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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Oct 19. 2015

조선왕과의 만남(19)

성종릉_01


제9대 성종 1457~1494 (38세) / 재위 1469.11 (13세)~1494.12 (38세) 25년 1개월


illustrator / 유환영


▐  선릉(宣陵)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 131 (선정릉 내)


선릉은 도성(城)에서 가까운 뚝섬나루를 건너 광주부(廣州府) 서면 학당리 언덕을 택일해 능침사찰 봉은사(奉恩寺)와 함께 조영된 왕릉이다. 세상이 변해 전국에서 가장 번화한 서울 강남이 탄생하고, 덕분에 땅값 비싼 삼성동 한복판에 자리하게 되었다. 


도심 빌딩숲 사이로 우거진 소나무와 가을이 무르익은 푸른 능선은 바쁜 도심의 사람들에게 여유로움과 평화로운 분위기를 제공해주고 있다. 


성종 선릉(宣陵)

조선의 왕릉은 도성에서 10리 밖에 머물되 100리 안에서 조성해야하며 또한 풍수상 길지요건을 갖춰야 했다. 이런 연유로 선릉은 당시 인근의 민묘(民墓)를 이장시켜가며 공들여 조영한 왕릉이었다.


[연산군일기]에는 연산군 1년(1495년)『선릉 능역 안에 묘가 있어 옮겨야 하는데, 이장해야 할 묘가 당상관 및 당상관의 부모와 처, 조부모의 것은 쌀과 황두를 합하여 15석을, 그 나머지는 쌀 2석과 황두 1석을 전례에 따라 보상해주고, 임자 없는 묘는 경기감사로 하여금 차사원을 정하고 군사를 지원해 이장토록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예는 이미 예종의 창릉을 조영할 때에도 나타났었다. 민묘 이장을 위해 같은 조건의 보상을 해준 것이다. 당시 하나의 왕릉을 조성하기 위해 왕실에서 어느 정도의 공을 들였는지 짐작케 한다. 이렇게 공들여 조영한 선릉은 유난히 많은 변고를 겪었는데, 그 첫 수난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선조26) 일어났다. 


전란 중 왜병에 의해 왕릉이 파헤쳐지고 관(棺)이 불타버렸다. 선조 26년 4월 [선조실록] 기사에는 경기좌도 관찰사 성영(成泳)선조에게 치계(馳啓)하기를 "왜적이 선릉정릉을 파헤쳐 재앙이 재궁(棺)까지 미쳐, 차마 말할 수 없이 애통합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그해 8월 기사(記史)에는 누구의 시체인지 모를 시신이 정릉 근처에 버려져 있어 이를 왕의 옥체라고 짐작하고, 시신을 봉안(奉安)하는 공을 세우려고 몇몇 군사들이 앞 다투어 경쟁했다는 내용도 있다. 1625년(인조 3)에는 정자각에 불이 나 수리를 했고 그 이듬해는 능에도 화재가 발생한 것을 보면, 당시 선릉과 정릉의 훼손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 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선릉은 현재 성종의 유해(遺骸)가 없는 빈 무덤이다. 왜적들이 정자각을 불태우고 능을 도굴했는데, 왜란이 끝난 뒤 선조는 성종의 유해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전란 중 무지몽매한 왜군들이 아무렇게나 흩뿌려 버렸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선조는 새로 관을 짜서 부장품으로 넣었던 옷을 태운 재를 담아 다시 안장하였다. 성종의 무덤 속에는 수의로 넣었던 옷을 태운 재만 관에 들어있다. 선릉동원이강의 배열을 이루고 있는데, 좌측언덕 [성종의 능]과 우측 언덕 계비 [정현왕후의 능]이 다소 떨어져 있어 정자각에서 왕비능이 보이지 않는다. 성종의 능침엔 병풍석난간석이 세워져 있다. 


능에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세조유훈에 따라 광릉 이후 왕릉에는 세우지 않던 병풍석이 성종선릉에 다시 세워져 있다. 문인석과 무인석 키도 다시 높아져 있다. 연산군선릉을 조영할 때에는 이미 정희대왕대비(세조비)가 승하한지 11년이 흘렀기에, 세조의 유훈을 챙겨 능 조영에 관여했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선릉 무인석

성종세조의 손자이며 의경세자(덕종)의 둘째 아들이다. 모후는 한확의 딸인 [소혜왕후]고 비(妃)는 영의정 한명회의 딸 [공혜왕후], 계비는 우의정 윤호의 딸 [정현왕후]이다. 성종 태어난지 두 달도 채 못되어 의경세자가 요절하자, 할아버지 세조 성종을 궁중에서 키웠다.


