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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Sep 09. 2015

조선왕과의 만남(04)

정종릉


2대 정종 1357~1419 (63세) / 재위 1398.09 (42세)~1400.11 (44세) 2년 2개월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후릉(厚陵사적 미지정(북한소재) / 경기도 개성시 판문군 상도리


정종은 태조(太祖)와 원비 한씨의 둘째 아들 방과이다. 1398년 제1차 왕자방원의 양보로 세자에 책봉되어 태조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오른 모양새를 갖추었지만, 반란을 주도한 방원이 왕위찬탈에 대한 명분을 쌓고 왕권을 접수하기까지 그는 어부지리로 왕위에 잠시 머물러있었다. 


1399년 3월에는 한양의 운기가 나빠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는 이유를 들어 개경으로 다시 천도했다. 1400년 2월, 제2차 왕자의 난이 수습된 뒤 동생 방원을 세제(世弟)로 책봉하고, 9개월 뒤에 왕세제에게 왕위를 물려주며 상왕(上王)으로 물러났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은 당시 조정 권력의 중심이 이방원에 있었음을 가히 짐작케 한다. 당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던 권좌에 머물던 정종을 보면 마치 현대사에 잠시 등장했던 최규하 대통령을 떠 올리게 된다. 580년 전 상황과 한 치에 다름이 없었을 게다. 세월이 흘러도 대통령 권한대행이란 꼬리표는 소멸되지 않는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특징 없는 권력자를 뽑으라면 이 두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게다. 정종이란 묘호(廟號)가 어쩐지 어색하다. 묘호를 얻는데 만도 262년이 걸렸다. 그가 죽은 후 명나라에서 공정(恭靖)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나, 정작 조선에서는 그에게 묘호를 올리지 않다가 1681년(숙종 7)에 시호와 정종(宗)이란 묘호를 올렸다.


정종도 사실상 이성계 가문의 무장이었다. 젊어서부터 무략이 뛰어나 1377년(우왕 3) 이성계를 수행해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하였다. 1388년 순군부만호로 비리에 연루된 염흥방의 죄상을 심문하고, 이듬해 해주에 침입한 왜적을 방어했다. 


그는 1390년(창왕 2)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공로로 밀직부사에 오르고 그해 6월 양광도(楊廣道)에 침입한 왜적을 영주(寧州: 천안) 도고산 밑에서 격파하고 삼사우사(三司右使)를 역임한 인물이다. 조선이 건국되며 영안군에 봉해지고 친군위 절제사와 삼군부 중군절제사에 임명되어 군권을 장악하기도 했다. 



정종은 왕위에 잠시 머무는 동안 야심과 음모를 부추기는 측근을 곁에 두지 않았다. 즉위원년 집현전을 설치해 경적(經籍)의 강론을 담당케 하고 같은 해 8월 분경금지법을 제정해 관인들이 세력가에 청탁하는 것을 방지했으며, 왕족과 권신들의 사병을 폐지해 삼군부에 편입시켰다. 


하륜의 건의에 따라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던 도평의사사를 의정부(議政府)로, 중추원을 삼군부로 개칭하는 등 관제를 개혁하고, 한양5부에 각각 학당을 설립하였으며 저폐를 발행하여 유통경제의 진흥을 꾀했다. 1400년 6월 노비 변정도감(辨正都監)을 설치하여 고려 말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양인으로 환원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통치의 대부분은 이방원의 뜻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정종은 재위기간 동안에 정무보다는 격구 등 유희에 심취하였으며, 그의 이런 행동은 이방원을 안심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즉위한지 2년여 만에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며 짧은 권한대행을 마치고 상왕으로 추대되었는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조치였었다. 


illustrator / 양동석

그는 1명의 정비와 9명의 후궁을 두었고 그들에게서 서자(庶子) 17명, 서녀 8명을 얻었다. 하지만 정작 정비(妃) 정안왕후와의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다. 그들 부부가 천수를 누릴 수 있던 또 다른 이유였다. 그의 서자 17명 중 왕자가 되지못했던 "지운"과 "불노"의 불운한 야사(野史)를 옮겨본다. 


지운(志云)정종이 시녀였던 기매와 관계해 낳은 아들이다. 기매의 천한 신분 탓에 후궁으로 받아들이지 않자, 그녀는 야속한 맘에 환관 정사징과 간통하는 일(1417년)을 벌였다. 정사징은 회안대군(방간)의 첩과도 간통함에 궐내서는 그가 혹은 고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었다. 


살벌했을 조선 초기상황에서 정상인이 고자행세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으로 짐작해보면 기매의 간통은 알몸으로 행한 애무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되어진다. 이러한 행각이 정종에게 발각되자 정사징은 궐 밖으로 도주하다 잡혀 참수되고, 기매는 상왕 자식을 낳았다하여 목숨을 부지하였다.



