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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Oct 16. 2015

조선왕과의 만남(16)

예종릉_01


제8대 예종 1450~1469 (20세) / 재위 1468.09 (19세)~1469.11 (20세) 1년 2개월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창릉(昌陵) 사적 제198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6 (서오릉 내) 


조선초기 어린 단종으로 인해 풍전등화로 실추되던 왕권을 되살리고, 부국강병을 재건코자 했던 세조(世祖)는 많은 업적을 쌓고 국가기반을 반석위에 올리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하지만 세조는 자식의 박복함을 통탄하며 자신의 업보에 고뇌했다. 


아비의 과보(果報)에 대가로 요절한 자식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최고의 명당을 직접 택한 곳이 서오릉(西五陵)이었다. 서오릉은 야트막한 효경산(孝敬山) 자락에 위치해 있다. 예종 형인 덕종의 [경릉]이 서오릉 중심에 명당의 뿌리를 내리고 있고, 서북쪽 기슭에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창릉]이 동원이강을 이루고 있다.


동원이강 창릉(昌陵)

조선왕릉 중 동원이강(同原異岡) 형식의 능역 조성은 풍수에 대가였던 세조의 유언에 따라 조성됐던 것으로 짐작해본다. 그 이유는 실제 왕보다 왕비의 죽음이 대부분 후일에 발생하였음으로, 후대의 왕이 선왕(先王) 옆에 왕대비의 능을 조성하면서 [동원이강]의 형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동원이강을 적용했던 최초의 왕릉은 [세조 능]으로 연대를 추적해볼 때, 세조비(정희왕후), 예종비(안순왕후), 추존 덕종비(소혜왕후) 능은 각각 성종 14년(1483), 연산군 4년(1498), 연산군 10년(1504)에 조성되었다. 그리고 문종비(현덕왕후)는 중종 8년(1513)에 천장하면서 [동원이강]을 따랐다. 



예종 때 여주로 천장한 세종 영릉은 당초 합장릉의 형식을 그대로 보존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동원이강릉세조에서 시작해 중종까지 이어졌지만, 중종의 제2계비였던 문정왕후가 서삼릉(西三陵)에 있던 남편을 선릉 능역으로 천장함으로서, 이후 [동원이강]의 능 배열이 잠시 사라지게 되었다. 


창릉은 [서오릉] 경내에 왕릉으로 조영된 최초의 능으로, 세조의 광릉 조영을 본받아 병풍석을 세우지 않고 봉분주위에 난간석만 두르고 있다. 무른 석재를 사용했던 까닭인지 다른 왕릉에 비해 풍화가 심해 석물의 상태가 양호하지 못한 창릉은 아비 세조의 과보(果報) 탓을 더해 왠지 모를 허전함이 남아있는 듯하다.



예종세조정희왕후 윤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 해양군(海陽君)에 봉해졌다가 1457년(세조3) 형 의경세자가 횡사하자, 8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적장자 승계의 원칙에 따른다면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 맏아들인 원손 월산군(月山君)이 세손에 책봉되어야 하는 것이 정례였지만, 세조는 그리하지 않았다. 


불과 4살이란 어린 나이로 세손에 머무를 경우, 왕위를 둘러싼 혼란을 그 스스로가 경험해 봤기 때문에 둘째 아들인 해양대군 세자로 책봉하였다. 이때 세조의 나이 41세였으므로, 자신의 통치기간 중 왕권을 강화해가면서 세자로 하여금 왕위계승 수업을 잘 받도록 후원하면 후사는 걱정이 없을 것으로 굳게 믿었을 것이다.



세조 사후에 예종이 즉위하는 과정을 보면, 당시 왕실은 차기 왕위계승과 관련한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의경세자는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후에 18세로 왕세자에 책봉됐으나 오래지 않아 병사하였다. 이를 두고 당시 사람들은 세조가 어린 조카를 죽인 죄 값을 받은 것이라 수군거렸다. 


형의 죽음으로 세자에 책봉된 예종은 세조 14년(1468년) 9월 세조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수강궁(壽康宮)에서 19세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예종은 아직 20세가 되지 않았다하여, 생모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음으로서 곧바로 왕권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또한 세조 조에 막강한 권력을 형성한 한명회 등 훈구대신의 정치적 간섭도 만만치 않았다. 


