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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Sep 17. 2015

조선왕과의 만남(10)

문종릉_02


5대 문종비 현덕왕후 1418~1441 (24세)


▐  현릉(顯陵) 사적 제193호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6-3 (동구릉 내)



현덕왕후 권씨는 화산부원군 권전의 여식으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431년(세종 13) 14살에 동궁에 들어와 세자의 후궁이 되었다. 당초 문종이 세자시절 김오문의 딸과 첫 번째 혼인을 하였으나 자질 부족으로 휘빈 김씨가 폐출되었고, 봉여의 딸과 두 번째 혼인을 하였다


1437년 순빈 봉씨동성애 사건이 발각돼 다시 폐출되자, 같은 해 유일하게 문종의 자식을 낳은 권씨는 세자빈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권씨가 가례를 행하지 못한 채 4년 만에 빈의 신분으로 원손(후일 단종)을 낳고 3일 만에 산후병으로 죽자 현덕(顯德)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문종이 즉위한 뒤 비로소 왕후에 추봉되었다.


Illustrator / 이철원

현덕왕후 소생으로는 단종경혜공주가 있으며, 그녀는 성품이 단아하고 효행이 있어 세종소헌왕후의 총애를 받았다. 이런 연유로, 그녀가 24세 에 갑자기 사망하자 세종 내외는 5일간 상복을 입었고 세자였던 문종은 30일간 상복을 입었다 한다.


중종 조에 현덕왕후의 유골을 현릉으로 다시 모셔왔지만 원래대로 합장한 것이 아니라, 문종이 묻힌 곳에서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 능을 조성 하였다. 시동생인 세조에 의해  번 죽은 현덕왕후문종의 우측언덕에 묻혀 모진역사를 증언하고 있었다.   


현뎍왕후 능(左) / 멀리 보이는 문종 능(右)




【徽嬪 金氏 事件】     


휘빈 김씨는 문종의 세자시절 첫 번째 부인으로 나이가 세자보다 많았다. 김씨는 각종 시기와 질투로, 거느리고 있던 궁녀 호초와 함께 세자를 어렵게 만들었다. 세자가 그녀의 처소를 찾는 횟수가 줄어들자 세자를 끌어들일 여러 가지 궁리를 하였다.


어느 날 김씨는 남자가 좋아하는 여인의 신을 베어다가 불에 태워 가루를 만들어 술에 타서 남자에게 마시게 하거나, 혹은 두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서 차고 있으면 반드시 남자의 사랑을 받게 된다는 미혹한 압승술(壓勝術)을 믿고 이를 실행하다가 탄로가 났다.


결국 휘빈 김씨는 폐서인 이 되고 부원군 김오문은 삭탈관직 되었다. 무인이었던 휘빈의 아비 김오문은 치욕과 분노를 참지 못해 김씨를 죽이고 자신도 자결하였다.


illustrator / 최달수

  

【純嬪 奉氏 事件】  


순빈 봉씨는 문종의 세자시절 두 번째 부인으로 쫓겨난 휘빈 김씨의 뒤를 이어 1429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다혈질적인 봉씨의 성격으로 문종과 사이가 멀어졌고, 이에 세종은 세자의 후궁으로 권씨, 홍씨, 정씨를 추봉하였다.


조선왕조 실록 세종실록 75권, 1436년(세종 18) 음력 11월 7일 세종이 신하들에게 세자빈 폐출의 이유를 설명하는 첫 번째 기사(記史)에는 책을 집어던지는 등의 봉씨의 과격한 행동이 묘사되어 있다. 권씨경혜공주를 잉태하자, 위기감을 느낀 봉씨는 거짓으로 임신소동을 일으키고, 외간 남자를 엿보며, 아침부터 술에 만취해 폭언을 하는 등 난행을 일삼았다.


하지만 이미 휘빈 김씨를 폐출한 경험이 있는 세종은 세자빈 문제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며, 소헌왕후와 함께 타이르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하였다. 하지만 세자빈의 망측한 행동은 계속되었고, 마침내는 빈궁의 궁녀인 소쌍(召雙)과 동침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봉씨는 항상 소쌍이 자신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소쌍과 동침자리 를 같이 한 이후로는 시중드는 여종을 시키지 않고 자기가 직접 이불과 베개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 소문은 궁녀들 사이를 떠돌다가 세종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봉씨 스캔들은 조선최초의 동성애 사건이었다.


조선사회에서는 동성애를 대식(對食)이라 불렀다. 세종소쌍을 불러 그 진상을 물으니, 소쌍이 말하기를 “지난해 동짓날에 (嬪)께 저를 불러 내전으로 들어오게 하셨는데, 다른 여종들은 모두 지게문 밖에 있었습니다.



저에게 함께 잠자리를 요구해 이를 사양했으나, 빈께서 윽박지르므로 마지못해 옷을 한 반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갔더니 빈께서 나머지 옷을 다 빼앗고 강제로 들어와 눕게 하여, 남자와 교합하는 것과 같은 형상으로 희롱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빈(嬪)을 불러서 사실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소쌍단지(端之:궁녀)를 사랑하고 좋아하여 밤에 같이 잘 뿐만 아니라, 낮에도 목을 맞대고 혓바닥을 빨았습니다. 이것은 곧 저희끼리 한 짓이오며 저는 처음부터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세종은 궐내 시녀간의 동성애(同性愛)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이 사건으로 몹시 격노해 곤장 70대로 엄히 다스린 후 1436년(세종 18) 음력 10월 26일 서인으로 폐하였다.


폐빈 는 궁궐에서 쫓겨나와 친정집에 이르자 아비 봉려가 딸을 목 졸라 죽이고 폐빈 시신을 단정히 수습한 후 자신도 자결하였다는 낭설이 있는데, 기록에 의하면 봉여는 세자빈 폐출 전인 1436년 음력 7월에 죽었으며 , 동년동월 12일자 [조선왕조실록]에 그의 졸년(卒年)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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