의 둘째 아들인 정종 가까이라도 묻혀 있거늘, 한씨가 누리지 못한 부귀영화를 대신해 누렸던 둘째 부인 강씨는 홀로이 누워있다. 그녀의 외로운 혼령을 마주하며 속세의 권력에 무상함을 새삼 떠올려 본다.


"왕후마마, 속절없는 필부들이 권불십년이라 비아냥대고 있지만, 궁 밖 살림살이가 궁핍한 無告之民들의 넋두리이오니, 부디 미사(微事)에 개념치 마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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