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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Sep 16. 2015

조선왕과의 만남(08)

세종릉_02


4대 세종 1397~1450 (54세) / 재위 1418.08 (22세)~1450.02 (54세) 31년 6개월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영릉(英陵) 사적 제195호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83-1 (영녕릉 내)


역사가 이어지는 한 영구적으로 고맙게 사용할 나랏글을 만들어 준 문화혁명가 이름이 [세종대왕]이다. 세종대왕의 탄생일인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한글을 쓰는 국민 모두가 세종의 제자라 할 수 있으니 스승의 날은 참으로 탁월한 택일이다. 


천재성이 엿보이는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 세종에게는 당시 사대부에게 한글을 문자로 인정받고 널리 쓰이도록 하는 것이 또 다른 고민거리였다. 조선 최고 인재집단인 집현전 학자들과 대신들은 한글의 과학성은 인정하지만, 백성들의 교화 필요성에는 반대하며 한글을 외면했다. 이때 [훈민정음]에 반대하는 최만리의 상소에 세종은 추상같은 지엄한 명을 내렸다. 



1444년(세종 26) 세종실록 기사(記史)에는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처음부터 죄주려 한 것이 아니고, 다만 소(疏)안에 한두 가지 말을 물으려 했던 것인데, 너희들이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바꾸어 대답하니 너희들의 죄는 벗기 어렵다."라며 부제학 최만리와 신석조김문정창손 등을 의금부에 하옥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세종은 인자한 성품에 합리적인 성군이었지만 자신이 설치한 집현전의 학자들을 하옥시킬 만큼 한글창제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갖고 있었다. 실로 피땀 어린 문자혁명이라 감히 단정해 본다. 집권후반기 세종태종이 마련한 왕권중심의 정치체제인 육조 직계제를 의정부 서사제(署事制)로 개편하고 세자에게 서무를 결재토록 하여 왕에게 집중되었던 국사를 분산시켰다. 


illustrator / 근호

건강상의 이유이기도 했지만, 집현전을 통해 배출된 많은 유학자들로 인해 자신의 유교적 이상을 실현시켜줄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러한 시도는 신권과 왕권이 조화된 유교적 왕도정치를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성공적이었다. 


세종 조 치세는 민족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대였음에 주변 국가들에게 큰 충격을 줌으로서, 세종 5년인 1423년을 전후하여 조선에서 살겠다며 집단 귀화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고 조선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세종은 정비 소헌왕후를 포함해 여섯 명의 부인에게서 18남 4녀를 두었다. 


illustrator / 이철원

아들 숫자로는 조선 역대 왕 중에 최다이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여러 가지 병에 시달리면서도 새로이 편찬된 책들을 수십 권씩 직접 검토하던 세종은 1450년 54세로 이승을 하직하였다. 그가 묻혀있는 여주 영릉은 조선왕릉 중에서 최고의 명당으로 그 자리 때문에 조선왕조가 100년은 더 연장되었다(英陵加百年)라고 대개의 풍수가들이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주산(主山)에서 혈장(穴場)까지 이르는 산 능선이 일직선으로 힘없이 내려와 기가 생동하지 못하고 청룡 끝(현재 기념관 자리)이 배반함으로서 기(氣)가 모이지 않는다고 흠잡는 이들도 있다. 하여간 영릉은 당시 최고 풍수가였던 안효례가 잡은 자리였지만, 천장을 주도했던 그의 자손 예종은 스무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지속되던 왕실의 불행을 막지 못했다.     


"대왕의 넘치는 열정과 지도력 그리고 놀라운 천재성에 대해 감탄을 금할 길 없사옵고, 사대주의에 매몰돼 훈민정음 창제를 억지했던 상류층 기득권사수 무리들의 주장을 과감히 배척하며, 민초들의 깨우침을 위해 진력(盡力) 하셨던 그 고귀함에 한없는 경의를 표하옵나이다.“


사진작가 / 임성환


4대 세종비 소헌왕후 1395~1446 (52세)


소헌왕후 심씨는 본관 청송(靑松)인 청천부원군 심온의 여식으로, 그녀는 인자하고 어진 성품으로 만인의 표상이었으며 조선시대를 통틀어 내명부를 가장 잘 운영했던 최고의 왕비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왕비가 되기 위한 금혼령과 간택령을 통해 입궐했던 여타의 왕비들과는 달리, 태종의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에게 시집 온 후 첫째 양녕대군이 폐세자 되는 사건으로 인해 충녕이 세자에 이어 왕이 되자,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왕비가 되는 운명을 갖게 되었다. 


illustrator / 박진수

이렇듯 자신에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국모 자리는 그녀에게서 많은 것을 잃게 하고 말았다. 영의정이던 심온(沈溫)무술옥사로 뒤집어 쓴 반역죄에 연루돼 친정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태종세종에게 양위를 한 이후에도 여전히 상왕(上王)으로서 궁중의 실세였다. 


태종은 외척세도를 병적으로 경계하여 자신의 재위 시 아내 원경왕후의 집안을 쓸어 버렸고 뒤를 이은 세종의 처가(妻家)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옥사를 주도했던 박은조말생은 태종 사후 소헌왕후의 복수가 미칠 것을 우려해 그녀를 폐서인시키라고 주청했으나 뜻밖에도 이를 태종이 반대하였다. 



비(妃)로서 내조의 공이 크며, 많은 자손을 생산하여 왕실의 안정에 공을 세웠다는 이유였다. 아마도 여장부였던 원경왕후 성정에 넌더리를 대던 태종에게, 조신했던 소헌왕후는 매우 흡족한 며느리였던 것 같다. 또 다른 불행으로 그녀는 지아비의 사랑을 다른 여인들과 나누어야만 했다.


소헌왕후와 세종 사이에는 무려 8남 2녀의 자녀가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두 사람의 금슬이 매우 좋았던 것 같다. 허나 심온의 옥사로 말미암아 폐서인이 될 번 한 위기에서 구해준 태종과 원경왕후는 세종에게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왕비 외 다른 여인들을 들여 또 다른 자손들을 생산 할 것을 요구했다. 


소헌왕후(昭憲王后)

이는 어떻게든 많은 왕손을 생산하여 종사(宗社)를 두텁게 하려는 건국초기 왕실의 고육지책이었다. 하지만 소헌왕후는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후궁과 왕실 종친들의 존경을 받는 한편 세종의 신뢰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니, 소헌왕후 또한 부창부수(夫唱婦隨)를 행하였던 조선 최고의 성비였을 게다. 


그러나 이렇게 평생을 절제하고 인내해온 그녀에게 아직 시련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바로 두 아들의 연이은 죽음이었다. 다섯째인 광평대군이 20세로 요절한 이듬해 일곱째 평원대군마저 19세로 사망했는데, 이는 세종의 신병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었고, 왕후의 생을 앞당기게 하였다. 



두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한 고통으로 몸져누운 소헌왕후는 이듬해 결국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3년 뒤 세종은, 평생 눈물과 한을 삼키며 불법에 의지해 살았던 부인을 위해 찬불가(讚佛歌)를 손수 지었는데 이것이 유명한『月印千江之曲』이다. 그리고 1년 뒤 세종이 승하하면서 조선최초의 합장릉이라 일컬어지는 영릉에 세종과 함께 비로소 편안히 잠들게 되었다.  


여주 세종 합장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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