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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Oct 05. 2015

조선왕과의 만남(13)

단종비릉


제6대 단종비 정순왕후 1440~1521 (82세)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사릉(思陵) 사적 제 209호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 산65-1


지아비를 잃은 한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비운의 왕비가 잠들어있는 사릉은 천마산으로 부터 내려오는 작은 산들이 소나무 숲을 이루고 있어 적송골이라 불려 전해지고 있다. 정순왕후는 판돈녕부사 송현수 여식이며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공손하고 검소한 성품으로, 단종 2년(1454년) 당시 살벌한 분위기에서 15세 나이로 가례를 올리고 왕비에 책봉되었다. 1455년 수양대군의 왕위찬탈로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자 의덕왕대비로 봉해졌으나, 이들 부부는 동거기간이 1년도 되질 않아 소생이 없었다.



이듬해 사육신(死六臣)의 단종 복위사건으로 단종부부는 더욱 불안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때 조신(朝臣) 중에 상왕이 이 사건에 관련되었으므로 한양에서 내쫓자는 주청이 있었다.


1457(세조 3)년 상왕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자, 왕대비도 군부인으로 강등되었다. 그녀는 1년간 왕비에 머물렀는데 불안했던 혼인(婚姻) 생활마저도 3년 만에 파경을 맞고 말았다.



18세 소녀는 남편과 부모가 함께 살해되는 비운을 겪으며, 한 순간에 과부인 동시에 고아가 되고 말았다. 세조 3년 영월로 귀양 가는 열일곱 소년왕의 뒷모습을 마지막 바라보던 열여덟 소녀왕비는 청계천 왕심평교(旺尋坪橋)까지 따라와 영원한 이별을 하였다. 이 다리는 “이별한 임이 영원히 건너간 다리”라 하여 후세사람들에 의해 영도교(永渡橋)로 불러지고 있다.



청계천 복원이후 청계7가와 청계8가 사이에 있는 [영도교] 아래에는 550여년 전의 슬픈 이별을 달래기 위해 영월군의 동강에서 한천석이라는 바위를 갖다 놓을 예정이라 한다. 궁궐에서 쫓겨난 정순왕후는 소복차림으로 흥인지문 밖 연미정동(燕尾亭洞) 동망봉 기슭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그곳은 지금의 동대문구 숭인동에 있는 청룡사 여승방(女僧房) 정업원 터이며 단종의 죽음을 전해들은 폐비가 뒷산에 아침저녁으로 올라가 남편의 유배지인 동쪽 영월을 향해 통곡했다 하여 불리어지는 동망봉(東望峰)이 있다.



당시 곡소리가 산 아랫마을까지 들리면 온 마을 여인네들이 땅 한번 치고, 가슴 한 번을 치며 함께 통곡했다 한다. 애달픈 여인이 동망봉에 올라 동쪽을 바라볼 때 쯤, 영월 청령포의 어린 남편은 노산대에 머물며 한양을 향해 마주보고 있었을 것이다. 가련한 부부는 그토록 먼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 보면서 그렇게 하염없이 그리워했다.



폐비 송씨는 머리를 깎고 함께 살던 세 명의 시녀 들이 동냥해오는 것으로 끼니를 이었다.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영도교 인근에 부녀들만이 드나드는 채소시장이 있었다고 전한다. 송씨의 비참한 생활을 동정한 여인네들이 매 끼니마다 채소를 가져다주려고 초막 사리문 앞에 긴 행렬을 이루었다.


illustrator / 이철원

소문을 들은 세조는 정업원 근처에 부녀자들이 접근하는 것을 금하였다. 그러자 여인들은 지혜를 모아 초막 인근에 금남(男)시장인 여인시장 를 열어 관리들의 감시를 피해가며 북적거리는 틈을 타 곡식과 채소를 가져다준 것이 채소시장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한다.


한편 세조(世祖)는 그의 가족에게 액운이 끊이지 않자 참회하는 마음으로 비참한 생활을 영위해가던 폐비의 안부를 물어 정업원 근처에 영빈전을 짓고 궁핍을 면할 식량을 내렸으나, 정순왕후는 이를 끝내 거부하고는 자주색 염색 업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녀는 비단에 자줏물을 들여 댕기와 저고리 깃, 옷고름 등을 만들어 내다 팔며, 이가 바스러지도록 원한을 곱씹으며 팔십 평생을 보냈다. 정순왕후는 18세 홀로돼, 소생 없이 평범한 서인으로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살았던 골짜기는 지금도 "자줏골"이라 불리고 있다.


단종사후 흰옷과 소찬으로 평생을 보내며 7대에 걸친 왕대를 살았던 그녀는 중종 16년까지 82세의 긴 삶을 살면서,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예종이 약관의 나이로 요절하고, 그 증손인 연산군이 패악 끝에 폐위되는 인과응보(因果應報)란 하늘의 뜻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죽어서는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의 시가인 정씨가문 묘역에 묻혔다가 177년이 지난 1698년(숙종 24) 노산군단종으로 복위되면서 이듬해 정순왕후(定順王后) 추봉되고 종묘에 신위를 올리며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정하였다.



