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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Oct 04. 2015

조선왕과의 만남(12)

단종릉_02


제6대 단종 1441~1457 (17세) / 재위 1452.05 (12세)~1455.05 (15세) 3년 2개월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장릉(莊陵) 사적 제196호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133-1


1457년(세조 3) 청령포에 2개월 남짓 기거하던 여름, 사나흘 간 장대비가 쏟아지던 홍수로 인해 청령포가 범람하자 폐왕은 영월 동헌(東軒)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겨 지냈다. [관풍헌]은 태조 1년에 건립된 문화재로 단종이 사사된 역사적 장소이기에 애달픈 사연을 둘러보게 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유배생활은 [청령포]보다 감시가 적어 비교적 거처하기에 자유로웠다. 그는 객사(客舍) 옆 우뚝 솟아있는 자규루(子規樓)에 올라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살피기도 하고, 저녁노을이 물들 때면 왕비가 있는 한양을 바라보며 애절한 "자규시"를 읊기도 했는데, 이때 영월의 늙은 촌신(村臣) 엄흥도가 답시를 지어 단종에게 받쳤다 한다.


관풍헌(觀風軒)

그해 음력 10월 24일 폐왕은 금부도사 왕방연이 가져온 사약을 받고 관풍헌에서 숨진 후에 영월 동강에 버려지게 되었다. 1791년(정조 15) 이명식이 쓴 관풍헌기(觀風軒記)의 애닮은 사연을 옮겨본다.『관풍헌은 단종께서 영월로 옮겨올 때에 기거하신 침실이었다.



상왕께서 매양 자규루에 올라 밤이면 사람으로 하여금 옥피리를 불게 했으니, 그 소리가 멀리 마을까지 들렸다. 매일 새벽 대청에 나와 곤룡포를 입고 자리에 않으시니 이를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항상 객상에 계시니 마을에서 읍내로 들어오는 백성들이 누대(樓臺) 아래에 와서 배알했다』라고 하였다.


관풍헌 자규루

단종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들이 있다. [세조실록]에는 금성대군의 비보(悲報)를 듣고 스스로 목매 자결한 것으로 기록돼 있으나, 중종 단종의 무덤을 찾지 못해 애썼던 기록을 참고하여 많은 역사서에는 사사(賜死)된 것으로 확증하고 있다.


하지만 병자록(丙子錄)에는 금부도사가 사약을 받들지 못하고 망설이자, 관노 복득(福得)이 활시위로 목을 졸라 살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엄흥도는 주변의 눈을 피해 자주 청령포를 찾아, 어린 임금의 안위를 걱정하며 눈물을 흘렸던 영월의 호장(戶長)이었다.



단종의 유해(遺骸)가 동강을 떠돌고 있을 때 엄흥도가 시신을 장사지내려 하자, 주위사람들은 후환을 두려워하며 간곡히 말렸다. 그러나 엄흥도는 "옳은 일을 하다 화를 입는 것은 달게 받겠다."며 그의 아들 3형제와 함께 어둠을 틈타 어린 왕의 시신을 염습(殮襲)하여 자신의 선산으로 향했다.


눈이 쌓여있어서 모실 곳을 찾기 어려워 시신을 지게에 지고 눈 속에서 헤매고 있는데 갑자기 노루가 달아났다. 주위를 살펴보니 노루가 앉았던 자리에 눈이 녹아있어 엄흥도는 그 자리에서 잠시 쉬었다.



잠시 후에 다시 지게를 지고 일어나려 하니 관을 얹은 지게가 움직이지 않자, 그곳을 명당으로 여겨 시신을 밀장(密葬)하고 장사를 지낸 후 그날 밤 엄흥도는 식구들을 데리고 몸을 피해 종적을 감추었다. 그 뒤 60여 년이 지난 1516년(중종 11) 노산묘를 찾으라는 왕명이 내렸으나, 엄흥도 일가족이 자취를 감춘 후라 묘를 찾을 길이 막연했다.



중종 36년 영월 신임군수 박충원의 현몽(賢夢)에 따라 고노(古老) 호장 엄주를 비롯한 고을 양인과 관노 등의 증언을 참고로 묘를 찾아 봉분을 정비하였다. 영월에 남아있는 야사(野史)를 좀 더 소개해 본다.