성종은 학문을 좋아했고 성품이 뛰어났으며 도량이 넓고 활을 쏘는 기예와 서화에도 능하며 담력이 뛰어나 세조의 사랑을 받았다. 어느 날 뇌우가 몰아쳐 옆에 있던 환관이 벼락을 맞아 죽자 모두들 정신을 잃었으나, 그의 얼굴빛이 바뀌지 않는 것을 보고 세조는 그가 태조를 닮았다고 하였다.


illustrator / 장기명

1469년 예종이 승하하자 왕위 계승권은 자연히 [정희대비]와 [훈구대신]들에게 넘어갔다. 한명회는 형인 월산군의 허약함을 들어 자신의 사위인 자을산군(者乙山君)을 적극 왕으로 추대하면서, 왕실 최고 어른인 정희대비의 동의를 얻어내 예종 서거(逝去) 당일에 바로 결정했다. 


이처럼 성종이 전격적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세조대부터 구축해 온 장인 한명회의 막강한 정치적 힘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때 정희대비는 조정을 주도하던 한명회의 입김을 물리치기 힘들었겠지만, 그녀 역시 두 아들(덕종, 예종)이 요절함에 종묘사직을 위해 강골풍의 자을산군을 선택했을 것이다. 



당시 성종은 13세에 불과해 정희대비가 수렴청정을 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후견인은 한명회였다. 사위인 예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딸이 요절하여 왕의 장인이라는 기득권을 마음껏 누려보지 못했던 한명회는 또 다시 사위 성종을 왕위에 올리는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함으로서 세조 때부터 승승장구하여 가히 무소불위의 세력을 갖게 되었다. 


예종의 뒤를 이어 성종이 즉위한 후에도 한명회신숙주, 정인지를 중심으로 한 세조대의 훈신들은 여전히 국가의 원로로 자리하면서 기득권을 유지시키는 가운데 후일 역사에 훈구파(勳舊派)라는 명칭을 남겼다. 


illustrator / 이철원

예종 조에 남이옥사를 주도하며, 신흥무장 세력을 제거했던 이들은 1470년(성종1) 세조찬탈 전철의 우려를 핑계 삼아 왕실종친인 구성군이 어린 성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한다며 탄핵하여 유배시킴으로써 종친세력 또한 제거하였다.


7년의 세월이 흘러 1476년(성종 7) 성종은 20세가 되면서 비로소 친정을 실시하게 되었다. 이때에 지방세력을 무대로 사림파가 서서히 성장하고 있었는데 성종은 [훈구파]를 견제할 목적으로 [사림파]라는 젊은 피를 수혈하면서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다. 



이로써 오랫동안 굳건한 자리를 지켜왔던 훈구파는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어찌 보면 현세의 보수와 개혁의 정당제가 성종 조로부터 뿌리내리기 시작한 듯 여겨진다. 성종은 세종과 세조가 이룩했던 치적을 기반으로 훌륭한 정책을 펼쳐나갔다.


조선초기부터 반세기에 걸쳐 반포된 여러 법전과 조례 및 관례 등을 집성하여 세조대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수차의 개정 끝에 1485년에 완성해 반포하였고, 1492년(성종23)에는 경국대전을 더욱 보완해 대전속록(大典續錄)을 완성해 통치 전거(典據)의 법제를 완비했다. 



또한 세조대에 실시한 직전제로 인한 토지세습과 관리들의 수탈방지를 위해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하여, 나라에서 경작자에게 직접 조(租)를 받아들임으로서 관리들에게 국가가 현물녹봉을 직접 지급하게 했다. 백성들의 형벌을 줄이고 탐관오리 자손의 등용불가를 완화했다. 


하지만 재가녀(再嫁女) 자손은 등용을 제한했다. 정몽주길재의 후손을 채용하는 등 인재를 널리 등용했으며 [훈구세력]을 견제하고자 신진 [사림세력]을 과감하게 발탁했다. 성종은 대왕(大王)답게 세력균형을 통한 왕권안정으로 조선중기 이후 사림(士林) 정치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세종 후반기부터 완화되면서 세조 조까지 번성했던 불교를 철저히 배척했다. 성종 20년 향시(鄕試)에서 불교를 믿어 재앙을 다스려야한다는 답안을 쓴 유생을 귀양 보내기까지 했다. 도승법을 혁파하고 승려를 통제하는 이른바 척불시대의 시작이었다. 


성종 경사(經史)에 밝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경연을 통하여 학자들과 자주 토론하며 학문과 교육을 장려했다. 세종 조의 집현전에 해당하는 홍문관을 설치하고 편찬사업에도 관심이 깊어 동국여지승람 , 동국통감, 오례의, 악학궤범 등 각종서적을 간행해 문화발전을 이뤘다. 



또한 1484년(성종 15) 당시 생존했던 세 왕후(세조, 덕종, 예종)의 편안한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옛 수강궁 터에 창경궁(昌慶宮)을 창건하여 효(孝)를 행하기도 했다.


국방에도 힘을 기울여 1479년 좌의정 윤필상을 도원수로 삼아 [압록강] 건너 북방 야인들의 본거지를 정벌하고, 1491년에는 함경도 관찰사 허종을 도원수로 삼아 2만4천의 군사로 [두만강] 건너 여진족의 부락을 정벌케 하여 국초부터 빈번히 침입하던 야인소굴을 소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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