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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Sep 14. 2015

조선왕과의 만남(05)

태종릉_01


3대 태종 1367~1422 (56세) / 재위 1400.11 (34세)~1418.08 (52세) 17년 10개월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헌릉(獻陵) 사적 제 194호 / 서울 서초구 내곡동 산13-1 (헌인릉 내)


고려멸망 후 건국된 조선이 518년의 장수를 누릴 수 있었던 저변에는 태종이란 걸쭉한 인물이 있었다. 분명, 그가 있어 오백년 조선조의 국가운영 밑그림이 완성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조선 초기 강력한 왕권통치를 통해 천세(千歲)의 왕조를 소망했던 태종이 잠들어 있는 곳이 헌릉이다.


당시 최고의 명당을 찾아 택일한 태종의 능지는 야트막한 대모산 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헌릉은 남한의 왕릉 중 유일하게 문인석과 무인석 그리고 석양, 석호, 석마가 각 2쌍씩 설치된 능이다. 특히 능 뒤편에는 석호 네 마리가 버티고 있는데 이는 당시 태종의 무소불위(無所不爲) 권력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태종 헌릉(獻陵)

하지만 수맥을 따지는 풍수지(風水地)로 풀어본다면 헌릉이 능지로서 부적합하다 하니, 살아생전 그의 엄청났던 과보(果報) 탓에 공적은 잊혀지고 업보는 능과 함께 남아있는 듯하다. 헌릉이 있는 대모산은 물이 많은 산이다.


원래 대고산(大姑山), 할미산으로 불리었으나 태종의 사후 어머니로 바꿔 대모산(大母山)으로 불리게 되었다. 태종 재위당시 명당을 찾아, 1415년 지관 추천으로 이곳을 수릉지로 택한 후 원경왕후가 승하하자 이곳에 안장하고 자신도 수릉에 영장되었다.



능 정자각을 조금 벗어나니 작은 늪지대가 있고 능의 곡장 안까지 배수로를 파놓았다. 이러한 까닭에 후일 태종 곁에 있던 세종여주로, 문종의 수릉은 [동구릉]으로 천장하였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대모산에는 20여개 약수터가 산재해 있어 현세를 사는 주변 민초들은 청수(淸水) 음용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이방원태조의 5남으로 용맹과 지략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역대로 무장 가문이었던 이성계 집안의 유일한 문과 급제자로 고려 우왕 때 밀직사대언을 지내는 등 이방원은 어려서 부터 부친의 희망이었다. 후일 아버지 휘하에서 신진정객들을 포섭하여 구세력 제거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방원은 1388년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 태조 주원장을 만나고 돌아온 뒤, 공양왕 4년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격살하고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세력의 기반을 굳혔다.


illustrator / 이철원

고려의 마지막 기운이 느껴지던 어느 날,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 읊었던 하여가(何如歌)는 이방원의 솔직하고도 직설적인 야심이 나타나 있는 반면 답시 단심가(丹心歌)에는 고려왕조에 대한 정몽주의 일편단심이 깊숙이 녹아있다.


조선개국 시 정안군에 봉해진 방원은 부왕의 등극에 절대적인 공헌을 인정받아 자신이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개국공신의 선정과정에서 친자(親子)라는 이유로 자신이 제외되고, 이후 정치에서도 계속 소외되며 정도전 등에 의해 견제됨으로서 계비 신덕왕후의 막내아들 방석이 세자로 책봉됨에 이르렀다.


이에 불만을 품고 태조 7년 중신인 정도전, 남은 등을 살해하고 방석방번을 귀양 보내는 도중에 살해했다. 이러한 제1차 왕자의 난 종결로 이방원의 시대가 열렸다. 그는 부인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사병을 육성하고 책사격인 하륜이숙번과의 만남을 통해 다가올 재기의 순간을 철저하게 준비해 나갔다.



1차 왕자의 난 이후, 권력의 대세는 이방원에게로 옮겨 갔다. 하지만 자신의 권력욕에 대한 여론을 의식하여,  맏형인 영안대군 방과에게 왕위를 강권하였다. 정종재위 2년 넷째 형인 방간박포와 공모하여 방원 일당을 제거하려는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디.


방원은 이를 즉각 평정하고 스스로 세제에 책봉되는 모양새를 갖추고는, 곧바로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개경에 머물던 태종은 재위 4년 이궁(離宮: 화재, 전염병에 대비한 궁궐)인 창덕궁(昌德宮) 창건을 지시하여 이듬해 완공함으로서 1405년 한양으로 재천도하였다.


