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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Sep 17. 2015

조선왕과의 만남(09)

문종릉_01


5대 문종 1414~1452 (39세) / 재위 1450.02 (37세)~1452.05 (39세) 2년 3개월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현릉(顯陵) 사적 제193호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6-3 (동구릉 내)


백로를 엿새 넘긴 가을 초입, 상쾌한 아침을 호흡 하며 [동구릉] 산책길을 따라 건원릉으로 향하는 길목 초입에 문종이 잠들어 있는 현릉이 있다. 왕릉우측 멀찌감치 있는 현덕왕후 은 서로 다른 언덕 위에 따로 만든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을 이루고 있으며, 짧았던 재위기간 탓인지 홍살문을 비롯하여 정자각, 비각 등은 초라히 하나씩만 세워져 있다.


생전에 여인을 멀리했던 문종은 죽어서도 홀아비 신세를 겪은 왕이었다. 현덕왕후문종이 세자시절, 빈(嬪)의 신분으로 원손(후일 단종)을 낳고 3일 만에 산후병으로 죽음으로서, 왕비릉을 갖추지 못한 채 경기도 시흥 군자면에 안장되었다.     

 

권씨는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왕후로 추존되고 능호도 받았으나 2년 후 문종이 종기가 터져 경복궁 강녕전(康寧殿)에서 승하하자 건원릉 동남쪽 줄기에 [현릉]이 조성되면서, 이때에 왕비의 능도 천장해 합장릉을 이루었다. 능지를 정할 때 수양대군황보인, 김종서, 정인지 등 대신들을 비롯해 풍수관이 현지를 답사하고 정하였다.  


문종 동원이강릉

그러나 1456년(세조 2) 왕비의 친정 어미와 오라비가 단종 복위사건에 연루되어 왕비와 친정집안 모두 서인(庶人)으로 추락함에 이듬해 종묘에 있던 신주가 철거되고 왕비의 무덤을 파헤쳐 서인의 방식에 따라 장사를 다시 지냈다. 출폐된 권씨의 시신은 남편혼령을 홀로 두고 시흥 군자면 앞 바닷가 십리 밖에 버려졌다.


이로써 [합장릉]이던 현릉단릉이 되고, 문종은 56년이란 긴 세월을 저승의 홀아비 로 남게 되었다. 중종 8년(1513년) 종묘(宗廟)에 소나무가 벼락을 맞고 산산조각이 나는 일이 있었다. 이에 왕비복위가 논의되었는데 역대 왕들의 신위(神位)는 모두 짝을 이루고 있음에 문종의 신위만 홀로 있어 신위에 송구함을 덜기위해 짝을 맞춰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당시 왕비의 신위를 다시 세우려면 먼저 능을 복원시켜야 한다하여 시흥 군자 앞바다 부근에서 한바탕 소동을 벌린 끝에 유골을 수습해, 문종이 묻혀있는 현릉으로 천장하였다. 이때 두 능 중간지점으로 정자각을 이건하였는데, 양능사이 빽빽이 들어서있던 소나무가 능역(陵役)을 시작 하자 저절로 말라 죽어 두 능 사이를 가리지 않게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애당초 문종은 생전에 할아버지 태종과 아버지 세종 곁에 묻히고자 헌릉이 있는 대모산 줄기아래 세종 능 서편(현 안기부 위치)을 능지로 택하였다. 하지만 문종은 자신의 뜻대로 그곳에 묻히지 못했다. 당시 풍수와 지리에 뛰어났던 이현로안평대군을 지지하고 있었다.


문종 능(左) / 왕비 능(右)

이에 풍수에 조예가 깊었던 수양대군은 왕의 능지를 파보니 물이 나고 바위가 있었다는 이유를 들어 문종 승하 시 풍수를 맡았던 지관(地官) 목효지를 노비로 삼고, 이현로는 효수형에 처했다. 또한 국풍(國風) 최양선을 삭탈관직 후 유배시켰다.


하지만 수양의 내심은 형님인 문종의 기를 꺾고, 자신의 대권을 향한 사전 정지작업이 목적이었다. 이렇듯 수양대군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택지한 [동구릉] 내의 문종 능 태조의 능과 겉모습이 비슷해 보인다. 두 왕릉의 산줄기와 좌향은 같지만, 정작 뒷녘 산줄기의 꺾임은 반대라 하여 태조 능은 명당이지만 문종의 능은 흉당이라 전한다.



태조 능은 생룡(生龍) 장생발복 터이나, 문종 능은 사룡(死龍)에 대흉절명 터라 하니 그 이후 벌어졌던 단종의 비애를 보면 역시 계략의 풍수를 증명해주는 것 같다. 문종에 대한 평가는 30년에 가까운 세자기간과 2년간 재위 중 치세기간으로 나누어 조명해봐야 할 것이다.


문종은 1421년(세종 3) 세자로 책봉되어 29년을 왕세자에 머물러 있었다. 즉위 초부터 각종 질환으로 고생을 한 세종이 병상에 누운 것은 1436년(세종 18)으로 세자 향의 나이 23살 때이었다. 이듬해 세종은 왕세자의 섭정을 강력하게 추천하며 세자에게 서무결재권을 넘겨 주려 했으나 대신들이 이를 반대하자 자신의 업무량을 줄이기 위해 의정부 서사제(署事制)를 실시했다.