세종 조에 승려 지운이란 자가 정종의 아들을 칭하며 다닌다는 보고가 올라와 관원을 풀어 포박하여 확인해 봄에 어려서 병이 있어 절에 맡겨졌던 기매 아들임이 밝혀졌다. 이를 측은히 여긴 세종이 그를 살려 환속시키려 했으나 그의 존재가 왕실을 부끄럽게 만들 수 있다는 중신들의 간언에 따라 사형에 처해졌다. 


불노(佛奴)정종의 후궁 가의궁주 유씨에 소생이다. 원래 유씨는 고려 권문집안 후실이었으나 남편사별 후, 아들이 없던 방과에게 시집와 불노를 낳았고, 방과가 왕위에 오르자 후궁이 되었다. 한때 불노는 궁궐서 원자로 불리었으나 이방원을 의식한 정종이 아들인 불노의 목숨을 보전코자, 자신의 자식이 아님을 주장하며 궁 밖 유씨의 사가로 내쫒았다. 


하지만 태종 조에 불노는 자신이 상왕의 아들이라며 떠벌리고 다니다 태종 이방원의 노여움을 사게 됨에 공주에 유배되었으며, 후에 승려로 살다 죽었다. 정종이 재위 시에도 얼마나 이방원을 경계했는지 확인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제3대 임금으로 즉위한 방원은 권력을 얻은 자의 아량으로 정종을 상왕으로 극진히 예우했다. 태종실록 12(1412)년 記史에는 "임금이 경복궁 누각과 못을 두루 돌며 살펴보고, 본궁 연못 수각(水閣)에 거동해 상왕을 맞이하며, 타구(打毬)하는 것을 구경하고 잔치를 베풀어 극진히 즐겼다. 


사람을 시켜 못에서 고기를 잡게 하고, 창기(唱妓)에게 명하여 어부가(漁父詞)를 부르게 하였다. 상기(上妓)와 악공(樂工)에게 저화(楮貨) 1백여 장을 주었다."라고 기록돼 있듯이 태종인덕궁(현재의 경희궁)에 자주 들러 상왕을 위로하며 담소를 즐겼고, 상왕을 위해 자주 본궁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태종실록 17(1417)년 기사를 보면 "본궁은 상왕전에서 가까운 까닭에 일찍이 하나의 연못을 파 상왕을 봉영(奉迎)하여 이를 관람하게 하려 하였으나, 만약 그대로 두면 뒷날 의당 유람의 장소가 될 것이다. 내 이제 못을 메우려 하는데 1천인의 1일 역사(役事)일 것이니, 군사 1천명을 박자청에게 줌이 옳겠다."라고 명하여 본궁의 연못을 메우게 하였다고 한다. 



최근 문화연구소의 학술행사 발표 자료에 의하면 태종이 영견방 본궁을 수리하면서 대략 51m x 45m에 달하는 연못을 팠는데 이 때문에 사헌부, 사간원에서는 상소가 올라왔다 한다. 이러한 연유로 태종이 본궁에 조성하여 정종이 유희를 즐겼던 그 연못은 수각(水閣)과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 


그는 19년간을 상왕으로 [인덕궁]에 머물며 사냥과 격구, 온천여행과 연회 등으로 세월을 엮다, 63세 일기로 승하하였다. 정종이 많은 부인과 자녀들을 둔 것이 타고난 호색함 때문인지, 살아남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당초에 권력자로 분류되지 않던 인물이었기에, 그는 역시 당대의 호색한(好色漢)으로 여겨진다. 


[후릉]을 개성에 쓴 것은 재위 시 이곳으로 천도(遷都)했던 것과 관련이 있는 듯한데, 정종은 휴전선 너머 개성에 홀로남아 외로운 이산(離散)의 고통과 분단의 아픔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전하, 가야할 때가 언제인지를 깨달음에, 어심(御心)을 비워 여색과 음주가무에 여생을 바친 저하의 의충(意衷)에 경이를 표하나이다. 어절씨구~ 지화자!"  




2대 정종비 정안왕후 1355 ~ 1412 (58세)


정종보다 7년 먼저 죽은 정안왕후 김씨는 성정이 인자하고 사려 깊은 성품의 여인 이었다. 고려 때 문하좌시중 김천서의 여식이며 덕행으로 아랫사람을 다스리고 우애로 친족과 친교 하였다. 김씨는 정종의 즉위 때부터 조심스럽게 반대하며, 방원에게 선위(禪位)할 것을 건의했다. 


조선 역사상 최고령인 44세로 왕비에 책봉된 정안왕후는 왕위에 있던 2년 동안 수성을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라 하야(下野)할 궁리만 했다. 덕분에 그녀 역시 태종과의 권력다툼을 피해 천수(天壽)를 누릴 수 있었다. 능은 정종과 함께 쌍릉을 이루고 있다.


정안왕후는 1373년 19세의 나이로 2살 연하의 정종과 혼인해 40년 가까이 해로하였다. 하지만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했다. 정종이 9명 후궁과의 사이에서 17남 8녀를 둔 상황을 고려하면, 그녀는 인고(忍苦)의 세월을 담담하게 지냈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定安王后 (illustrator / 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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