태종은『개성이 왕씨의 구도이므로 거처할 수 없는 곳인데 지금 그곳에 머물러있는 것은 시조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한성은 태조 상왕의 창건지이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있다. 이곳에 거처하지 않는 것은 뜻을 잇는바 효가 되지 못함에, 근년 겨울에 내가 옮아가 거처할 것이니 궁실을 짓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正宮)이지만 그 역할을 수행한 것은 불과 200여년에 지나지 않는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이전인 조선 전기에도 왕들은 주로 [창덕궁]서 머물며 정사를 보았다. 아마도 이방원과 형제들 간에 벌어졌던 골육상잔(骨肉相殘)의 아픈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왕위에 오른 태종은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거나 도전할 소지가 있는 세력들을 하나둘씩 축출함과 동시에 국가운영을 위한 제도를 정비했다. 사병을 혁파하고 의정부를 설치하였으며 조선조 운영의 기초인 6조 중심의 행정체계를 완성하고, 오늘날 지방제도의 근간이 되는 8도 체제를 정비하여 국정장악력을 강화했다.


또한 서얼(嫡庶)의 관직진출 등을 제한하는 서얼차대 법을 제정하고, 양반, 관리에서 농민에 이르는 인구나 군적파악을 위해 호적을 정비하는 호패법을 실시하는 등 관제개혁을 통해 왕권 강화를 도모하였다. 태종1년 대궐 밖 문루에 신문고를 설치하고, 14년에는 조선조 관리, 양반의 윤리범죄를 담당하던 사법관아인 의금부를 설치하여 역모방지를 꾀하였다.



이어 숭유억불 정책을 강화해 사찰 토지를 군대에 예속시키고 부녀자의 사찰 참배를 금지했다. 사실상 척불은 조선의 건국이념이 아니었다. 개국 초에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들은 고려의 부패와 패망이 불교에 기인한다며 척불을 강하게 주장했지만, 독실한 불자였던 태조의 강한 의지로 실현되지 못했었다.


이방원은 권좌에 오르자, 평생 부자간 반목으로 치닫던 아버지에 대한 증오의 불씨를 타락한 불교에 옮겨 지피면서 개혁이란 미명아래 무자비한 불교탄압을 불사르기 시작했다. 태종은 왕권강화를 절대가치로 규정함으로서, 외척의 세력이 발호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고 가차 없이 처단했다.


태종4년 적통 장자 왕권계승을 확립코자 11세의 양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는데, 이때 정비 원경왕후의 오라비인 민무구민무질이 세자의 위세를 등에 업고 조정의 실세로 행세한 이유를 들어 왕비의 4형제가 모두 처형 되었다.



피의 숙청에 연속이었지만 이러한 살벌함 속에서도 세자는 만행을 자행했다. 주상 침전 가까이 까지 가서 소리를 질러대는가 하면, 난봉질도 주로 친인척의 애첩만 골라 건드렸다. 근신하라는 어명을 코웃음 치며 날려버리고, 수색대를 풀어 궁으로 잡아들이면 대궐이 떠나가라 소리치며 난동을 부렸다.


"태종실록"의 기사를 보면 1410년(태종 10) 17살이던 세자가 봉지련이란 기생을 궁궐에 불러들였는데 이를 전해들은 태종은 크게 노하여 기생을 옥에 가두었다. 이로 인해 세자가 식음을 전폐하자 태종은 세자가 병이 날까 걱정하며 기생을 풀어주고 비단까지 하사했다 한다.  


이후에도 태종은 세자에 대한 기대를 거두지 않고 엄하게 꾸짖기도 하고 때론 눈물로 호소해가며 어르고 달랬다. 서슬 퍼런 태종도 천방지축인 아들 앞에서 만큼은  한없이 작아지는 여느 평범한 아버지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세자는 기생 초궁장(1414년), 칠점생(1416년) 등과 궁궐에서 여색을 즐기는 등 양녕의 기행(奇行)은 날이 갈수록 정도를 더해갔다.

 

illustrator / 임종철

임금으로서, 아비로서 태종의 체면이 낯을 들 수 없을 정도였으니 군왕의 권위가 말이 아니었을 게다. 온갖 비난을 감수하며 피범벅이 된 손으로 꼿꼿이 세우고자했던 왕권이 한 세자의 일탈로 조롱거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었던 태종이건만, 20대 청년 양녕이 무섭고 두려웠다.


자신이 휘두른 칼날에 사라져간 이들의 원귀가 양녕의 몸속에 온통 엉겨 붙어있는 것 같고 이승을 떠난 태조가 어둔 밤 달이 되어 비웃으며 내려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폐 세자를 주장하는 상소가 산더미처럼 쌓이며 적장자 왕통계승의 꿈이 서서히 허물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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