엄흥도의 단종시신 밀장 후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 영월에는 7명의 부사가 부임하는 족족 죽어나갔다. 그것도 부임하는 즉시 그날 밤에 죽어 이튿날 아침에 시체로 발견되는 것이었다. 고을은 공포에 쌓이고 요담(妖談)이 흉흉해 모든 사람이 이곳에 부임하기를 꺼렸다.



1541년(중종 36) 박충원이 초연히 용기를 내어 영월로 부임함에 군리(群吏)들이 피신할 것을 권했지만, 죽고사는 것은 천명(天命)이라 하며 물러나지 않았다. 초사흗날 밤이 되자 박충원은 마루와 방에 촛불을 밝혀 놓고 마루에 앉아 눈을 감고 있으니, 소름이 돋는 괴상한 소리와 함께 단종의 혼령이 나타났다.



용상(牀) 위에 혼령은 산속에서 눈비를 그대로 맞고 있다하며 캄캄한 산속으로 향하였는데, 영월군수는 가녀린 초승달 아래 키만큼 자란 풀을 제치며 그 뒤를 따라갔다. 혼령은 어느 곳에 이르더니 박충원 돌아보고 사라졌고, 어두운 산속에서 혼비백산하여 관아로 내달려온 군수는 돌아온 길을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



이튿날 박충원 양인(良人), 관노들과 함께 지난밤 갔었던 산으로 향했다. 산속길이 없어 전날 밤길을 찾기 힘들었으나 풀이 꺾여 있는 곳을 어렵게 찾아내어 혼령이 멈추어 섰던 단종의 암장(暗葬) 터를 찾을 수 있었다. 박충원은 그곳에 봉분을 정성스럽게 쌓았으며, 이후로는 영월군수가 변을 당하는 일이 없었다 한다.



1974년 낙촌 박충원의 후손들이 단종 묘를 찾아냈던 사연을 기록한 낙촌기적비(駱村紀績碑)장릉 경내에 건립하였다. 영월 장릉을 둘러보며 당시 중종은 왜 단종의 묘를 찾으려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종세조에서 연산군에 이르는 선왕대의 끊이지 않던 왕실의 흉사가 단종의 억울한 죽음에 따른 인과응보에 있음을 직시했던 것 같다. 당시 단종 폐비 송씨의 춘추가 77세였으니, 그녀 살아생전에 단종의 시신을 찾아 고혼을 추스르고 모진 한 여인의 또 다른 원혼(魂)이 재연되지 않도록 해, 왕실의 평온을 바랬던 것으로 추측해 본다.


박충원 낙촌비각

숙종 24년 능호를 장릉(莊陵)으로 격상시켜 부르게 함으로서 단종승하 후 241년 만에 왕실 정례를 되찾게 됐다. 당시 문종세조 가운데 단종의 신위(神位)자리를 만들려고 세조이하, 왕 위패를 한 칸씩 물리고 단종 신주(神主)를 봉안하자 세조의 위패가 갑자기 돌아섰다 한다.


그것을 지켜본 숙종이 "할아버지 왜 이신벌군(以臣伐君: 신하로서 임금을 침) 하랍디까?" 하자, 세조위패가 진땀을 흘렸다는 야사가 전해지고 있다. 장릉 경내에는 엄흥도의 충절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영조 2년 세운 정려각(旌閭閣) 있다.


엄흥도 정려각

현종 10년 송시열의 건의로 엄흥도의 후손들이 등용되었고, 영조 34년에는 종2품 공조참판으로 추증하고 친히 제문을 내려 사육신과 함께 모시도록 했다. 당시 문종의 고명을 받든 대신(大臣)의 섭정이 옳았는지, 피바람을 뿌리며 자리잡은 조선의 흔들리는 왕권사수가 옳았는지는,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많은 논란이 있으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당시의 복잡한 정황(政況)을 접어두고라도 권력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왕위에 올라, 항거할 힘조차 없었던 어린나이로 애처롭게 잠들어있을 초라한 장릉의 고혼(孤魂)을 마주해본다.


영월 단종 능

조선초기에 발생한 잔혹하고 비정한 혈육참사가 숙부였던 수양(首陽)에 의해 또 다시 왕권강화라는 명분으로 재연됐던 안타까운 역사에 잠시 숙연함이 느껴질 따름이다.  


"오랜 세월, 애통한 사연을 담고 있는 청령포의 노송(老松)과 함께 전하의 시린 아픔을 오래도록 간직하겠나이다."  


- 庚寅(2010)年 십일월 초아흐렛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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