1848년(헌종 14) 사릉의 상설물을 단종장릉과 같게 조성하였다. 가을 햇살아래 가련한 여인을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들의 푸르름이 왠지 시리도록 저리게 스며든다.  - 庚寅年 시월 초엿샛날       

   

남양주 사릉(思陵)




[정순왕후 문화유적지 탐방후기]


2011년 03월 11일 서울 종로구 숭인동 언덕길의 청룡사 바로 옆에 [정업원 터]를 둘러보았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정업원은 원래 궁 안 동북쪽에 있던 법당으로 내불당이라 불렀으나, 숭유억불을 따르던 유학자들의 혁파대상이었기에 유생들의 반발로 신(身), 구(口), 의(意)의 삼업(三業)을 깨끗이 한다는 의미로 정업원(淨業院)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정업원은 일찍이 군왕과 사별하거나 자식이 없이 궁을 나오게 된 후궁 등 이러저러한 쓸쓸한 사연을 간직한 조선왕실의 여인들이 비구니가 되어 불가에 의지하면서 여생을 보낸 곳이다. 정업원은 세종 때 혁파되었다가 불자였던 세조에 의해 복원됐으며, 연산군 때 다시 혁파되고 명종 때 후궁들의 별처로 삼는다는 명목으로 명종 모후인 문정왕후에 의해 다시 복원되었다.


선조는 몇 차례의 혁파건의를 물리치고 존속시켰으나 광해군의 총애를 받던 김개시인조반정 소식을 듣고 민가에 숨었다가 반정군에 잡혀 참수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정업원도 폐쇄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별개로 숭인동에 있는 [정업원 터]는 궁궐에서 쫓겨난 단종 비 송씨가 여생을 보낸 곳으로, 이곳에는 단종이 유배된 후 날마다 뒷산에 올라 단종이 머물던 영월 쪽을 바라보며 울었다는 동망봉(東望峰)이 있다.


동망봉 정자

1771년(영조 47) 영조가 잠시 창덕궁에 나왔다가 단종비의 애달픈 사연을 전해 듣고는 절까지 행차하여, 그곳이 “옛날 정순왕후가 머물던 터”라 하여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각과 친필 비석을 세웠다.


비각 현판에는 “뒷 녘 바위산 앞에 솟은 동망봉이여 영원하라”는 “전봉후암어천만년(前峯後巖於千萬年)” 친필을 남기고, 또한 절 뒤 봉우리에는 동망봉(東望峰)이란 친필 표석을 세웠는데 이때부터 이곳의 절 이름을 정업원이라 불렀다 한다.



이곳은 당초 922년(태조 5) 고려 태조 왕건의 명으로 창건한 비구니 사찰이며, 고려건국을 예언했던 도선대사가 한양의 지기(地氣)를 억누르기 위해 지어진 절이었다. 순조 조에 화재로 소실돼 중수했고, 1823년(순조 23) 순원왕후의 병세가 깊어지자 부원군 김조순이 이곳에서 기도를 올렸다.


이후 왕비의 병이 낫자 김조순은 절에 보답코자 사찰명칭을 청룡사로 바꾸었다 한다. 일설에 의하면 청룡사 안의 우화루는 귀양길에 나선 단종송씨가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낸 곳이라고 하는데, ‘꽃이 비처럼 흩날리듯 쏟아졌다’는 뜻의 우화루(雨花樓)단종송씨가 영원히 이별한 장소라는 의미로 영리정(永離亭)으로 불렀다고도 한다.


청룡사 우화루(雨花樓)

청룡사 담장에서 바라보이는 동망봉은 우측 언덕을 따라 낙산 길 우측으로 15여분 오르면 나타나는데, 실제의 동망봉은 일제강점기에 헬기장으로 사용하려했던 일본인들에 의해 봉우리가 깎여나갔으며, 이곳 돌산을 채석장으로 사용해 일부 산이 깎여나감으로서 지금은 영조 친필의 [동망봉 표석]을 찾아볼 수 없다.


동망봉 남쪽으로 비스듬히 내려가는 능선은 모두 근린공원이 조성돼 있는데 공원 동쪽에는 새롭게 세워진 팔각정자 동망정(望亭)이 영월을 향해 있다. 내려가는 길에 바라본 동망봉 서편 바위는 채석장으로 깎여버린 절벽이 남아있어, 인간들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 흉물스러움을 더하고 있다.


영조의 친필표석 자리에 세워진 동망봉 표석

정순왕후는 생계를 위해 비단에 자줏물을 들여 댕기와 저고리 깃, 옷고름 등을 만들어 내다 팔았는데, 자주염색을 했던 자주샘물이 청룡사에서 동망봉으로 가는 길에 남아있다. 샘물 좌측 암벽에는 자지동천(紫芝洞泉)이란 바위글씨가 새겨져있는데, 바위 밑에 흐르던 샘물은 말라버리고 그 흔적만 남아있다.


자지동천(紫芝洞泉)

자지동천의 샘물을 이용해 염색을 하고 그 옆 바위에 펼쳐 말렸다고 하는데 이후에 바위는 “자주바위”, 샘물은 “자주우물”이라 불리었고, 그 골짜기를 지금도 자주골이라 부르고 있다. 당시 바위 밑에 흐르던 샘물은 말라 버리고 그 흔적만 남아있다.

 

자주우물

동망봉을 내려와 약 3Km정도 거리에 정순왕후단종과 영원히 이별한 [영도교]가 있고 그 근처에 [여인시장터 표지석]이 있는데, 종로구 숭인동 옛 숭신초등학교 주변이 당시 야채를 팔던 금남(禁男) 시장이었다고 친절한 여성 문화유산 해설사가 귀띔해 준다.      


여인시장 터 표지석


청계7가 영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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