   

세조는 죽기 전에 예종의 원만한 정사운영을 위해 신하들에 의한 섭정이 가능토록 원상제도(院相制度)를 설치하였다. 이는 왕이 지명한 원로대신들이 승정원에 상시 출근하여 모든 국정을 상의해서 서무를 의결하고 군왕은 형식적인 결재만 하는 제도였다. 


세조가 [원상]으로 지목한 세 중신은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 등 측근세력들이었다. 예종은 짧은 치세동안 남이(南怡)의 옥사처리를 통해 왕권강화를 시도해 보려했었다. 그러나 대비의 수렴청정과 원상(院相)으로 확고한 세력기반을 갖춘 훈구대신들의 장벽 속에서 별다른 왕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재위 14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illustrator / 전승훈

남이옥사(1468년)의 발단은 신숙주한명회로 대표되는 세조 조(朝) 훈신들과 이시애 난 이후 새로 등장한 무인들 간에 정치적인 반목에서 비롯되었다. 예종의 즉위와 더불어 분경(奔競) 금지법을 통해 훈신들에 대한 정치적 압력을 엄격히 실시하는 과정에서, 신흥 [무인세력]에 대한 보수 [훈신세력]의 반격이 일어났다. 


결국은 이 사건으로 남이를 비롯한 강순 등 이시애 난 평정 후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책봉됐던 무인들이 옥사에 연루돼 처형되면서, 세조 조 훈신(勳舊)들의 정치적 승리로 끝을 맺었다. 옥사 이후 정치일선에서 물러난 한명회가 영의정으로 복귀한 것도 이런 사실을 잘 뒷받침하고 있다.  


남이옥사

결국 예종은 즉위 후 의욕적인 왕권강화책으로 무소불위 권력을 가졌던 훈신세력들을 견제하려 했지만, 그들 세력의 깊은 벽을 뚫지 못하고 오히려 이들에게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던 젊은 장군 남이가 옥사를 당하는 결과를 빗고 말았다.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무장의 기개만으로는 정치 9단인 훈구대신들을 제압할 수 없었다. 


남이(南怡)는 태종의 외손자로 어릴 적부터 용맹이 뛰어났으며, 18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다.『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어졌네.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평정 못한다면, 뒷세상에 그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오』라는  남이 시는 광해군 6년에 이수광이 편찬한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전해진다.   



남이는 세조 13년 함경도에서 지방차별에 불만을 품은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대장으로 난을 진압해 일등공신에 책봉되고 파죽지세로 승진하여, 28세에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거쳐 병조판서 자리에 올랐다. 당시 정국은 한명회로 대표되는 원로 훈구파 및 구성군으로 대표되는 [종친세력]과 남이장군과 같은 신흥 [무장세력] 간에 권력투쟁의 양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세조는 이들 정치세력간의 화해와 균형을 유지시키고자 했지만 이를 완전히 수습하지 못한 채 사망하여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원로대신들은 구성군, 남이, 강순 등 새로운 주류세력으로 떠오른 인물들의 견제에 나섰다. 특히 젊은 나이로 병권을 장악한 남이가 우선제거 대상이었다.


illustrator / 최달수

예종세조의 총애를 받던 남이장군에게 부담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그들은 남이가 병조판서를 수행하기에 마땅치 않다고 탄핵하여 병조판서를 해임시키고 한직인 겸사복장으로 밀어냈다. 좌천된 남이는 어느 날 궐내에서 숙직을 하던 중 혜성이 나타나자 "혜성이 나타난 것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나타나게 하는 징조다"라 말했다. 


이를 엿들은 병조참지 유자광이 역모를 꾀한다고 모함하여 국문 끝에 처형돼, 28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 사건을 남이의 억울한 옥사라고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은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예종실록"에는 왕이 분경(奔競)을 엄히 단속할 때 남이가 모사를 꾸며 한명회를 제거하려 하였다고 기록하여 [훈구파]를 두둔하고 있다. 


illustrator / 장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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