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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Oct 04. 2015

조선왕과의 만남(11)

단종릉_01


제6대 단종 1441~1457 (17세) / 재위 1452.05 (12세)~1455.05 (15세) 3년 2개월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장릉(莊陵) 사적 제196호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133-1


단종이 잠들어있는 영월 장릉을 방문하기 전 반드시 먼저 들러볼 곳이 청령포이다. 이곳은 자연이 빗어낸 천혜의 유배지다.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은 멀고 먼 영월 땅으로 유배를 떠났다. 1456년 음력 6월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유배교서를 받은 단종은 유배행렬과 함께 돈화문을 출발해 청계천 영도교(永渡橋)로 향했다.


이곳까지 따라 나온 정순왕후와 영원한 이별을 한 단종은 한강나루에서 남한강 뱃길을 따라 양주-광주-양평-여주-원주를 거쳐 영월 땅 주천(酒泉)에 이르렀다. 단종은 주천마을의 우물(어음정: 御飮井)에서 잠시 목을 축인 뒤, 공순원(公順院) 인근 주막에서 유배길 행선지의 닷새 밤을 보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서둘러 출발한 유배행렬이 험준한 군등치 고개에 이르자, 단종이 금부도사(禁府都事)에게 “무슨 고개가 이리도 험한가?”라고 물었. 이에 왕방연 답하기를 “노산군께서 오르시니 이제부터는 군등치(君登峙)라고 옵지요.”라고 하여 고개지명이 생겨났다 한다.


연이어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힘겹게 배일치 고갯마루에 오른 단종잠시 발길을 멈추고 자신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육신(死六臣)을 떠올리며, 서산(西山)에 기우는 해를 향해 큰절을 하였다. 영월의 배일치(拜日峙)도 이런 애닮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산 넘고 물길을 돌아 귀향행렬이 이렛날에 도착한 곳은 청령포(淸浦)였다.



이곳은 삼면이 강줄기에 휘둘려있고 뒤쪽으로는 깎아지른 험준한 절벽으로 둘러싸여 마치 육지속의 섬과도 같아 보인다.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빠져나갈 수 없는 지형을 갖춘 곳임에 당시 세조의 무서운 위력이 느껴지는 곳 이었다.


청령포(淸泠浦)

 쫓겨난 어린 왕이 걸터앉아 한숨으로 보냈다는 6백년 된 관음송(觀音松)과 어소(御所)를 향해 기울어 자란다는 노송(老松), 그리고 처소에 들며 지었던 어제시(御製詩)는 잠시나마 청령포에 머물었던 단종의 애절한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관음송(觀音松)

또한 처소 뒤에 망향탑노산대(魯山臺)단종이 올라서서 정순왕후를 그리워했던 곳임을 짐작케 할 뿐이다. 늦가을의 장릉은 한가로이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능에 오르는 계단 간간히 떨어져 있는 낙엽을 보며 잠시 오르니 어느새 능에 이른다. 장릉은 추봉된 정릉(貞陵)의 관례에 따라 난간석과 무인석을 설치하지 않고 간단한 능 석물로 조성돼 있다.


한양을 바라보던 망향탑

당초부터 왕의 능지로 쓰인 곳이 아닌 까닭에, 협소한 능역이 다소 초라하게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따사로움이 능역에 배어있는 듯하다. 단종폐위 후 중종 조까지 모진세월을 연명하며 남편을 그리워한 정순왕후사릉(思陵)남양주에 있음에, 죽어서도 삼 백리나 떨어져 있어야 하는 왕가의 운명이 가을하늘 무상한 흰 구름처럼 애처롭기만 하다.


노산대(魯山臺)

문종은 병약하여 많은 후사를 내지 못했다. 현덕왕후가 세자빈시절 낳은 홍위는 생모의 얼굴도 모르는 채, 세종의 후궁이자 자신의 서조모인 혜빈 양씨의 손에서 자랐다. 현덕왕후는 해산 때 기력이 소진돼 혜빈 양씨에게 홍위를 부탁하며 24살에 숨을 거두었다. 홍위는 할아버지인 세종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8살에 세손으로 책봉되었다.


이후 세종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신숙주 등의 소장학자를 은근히 불러 세손의 앞날을 부탁했다. 세종이 이토록 간곡한 부탁을 한 까닭은 혈기왕성한 자신의 자식들 때문이었다. 특히 둘째아들 수양은 어릴 때부터 야심이 크고 호기가 많은 인물이었다.



문종이 어린 세자를 부탁한다는 고명(顧命)을 남기고 병사하자, 단종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통상 어린왕의 경우 궁중의 높은 서열인 대비가 수렴청정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때는 대왕대비는 물론 대비도 없었으며 심지어 왕비조차 없었다.


그나마 혜빈 양씨가 있다하나 그녀는 늦게 입궁한데다 후궁인 탓에 정치적 발언권이 거의 없었다. 아무도 보호해 줄 사람이 없었던 단종은 즉위기간 중 모든 정사를 의정부와 육조가 도맡아 했고, 왕은 단지 형식적인 결재만 할 수 밖에 없었다.

 

인사에 있어서도 일부 대신들이 대상자 이름에 황색 점을 찍어 올려 낙점하는 황표정사(黃標政事) 제도를 시행했다. 이때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 등이 모든 권력을 좌지우지 하면서, 단종의 왕숙부(王叔父)인 수양안평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illustrator / 심규태

수양은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목으로 정치권에 뛰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대신들이 안평대군 주변에 모여들자 그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자신의 수하인 한명회권람 등의 계책에 따라 김종서를 제거하고, 황보인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을 대궐로 불러들여 죽였다.


이날의 계유정란으로 고명대신들이 거의 참살당하고 안평대군이 사사되자, 조정은 수양대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모든 조정실권이 수양에 의해 장악된 가운데  1454년 정월 단종은 왕비를 맞이했다.



하지만  이듬해 수양대군이 자기수하의 신하들과 의논하여 동생 금성대군 등 왕의 측근들을 유배시켰다. 바람 앞에 촛불과 다름없던 단종은 상왕으로 물러나 창덕궁 동쪽 수강궁(壽康宮)으로 옮겨갔다. 1456년(세조 2) 상왕 복위사건이 일어나며 성삼문, 박팽년 등의 집현전 학사와 무신이었던 유응부 등 사육신(死六臣)이 참형됐다.


그러나 유독 신숙주세종의 밀지를 따르지 않고 세조 왕위찬탈에 적극 가담해 후세 유가(儒家)들로 부터 비판과 폄하의 대상이 되었다. 속설에는 숙주나물 명칭이 신숙주에서 따온 것이라 하는데, 여름철 쉽게 상하는 숙주나물을 신숙주의 변절에 빗대 [숙주]로 부른다는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이듬해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면서 영월의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그런데 숙부인 금성대군이 유배지서 단종 복위를 꾀하다 발각됨으로서 그는 다시 서인으로 강봉되고 한 달 뒤에 17세의 어린나이로 사사(賜死)되었다.


이러한 단종이었기에 후사가 있을 리 없었지만, 어찌 보면 자식이 없었던 것이 차라리 천만다행으로 여겨진다. 세월이 묘약이라 했던가. 가련한 폐왕은 1681년(숙종 7)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숙종 24) 비로소 단종(端宗)이라는 묘호가 추존되어 강원도 영월 장릉에 홀로 잠들어 있다.


단출한 단종 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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