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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Oct 13. 2015

조선왕과의 만남(14)

세조릉_01


제7대 세조 1417~1468 (52세) / 재위 1455.06 (39세)~1468.09 (52세) 13년 3개월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광릉(光陵) 사적 제197호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산100-1 


광릉은 한양에서 다소 떨어져있는 주엽산 아래 북좌남향(子座午向)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수목원이 있는 광릉 숲은 세조의 능이 조영되면서 주변 숲을 능림(陵林)으로 지정하여 조선시대 440여 년 동안 풀 한포기 뽑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보존함으로써 울창함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20여 종의 희귀 천연기념물이 서식하며 천연림을 비롯한 수천종의 동식물이 자생하고 있어 생태계의 원형을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 왕릉인근 마을사람들은 왕릉을 관리하는 책무가 부여되었다. 


수십 명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거주민들이 왕릉 수호군이 되어 조를 짜 매일 왕릉주변을 순찰했다. 왕릉을 둘러싼 산림의 병충해가 심각하면 인근 주민들이 능 부근 20리 까지 직접 벌레를 잡았는데, 이를 총괄 감독하는 관리가 종9품 능참봉이었다. 



광릉은 당초부터 세조가 생전에 마련했던 수릉(壽陵)이 아니었다. 악성종기로 인해 건강이 악화됨을 깨닫던 세조는 왕위를 물려준 다음날 승하하였다. 이에 조정은 논의 끝에 주변산세가 빼어나고 풍수상 최고의 길지라는 정흠지(鄭欽之)의 선산을 채택하였다. 


조선시대의 왕릉을 살펴보면, 당시 능택지에 관여했던 이들은 극락과 지옥을 오가며, 채택되면 승승장구 출세가 보장되고  흠결이 발견되면 죽음을 각오해야했다. 이러다보니 풍수에 관여하는 자들은 명문대가의 검증된 문중 선산을 강탈하도록 왕실을 은근히 부추겨 책임을 모면하려 하였다. 


광릉입구

정흠지의 아들 정창손은 세조 때 영의정을 비롯해 삼정승을 두루 거친 인물이었지만, 여덟 기의 무덤이 있던 선산을 송두리째 왕실에 헌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연유로 조영된 광릉은 같은 능역안에 왕과 왕비 능을 각각 다른 언덕에 단릉처럼 조성하고, 두 능 중간지점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운 조선 최초에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다. 


왕위를 찬탈하고 수많은 신하를 죽인 피의 군주인 동시에, 부왕인 세종의 위업을 계승한 치적의 군주였던 양면의 이미지가 광릉의 웅장함에 녹아있는 듯하다. 능은 세조의 유언에 따라 봉분 내부에 돌방을 만들지 않고 회격(灰隔)으로 처리하였다. 


동원이강릉

봉분 둘레에는 병풍석을 없앴으며, 능 아래 구역에는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르는 참도(參道)가 생략돼 있다. 이렇게 간소하게 개혁된 상설제도는 이후 왕릉공사의 부역 인원을 반으로 줄이고 나라살림을 절감하는 왕릉조성의 모범이 됐다. 


광릉은 조선전기 왕실조례의 일대 개혁을 이루며 왕릉제도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수양대군은 1417년 세종과 세종비 심씨 사이에서 문종에 이어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만일 장남으로 태어났더라면 조선왕조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일으킨 주인공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병풍석이 없는 세조 능

수양은 어릴 때부터 자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학문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병약했던 형 문종과는 달리 무예에 능하고 병서에 밝았다. 세종은 일찍이 병약한 문종과 어린 단종을 보면서 수양대군의 존재를 걱정했다. 원래 수양대군은 진양대군이라 칭하다가 1445년(세종 27) 수양대군으로 바꾸었다.    


세종이 수양(首陽)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아마도 수양산에서 절개를 지키다 굶어 죽은 백이, 숙제처럼 절개를 지키라는 의미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종은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성왕을 성군으로 만든 주나라의 주공(周公)처럼 되길 바랐지만 수양의 속마음은 달랐다.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난 문종은 어린 아들을  원로대신 김종서와 황보인에게 부탁했고 이러한 구도는 수양과 안평 등 종친세력의 반발을 불러왔다. 단종 즉위 후 정국은 수양파와 문종의 고명을 받든 황보인 및 김종서파로 나뉘게 되었다.