태종 조 이후에는 왕권강화를 위해 왕이 직접 육조를 관장하는 육조 직계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병약해진 세종은 육조에서 올라오는 모든 업무를 삼정승이 중심이던 의정부에서 심의한 후 결과만 왕이 결재하는 의정부 서사제로 전환했다.


하지만 세종은 의정부 서사제로도 업무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쇠약해짐에 따라 세자가 서무를 관장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첨사원(詹事院)을 설치하고 정무비서 역할을 하는 첨사와 동첨사 등을 두어, 29세의 세자가 섭정을 하도록 하였다.


그는 8년 간의 섭정을 통해 정치실무를 익혔고 여러 가지 치적들을 남기기도 했다. 때문에 세종 후반기 정치치적은 세자  업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문종은 8년의 섭정을 끝내고 조선 제5대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조선왕조 최초로 적통장자의 왕위계승이 실현되었다. 병약했던 그는 세자시절의 업무과중으로 건강이 심하게 악화된 상태였다. 즉위 후 병세가 더욱 심해져 재위기간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냈다. 그는 어릴 적부터 학문을 좋아해 학자를 가까이 했으며 장영실의 측우기 제작에 직접 참여했을 정도로 천문과 산술 및 해와 달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역산에 뛰어났고, 서예에도 능하였다.


성격이 유순하고 자상해 누구에게나 호평을 받았으며 거동에 기풍이 있고 판단이 신중하여 남에게 비난 받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허나 지나치게 어진 탓에 과단성이 부족하고, 육신 또한 허약했었다. 문종세종 하반기에 살아났던 불교적 경향을 불식하고 유교적 분위기를 조성코자 안간힘을 썼다.



언로를 넓히는 정책을 펼치기 위해 6품 이상의 신하들에 대해서는 윤대를 허락하여 벼슬이 낮은 신하들의 말에 대해서도 경청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렇듯 관대한 정책을 기본통치 방향으로 설정한 그는 우선적으로 고려사, 고려사 절요, 동국병감 등을 편찬하게 하였다. 이는 곧 문종이 역사와 병법, 군주의 수신제가(修身齊家)를 정리해 사회기반에 정착시키고자 제도를 확립하려 했음을 의미한다.


여러 면에서 세종을 빼닮았던 문종은 훌륭한 임금에 덕목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의 여인 편력을 보면 특이한 점이 많다. 문종은 세 번째 세자빈 권씨가 죽은 후 더 이상 비(妃)를 들이지 않았다. 세자 시절인 28세에 권씨를 잃고 39세 병사할 때까지 새 아내를 들이지 않았다.



11년 동안 임금이 홀아비로 산다는 것은 당시 법도로서 불가사이 한 일이다. 왕실의 왕자생산은 종묘사직을 이어갈 의무였다. 백성을 위해 늘 선정을 베풀던 성군 세종에게는 불행한 일이었다. 부왕인 세종은 이런 부분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미뤄 짐작해 보건데 세종은 그리 강건했던 왕이 아니었음에 호색의 군주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의 강권에 의해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많은 자식을 거느렸을 것으로 추측해본다. 병약한 세자가 여인을 탐하지 않는 것을 앞서 경험 했던 아비로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현릉(顯陵) 정자각

또한 장자에게 왕권을 확실히 물려준 이상, 권력에 대한 끝없는 골육상쟁을 목격했던 세종으로서는 확실한 왕손(단종) 하나만으로 애써 만족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세자빈 2명의 추태로 인해 상심이 컸을 왕과 비는 새로운 며느리 를 맞아들이기에 자신이 없었을 것으로 짐작해 본다.


이는 문종도 같은 생각이었을 게다. 상상은 필자만의 특권이 아닌가. 하지만 이러한 세종의 뜻은 오래지않아 그의 둘째 아들 수양에 의해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다. 문종의 죽음은 부왕 세종의 2년 상(喪)을 끝낸 지 불과 3개월만이었다. 세종의 임종 때에 그는 등창을 앓은 직후였다.



부스럼이 터진 구멍이 제대로 아물지도 않은 상태에서 국상을 맞이한 것이다. 신하들은 그의 건강을 염려하여 따뜻한 방에서 거쳐하며 치료하기를 청했으나, 그는 끝내 듣지 않고 무리해 삼년상을 치르려 했다. 이년 상을 마치고는 신하들을 일일이 윤대(輪對)하며 정사에 지나친 열정을 보였는데, 이것이 화근이 돼 와병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문종이 승하하던 당일의 기록을 보면 “임금을 보살피던 의관들은 단지 그의 안부 만을 살펴보고는 왕에게 활 쏘는 것을 구경하고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도록 까지 하였다. 임금의 건강상태에 대해 세밀하게 파악하지 않은 것이다. 왕은 세자가 묻는 말에도 대답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매우 위급한 순간에 이르자 의관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댔다”한다. 문종이 이승을 하직하는 찰나였다. 만일 세종소헌왕후가 살아있었더라면 사태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진 않았을 게다. 부부간 쌍릉조차 갖추지 못하고 동원이강릉으로 떨어져있는 나약했던 군주인 문종의 능 앞에 잠시 머물며 부모의 그늘 막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새삼 깨달아본다.   

  

“아버지의 영민함과 어머니의 후덕함을 이어 받으신 전하께서 적통 장자계승에 미덕을 오래도록 남기시지 못함에 애틋한 아쉬움을 간직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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