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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Oct 16. 2015

조선왕과의 만남(17)

예종릉_02


제8대 예종 1450~1469 (20세) / 재위 1468.09 (19세)~1469.11 (20세) 1년 2개월



▐  창릉(昌陵) 사적 제198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6 (서오릉 내)


예종은 부왕의 죽음에 따른 정치적 공백을 극복코자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즉위와 더불어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선전관을 재상집에 보내 불시에 분경(奔競: 관직을 부탁하는 인사청탁)을 적발토록 하는 것이었다.


1468년 10월 예종은 삼정승과 이조 및 병조판서와 종친까지 불시단속을 실시하여 왕의 사촌인 구성군을 비롯해 원로대신 신숙주와 우의정 김질 등의 집에서 인사청탁을 하던 분경범들을 추포하였다. 그러나 예종은 정작 [분경]의 당사자들은 처벌하지 못했다.



예종은 이들을 처벌하기는커녕 대간(臺諫)이 이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다며 사헌부 관리들을 질책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그는 짧은 재위기간 중 정사를 보살피는 여가에 틈틈이 옛정치의 잘잘못을 관찰하여 손수 역대세기(歷代世紀)를 지었다.


또한 문신에게 명해 선왕조의 내우외환(內憂外患) 전말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국조무정보감"을 편찬케 했다. 이때 예종은 가위에 눌려 죽은 맏형 [의경세자]와 피부병에 몸서리치며 괴로워했던 부왕 [세조]를 의식해 정사와 관련 없는 이러한 일들을 추진하면서 인과응보의 현실을 직시했을 것이다.



그는 짧은 재위기간 중에 부왕의 능택지에 지극정성을 기울여 광릉을 마련하고, 세종당시 풍수가 최양선에 의해 흉지로 지목되어 세조대까지 논란이 계속되었던 헌릉 내 세종 능을 1469년 8월 하늘아래 명당이라는 여주로 천장했다.


예종세조의 가족왕릉인 [서오릉]을 버려두고 정창손(세조 조 영의정)의 선산을 아비의 능으로 정하고, 이인손(세조 조 우의정)의 묘역을 할아버지 능으로 정한 것은 대를 이어 벼슬을 이어가던 명문대가의 명당묘역을 택함으로서, 예종 자신과 후대에 미칠 아비의 악업(惡業)을 끊어보고자 풍수의 대전환을 꾀하려했던 것으로 추정해본다.



이때 영릉의 여주 천장과 관련해 왕릉은 도성 100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거리상의 문제로 논란이 제기되었으나, 물길로 가면 하루거리라는 논리로 명분을 갖추었다. 예종은 1468년 유자광의 계략으로 남이 역모사건이 발생하자, 남이를 비롯한 강순 등을 처형시켰으며 이듬해에는 삼포(三浦)에서 왜인(倭人)과의 개별무역을 금지했다.


또한  그해 6월에는 직전수조법을 제정해 각도에 있는 둔전(屯田: 병영에 예속된 전답)을 일반농민이 경작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리고 9월에는 최항 등이 경국대전을 찬진했으나 반포하지 못하고, 그해 11월 경복궁 자미당(紫微堂)에서 20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세조가 온갖 정성을 기울이며 성군으로 자리매김하길 바랐던 예종은 부왕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오히려 죽음을 맞이하였다. 짧은 재위로 업적을 남길 틈도 없이 몇 개의 기록만 남기고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 임금 예종은 두 명의 부인에게서 2남 1녀를 두었다. 조선역대 왕 중에 가장 어린나이에 아들을 낳은 이가 예종(睿宗)이다.


예종의 나이 12세에 [장순왕후]가 첫아들을 낳고 17세로 요절했는데, 이때 나은 인성대군도 2세에 죽었다. 하지만 계비 [안순왕후]가 낳은 둘째아들 제안대군은 예종 승하당시 4살에 불과해 왕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덕분에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세조가(世祖家)의 대를 잇는 박복함에 예종은 그렇게 단명하여 계비 안순왕후와 함께 창릉에 잠들어 있다.




제8대 예종 계비 안순왕후 1445~1498 (54세)      


안순왕후 한씨는 청천부원군 한백륜의 여식으로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원래는 한명회의 딸이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17세에 병사하자, 이듬해 동궁의 후궁인 소훈(昭訓)에 간택돼 당시 세자 신분이었던 예종과 가례를 올렸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아들을 두고 있던 소훈 한씨가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이듬해  남편이 병사하자 25세의 나이에 청상(靑孀)이 되었다. 이때 정희왕후(세조비)는 한명회와의 정략으로 의경세자의 차남인 자을산군(者乙山君) 예종안순왕후의 양자로 삼아 왕이 되게 하였다.


성종 즉위당시 왕의 생모인 수빈 한씨(소혜왕후)는 그대로 수빈에 머물렀으나, 성종 2년(1471년) 2월에 남편인 의경세자가 [의경왕]으로 추존됨에 따라 "인수왕비"가 되었다. 동시에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도 인혜대비로 봉해졌다.  


안순왕후와 제안대군 / 이철원 illustrator

이후 두 사람의 위계(位階)가 문제시 되자, 성종 3년 신숙주 의견에 따라 자성대왕대비(세조비)의 윤허 하에 인수왕비인혜대비의 위계를 선왕 형제의 서열로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성종 6년 의경왕이 덕종으로 추존됨과 동시에 인수왕비는 [인수대비]로 진봉되는데, 이때 인수대비와 인혜대비의 서열문제가 다시 거론되었으나 인수대비를 웃전으로 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다.     


안순왕후는 조정 정치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으며,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를 감쌌던 여인이다. 후일 성종이 승하하고 장남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연산군 3년에 [명의대왕대비]가 되었다. 소생은 제안대군현숙공주가 있으며 1498년(연산군 4) 12월 창경궁에서 일기를 마감하여 동원이강 창릉예종 옆에 누워있다.


예종 창릉(昌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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