이때 왕족 대표로서 자신이 단종을 최측근에서 모실 수 있는 보호자라 강변하며, 무인세력을 휘하에 두고 야망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결국 1453년 (단종 1)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인지, 한명회 등과 공모하여 김종서를 격살한 뒤 대신들을 궐로 불러들여 죽이고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킨 후, 스스로 영의정이 되어 군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는 자신이 세운 공을 주공(周公)에 비유하여 집현전 학사들에게 찬양교서를 짓게 했는데, 이때  학사들은 모두 도망가고 유성원만이 남아 있다가 협박 속에 초안을 작성했다 한다. 1455년 수양은 강제적으로 조카 단종을 상왕으로 올려 왕위에서 밀어냄으로써 조선의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였다. 


형식적으로는 양위였지만 숙부의 위세에 눌려 왕위를 뺏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때 왕의 옥새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 이가 성삼문 이었는데, 양위식을 담당한 성삼문이 옥새를 부여안고 대성통곡을 하자 세조는 성삼문을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고 전해진다.  



세조는 왕위에 오른 후 단종을 상왕으로 추대하고 금성대군 집에 살게 했으니, 이를 두고 가택연금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때 단종의 거처에는 군사를 배치하여 주야로 경계와 감시를 하도록 했다. 왕위에 오른 세조는 재위기간 중에도 수많은 난관에 봉착하였다. 


이른바 사육신(死六臣) 사건을 비롯해 금성대군이 주동한 단종 복위사건 등 즉위 초반에는 불안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난관들은 대체로 그의 정통성을 문제 삼아 일어난 것들 이었다. 왕위찬탈자라는 명분상 약점은 언제든지 단종의 복위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특히 집현전 출신 젊은 학자들이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이들은 혈기왕성한 유학자들답게 명분을 중히 여겼다. 하지만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정국 주도권이 세조의 측근 공신들에게 넘어가면서 소외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집현전 학사출신 관료들과 무인들은 명나라 사신 환송연 때 세조 부자(父子)를 제거하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 했다. 중심인물은 성삼문과 박팽년이었으나 이런 거사계획은 정창손의 사위 김질에 밀고로 발각되고 말았다. 



당시 혹독한 문초 중에도 성삼문은 "하늘에 두 해가 없듯이, 백성에겐 두 임금이 없다"라 고변하였으며 사육신 모두는 잔학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죽음을 택하였다. 집현전이 폐지된 이후 사육신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생육신(生六臣) 때문이었다. 


사육신은 죽었지만 생육신 중 남효온이 "사육신전"을 세상에 유포시킴으로서 이들의 이름이 후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계유정난 후 세조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은둔으로써 항거했던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등 선비들은 한평생 벼슬하지 않고 단종에 대한 절의(節義)를 지켰다.     


 

그 이후 금성대군은 유배지에서 순흥부사 이보흠을 포섭해 단종을 복위시키려 했으나, 이보흠의 노비인 이동이 안동부사에게 밀고함으로서 좌절되고 말았다. 세조는 금성대군에게 사약을 내리고 단종에게도 사약을 내렸다. 순흥부는 이후로 반역의 고을이 되어 토박이 향리들은 거의가 죽임을 면치 못하였으며 단종이 복위되던 숙종 때까지 순흥부(경북 영주)는 쑥대밭으로 남아 있었다. 


계유정란은 현대사의 12.12사태와 흡사하다. 1453년 음력 10월은 양력12월 초순경으로, 1979년 12월 육참 정승화 기습과 김종서 격살이 유사하며, 수양이 사병과 함께 임금 처소로 들이닥쳐 단종을 위협하고 왕의 명패를 받아 대신들을 불러들인 법적근거로 삼은 것 또한, 강압으로 대통령 사후결재를 받은 것과 같다.    



혼절한 김종서가 깨어나 상처를 싸매며 부인의 가마를 타고 대궐로 들어가려하니 남대문과 서소문, 서대문은 이미 한명회의 심복들이 지키고 있어 사태를 역전시킬 수 없었던 것도, 앞서 병력을 동원해 육본과 국방부를 선점한 것과 동일하다. 순흥부(順興府)가 쑥대밭이 됐던 점도 5.18때 광주와 닮아있다. 


의롭지 못한 정권장악으로 권좌에 오른 전두환과 세조는 도덕적결함을 극복코자 민생안정에 힘썼는데 그들에 대한 평가는 부정과 긍정으로 나뉘어 영원히 역사와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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