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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Sep 14. 2015

조선왕과의 만남(06)

태종릉_02


3대 태종 1367~1422 (56세) / 재위 1400.11 (34세)~1418.08 (52세) 17년 10개월 


illustrator / 정경아


▐  헌릉(獻陵)사적 제 194호 / 서울 서초구 내곡동 산13-1 (헌인릉 내)


태종18년, 25세였던 양녕은 결국 세자책봉 14년 만에 폐세자가 되었다. 아비 되는 입장에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용의 눈물' 이었던가. 실록에서는 "임금이 통곡하여 흐느끼다가 목이 메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유배된 양녕은 유배지를 벗어나 함부로 돌아다니며 난잡한 행각을 멈추지 않아 대신들의 탄핵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세자 양녕의 기행으로 인해 태종은 늘 맘이 편치 않았으며 그의 속은 점차 숯검정이 되어갔다. 


그가 아비 가슴에 박았던 대못이 정작 자신의 가슴에 쇠말뚝이 되어 박힌 것이다. 조선역대 왕 중 최고의 야심가이자 지략가며, 정력가였던 그는 왕성했던 52세에 전격적으로 셋째아들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으로 세자를 삼은 지 두 달 만에 일이었다. 



태종은 비정함과 관대함을 함께 지닌 군왕이었다. 제2차 왕자의 난 때 자신을 죽이고자했던 형 방간을 살려주었고, 원경왕후와 불화로 폐비론이 거론되었을 때도 이를 물리쳤으며, 고려왕족인 왕씨를 발본색원해야 한다는 대신들의 종용에도 불구하고 생존했던 이들의 생업을 보장해 주었던 그에게서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했던 태종다운 과감함을 엿볼 수 있다.


충녕대군에게 양위를 끝낸 태종은 세종의 치세를 염원했으나 몇 년 동안 조선은 극심한 가뭄으로 백성들이 고통 받고 있었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세종 4년 태종이 임종에 이르러 "가뭄이 극심하니, 내가 죽어 혼이 남아있다면 마땅히 상제(上帝)께 비를 내리도록 청하여 백성들의 근심을 덜어 주리라." 하는 말을 남겼다 한다. 



태종의 말처럼 그가 죽음에 이르자 비가 내려 오랜 가뭄이 해소됐는데 그 이후 태종 제향일인 음력 5월 10일이 되면 어김없이 비가 왔다하여, 그날의 비를 태종우(太宗雨)라고 불렀다는 유명한 야사가 전해지고 있다.


태종우는 200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내리다가 임진왜란 발발 직전 해인 1591년에 멈췄는데 이는 선왕(태종)이 전란을 걱정해 앞서 경고한 것이라 전해지기도 한다.


원경왕후 사후 헌릉을 조영할 당시 태종은 자신의 수릉지를 이곳 왕비 곁으로 정하고 왕비의 장례와 능의 간소화를 하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안암동 산자락에서 큰 돌을 다듬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큰 돌을 나르려면 백성이 너무 힘들다며 석수(石手)질을 중단시켰다 한다. 



이 때문인지 헌릉의 [참도]는 신도(神道)와 어도(御道)의 구분 없이 좁은 길로 만들어져 있으나, 능침의 석물이 유일하게 다른 왕릉의 두 배나 많은 것은 아마도 세종의 속 깊은 효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미뤄 짐작해본다. 태종은 부인이 10명으로 조선 임금 중 랭킹 3위이며, 자녀는 12남 17녀인 29명으로 랭킹 1위이다. 


그는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도 군권에 관여했으며  56세의 일기로 승하하였다. 당시에 양녕대군의 엽기적인 행각이 없었더라면 태종은 이승에서 자기성찰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단지 냉혹하고 비정했던 군주로 역사에 남아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새로운 왕조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신 전하의 치적(治績)과 골육상쟁의 과보를 떠올림에, 자식을 키워봐야 어버이 마음을 알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가 뼛속까지 스미옵나이다." 




3대 태종비 원경왕후 1365~1420 (56세)


태종 곁에 누워있는 원경왕후 민씨는 4남 4녀의 다복한 자녀를 두었지만 그녀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민씨는 여흥부원군 민제의 여식으로 1382년(우왕8) 이방원과 혼인해 태조 1년 정녕옹주에 책봉됐다. 그녀는 혼례 후 10년 동안 [위화도 회군], [정몽주 피살], [고려 멸망] 등 당시 역사적으로 굵직한 사건들을 모두 목도하였다. 


당시 이방원은 많은 사병을 키우고 있었는데, 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열흘 전 정도전이 세도가들의 사병과 무기를 나라에 반납하도록 사병혁파를 강행하였다. 이때 민씨는 사병과 무기를 친정집으로 빼돌려 숨겨놓았다. 열흘이 지나 태조가 와병(臥病)하게 되자, 왕자들을 대궐로 입궁토록 명령이 내려졌다. 


illustrator / 이민

이 어명(御命)은 정도전이 이방원 등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였다. 이를 눈치 챈 민씨는 이틈을 노려 이방원에게 무기를 주며 반정(1차 왕자의 난)을 독려하였고, 2차 왕자의 난 때에는 자신이 창을 들고 나가 남편과 함께 싸우다 죽겠다고 일갈(一喝)한 일화가 있다. 


이렇듯 그녀는 한때 위기에 처한 남편을 구해내는 총명함과 결단력을 갖춘 내조자였으나, 왕비가 된 후에는 태종과 불화가 그치지 않았다. 왕위에 오른 태종은 권력분산과 왕권강화를 위해 많은 후궁을 거느리게 되었다. 


하지만 많은 후궁을 문제 삼아 노골적으로 투기하던 민씨와 언쟁이 심해지자 태종은 아예 교태전(交泰殿)에는 가지도 않았다 한다. 또한 민씨는 남동생들을 부추겨 태종을 더욱 진노하게 하였다. 태종은 친족배척 정책을 견지하였으나, 왕비의 오라비 민무구민무질태종의 등극이 자신들의 공이라며 떠벌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양녕대군이 왕위에 오르기도 전에 자신들의 권력을 탐하여 세자를 지나치게 감싸고돌았다. 어느 날 태종이 그들을 떠보고자 세자에게 양위할 것을 선언하였는데 유독 이들 형제는 왕의 양위를 만류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의견도 내 놓지도 않았다.


태종은 이들이 세자를 빌미로 권세를 잡으려했다는 죄목을 씌워 유배지에서 사사(賜死)했다. 6년 뒤 민무휼, 민무희 형제가 형들의 억울함을 호소하자 태종은 그들에게도 사약을 내렸다. 오라비들을 구하려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이들 4명이 모두 처형되고 친정은 멸문지화로 전락하자 이성을 잃은 민씨는 불손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illustrator / 이무성

이때 신하들은 민씨 집안이 역적이니 원경왕후도 폐서인으로 폐출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태종은 외척세력의 후환을 사전에 제거했기에 민씨를 내쫓지 않았다. 남편을 왕으로 만들었지만, 그 대가로 남동생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비극의 여인은 수강궁(壽康宮) 별전에서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으며 1400년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정비로 진봉됐으나 생전에 부부간의 정이 싸늘해서 였는지, 오로지 정비라는 명분으로 태종 곁에 쌍릉을 이루어 잠들어있다. 굵직한 지대석이 1미터 간격으로 두개의 능을 이어주고 있는데, 그들의 능이 합장되지 못한 까닭에 능을 마주하던 내내 여운이 머문다.


태종(太宗) 쌍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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