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주 Sep 16. 2015

조선왕과의 만남(07)

세종릉_01


4대 세종 1397~1450 (54세) / 재위 1418.08 (22세)~1450.02 (54세) 31년 6개월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영릉(英陵) 사적 제195호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83-1 (영녕릉 내)


세종이 묻힌 영릉은 연중 방문객이 가장 많은 능이다. 주변 볼거리가 많아 여행, 소풍, 산책의 명소다. 현직시절 휴가를 이용해 가족들과 함께 이곳 영릉을 포함 남한강, 신륵사, 영월루, 목아 불교박물관을 방문했던 경험이 있지만 왕릉기행으로 다시 찾은 영릉이다 보니, 성군의 혼령을 잠시라도 마주할 수 있다는 설렘과 함께 괜스레 숙연해진 마음으로 능을 들어선다.


영릉은 조선 왕릉 중 최초로 하나의 봉분에 왕과 왕비를 합장한 능이자 조선전기 왕릉배치의 기본이 되는 능으로, 가을중턱에 바라보는 능역의 풍경은 성군의 능을 대변해주는 듯 상서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영릉은 당초 서울 서초구 대모산 아래에 태종헌릉 옆에 있었다. 조선당대에 최고의 성군인 세종은 효자였다.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헌릉 서쪽을 조성하여 그 우실을 왕의 수릉(壽陵)으로 삼았다. 이때 풍수가 최양선헌릉 곁에 마련한 수릉 터가 불길하다 수차례 상소하고 신하들도 수릉택지가 명당이 아니라 진언하자, 부모님 능 근처보다 더 좋은 명당이 없다 고집하며 부왕 곁에 묻히고자 했다.


영릉(英陵) 홍살문

세종은 생전에 "풍수지리설을 외면할 수 없다"하며 아들 수양대군 에게 풍수를 배우도록 지시하였는데, 그토록 풍수를 중시했던 그가 정작 자신은 풍수를 외면한 채 물이 많은 능지를 택한 것을 보면, 가히 대단한 효자였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세조 때 왕실에 흉사가 잦았던 이유를 들어 영릉이 불길하다는 논의가 대두되었으나 서거정 등이 반대하여 옮기지 못하고 예종 때 여주로 천장(遷葬)하였다. 현재의 영릉은 당초 이인손의 묘역 이었으나, 예종이 직접 나서 이인손의 자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세종의 천장을 시행하였다.


영릉여주로 천장될 때 운반상의 어려움 때문에 그 자리에 묻었던 옛 석물들은 1973년 세종대왕 기념사업회가 발굴하여 청량리 [세종대왕 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왕릉에 각 4기씩 조성되었을 석양, 석마, 석호상은 발굴 후 현재 각기 2기씩 남아 있는데, 이중 석호상 2기는 현재의 영릉으로 이전 되었다.


 사진작가 / 임성환

성군 또는 대왕이라 불리는 세종은  태종의 셋째아들로 엄한 아버지 밑에서 최대한 자신을 낮추고 지독하게 공부하며 청년시절을 보냈으며 스물두 살이 되던 해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왕위에 올라 백성을 사랑하고 위하는 바른 정치에 힘을 쏟은 우리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간혹 지나치게 신격화됐다는 일부 견해도 있지만 포장을 한 겹 벗겨버린다 해도 세종은 역사상 가장 훌륭하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을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국방, 과학, 예술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위대한 업적을 남긴 후대 모범이 되는 성군이었다는 사실에 반론이 제기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 많은 업적 중 한글창제(創製)는 가장 위대한 민족의 자부심이라 여겨진다.  

 


조선 초기 지방에서는 여전히 고려를 그리워하는 옛 충신들이 상당수 있었지만, 걸출한 태종과 섬세한 세종을 거치면서 조선은 견고한 국력을 갖춘 국가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태조는 조선을 건국할 때 왕조체제를 견고하게 구축하기 위한 제도를 상당수 실시하였지만, 사실 그러한 제도는 태종 조에 다져져서 세종 조에 효과적으로 시행되었다.


현세의 IT(Information Technology) 경영으로 조명해볼 때 태조가 한양천도를 위한 궁궐을 세우며 조선이란 하드웨어를 도입 하였다면,  태종은 국가제도인 운영시스템(Operating System)을 세팅한 뒤 제도라는 시스템을 가동했다. 이때 해커(Hacker)나 좀비(Zombie) 등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보안패키지를 가동해, 방화벽이란 그물망에 걸린 숱한 혈육과 인척을 살생하며 시스템 안정을 도모하였다.



이렇듯 선왕(先王)들이 엄청난 비용을 치루며 마련한 고가 장비인 하드웨어를 바탕으로 세종은 정교한 소프트웨어를 도입해 컴퓨터 활용을 극대화 하듯, 비로소 그의 시대에 조선의 국정개혁과 태평성대를 열었다. 세종은 어린 시절부터 많은 책을 읽어대던 호학의 군주였다.


세종의 독서는 유학의 경전에 그치지 않고 역사, 율법, 천문, 음악, 의학 등 다방면에서 지식을 쌓았다. 경서(經書)는 100번씩 읽고 기타 역사서와 다른 책들도 30번씩 읽었다 한다. "몹시 추울 때나 더울 때에도 밤새 글을 읽기에, 나는 그 아이가 병이 날까 두려워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하였다."라고 태종이 말할 정도였다 한다.


그는 독서 후에도 내용들을 정리하고 비교하여 이치를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더 깊은 생각을 하라고 학자들에게 주문했다 한다. 세종은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등용하여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구현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삼포를 대외적으로 개방하였고 그전까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던 노비교환이나 노비매매를 법적으로 금지시키는 등 개혁안을 펼쳤다.



군사적으로는 4군 6진을 개척하며 국토를 확장해 여진을 몰아내고, 쓰시마 섬(對馬島)을 정벌해 왜구를 강력하게 제압했다. 과학분야는 세종자신이 천문기상에 관심이 깊어 천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운관(書雲觀)을 설치하고 장영실(蔣英實)이천(李蕆) 등에게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을 만들게 하였다.


활자 인쇄술을 발전시켜 농사직설, 효행록, 삼강행실도 등 많은 책을 펴냄으로서 백성들이 농사를 짓고 바른 생활을 하는데 실질적인 큰 도움을 주었다. 세종 조 과학예술은 중국과 맞먹을 정도로 발전하였는데 박연을 등용해 아악(雅樂)을 정리하고 맹사성을 통해 향악을 뒷받침해 조선의 고유음악을 만들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치는 동안 왕이 너무 관대하면 백성들이 요행수를 바라게 된다면서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그는 늘 관대하고 은혜로운 임금이었다. [한글창제]도 이러한 애민정신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훈민정음 창제에 대해 전해지는 기록은 거의 없다.



세종 최대의 업적으로 우리 역사에 매우 중요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 만들기 시작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었는지 전해지지 않는다. 심지어 세종단독 작품인지 집현전 학자들과의 공동 작업인지에 대해서도 논쟁이 있다. 당시 엄청난 반대를 예상한 세종이 비밀리에 작업한 일이기에 그럴 것이란 추측뿐이다.


추측을 떠나 세종의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남겨진 [한글]은 중국 상형문자와 달리, 표음문자인 소리글로 모든 말과 소리를 남김없이 적어낼 수 있을 만큼 독창적이며 과학적인 자랑스러운 문자이다. 부연하지 않아도 핸드폰의 문자메시지 작성 시 한글만큼 쉽고 빠르게 작성할 수 있는 문자가 또 있겠는가.


세종은 우리말을 정확하게 기록할 글자가 없다는 사실을 안타가워 했다. 더욱이 우매한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한자를 몰라 제대로 호소하지 못하는 것을 늘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하여 그는 모든 백성들이 쉽게 배워 읽고 쓸 수 있는 우리말 글자를 만드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 일로 심한 눈병까지 얻게 되자 치료를 위해 충청도의 초정약수터로 요양을 가게 되었는데, 그 때에도 글자 연구에 필요한 책과 자료를 지니고 갔다한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초인적인 연구를 해나가다 보니, 세종은 일찍부터 육체의 한계를 느껴야 했다.


30대 초반부터 풍질(風疾)이 발병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으며 40대 초반에 이르러서는 하루 종일 앉아서 정사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나빠졌다. 1440년부터는 독서도 거의 못했던 듯하다. 온갖 우여곡절을 거쳐 1446년(세종 28) 드디어 스물여덟 글자인 훈민정음을 반포하였다.


세계 언어가운데 한글을 신비로운 문자라 하는데 세계문자 중 유일하게 만든 사람과 제정일을 알며 글자를 만든 원리까지도 알기 때문이라 한다. [한글]이라는 명칭은 1910년대 초 주시경 선생 등 한글학자들이 쓰기 시작해 현세에는 스물네 자만 사용하고 있다.


세종대왕 합장릉


매거진의 이전글 조선왕과의 만남(06)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