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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Oct 19. 2015

조선왕과의 만남(20)

성종릉_02


제9대 성종 1457~1494 (38세) / 재위 1469.11 (13세)~1494.12 (38세) 25년 1개월



▐  선릉(宣陵)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 131 (선정릉 내)


성종은 태조이후 닦아온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체제와 기반을 완성시켜 조선 초기문화를 꽃피웠다. 이런 연유로 그는 묘호는 성종(成宗)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하지만 태평성대에는 항시 유흥 퇴폐의 독버섯이 싹트는 게 세상풍조의 이치(理致)인 듯, 당시 뇌물수수가 성행했으며 성종 자신도 유흥에 빠졌었다.


야사에는 성종어우동을 만나보기 위해 간혹 잠행(潛行)까지 해가며 기방(妓房)을 출입했다고 한다. 당대에 이러한 소문이 퍼진 이유는 어우동과 놀아난 사람 중에 이씨 성을 가진 선비가 있었는데, 그의 정체가 임금이 아니겠느냐는 세간의 짐작 때문이었다고 한다.

 


또한 성종이 둘째 부인 윤씨에게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어우동 문에 영향을 주었다는 추측도 있다. 당시 왕비였던 윤씨는 왕의 기방 출입이 잦고 자신을 멀리한다고 왕의 얼굴에 손톱을 긁는 갈등이 격화되면서, 중전에서 퇴출돼 사저로 유폐된 후 사사되었는데, 이는 후일 갑자사화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성종은 도학을 숭상하고 군자임을 자처했던 군왕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호기가 넘치는 사내였다. 어우동(於宇同)의 성 유희(遊戲)는 [성종실록]에 소상히 기록돼 있는데 이때 사관들이 등재를 꺼려했다는 기록을 보면 당시 궁궐 관리들에게는 대단한 충격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illustrator / 최달수

그녀는 성종 조 승문원 지사였던 박윤창의 딸로 태어나서 효령대군의 손자 태강수(泰江守) 이동에게 출가한 세종 형님의 손자 며느리였다. 양반가문 출신인 어우동은 남편이었던 태강수와의 이혼송사 이후 기녀행세를 하며 기방을 드나들다보니 기생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어우동은 팔촌 시아주버니인 수산수(守山守) 이기(정종 현손)와 간통을 했고, 육촌 시아주버니 방산수(方山守) 이난(세종 손자)과 통정을 했으니 근친상간의 끔찍한 일이였다. 그녀는 자신과 함께한 사내의 몸에 자신 이름을 문신하길 강요해 팔뚝과 등에다 이름을 새겨 넣기까지 했다한다.



실록의 기사에 따르면 어우동과 관계한 사람들은 그녀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병조판서 어유소(魚有沼)와 직제학 노공필(盧公弼)이 거명되어 있고 사헌부 아전 출신과 같은 오종년도 끼어있다.


과거에 급제하여 유가(遊街) 길에 올랐던 홍찬은 그녀로 인해 신세를 망친 사내중의 한 사람이다. 어우동 상대는 종친과 재상 같은 고위층에서 젊은 관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또한 양반뿐만이 아니라 노비도 자신의 상대로 삼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도승지 김계창(金季昌)의 끈질긴 탄핵을 받고 유교적 규범을 어긴 죄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성종의 호기(豪氣)는 어우동 소문에서 끝나지 않고 마침내 희대의 폭군 연산군이라는 불씨를 낳고 말았다. 조선 최다의 부인을 둔 성종은 20살에 맏아들 융(㦕)을 얻었다.


어미 윤씨가 폐출될 당시 융은 4살에 불과했고 성종이 윤씨 폐위사건을 불문에 붙여 세자는 정현왕후가 친모인줄 알고 자랐다. 할머니 인수대비(성종모)가 융을 미워하며 엄하게 대했기에 불행한 어린 시절을 겪고 자란 융은 조금씩 삐뚤어진 성격이 자라나게 되었다.


인수대비(仁粹大妃)

성종은 아들의 성격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1483년 8살이던 융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이때 인수대비와 대신들은 폐비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면 후일 화를 부를 것이라며 반대했으나, 당시 왕비소생의 왕자는 연산군 한명 뿐이었기에 성종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성종과 주위사람들이 세자의 포악한 성품을 우려했던 일화를 소개해본다. 성종이 어느 날 세자를 불러놓고 임금의 도리에 대해 가르치려 할 때였다. 부왕의 부름을 받고 나온 융이 성종에게 다가가려 할 때 난데없이 사슴 한마리가 달려들어 그의 옷과 손등을 핥아댔다.


illustrator / 장선환

그 사슴은 성종이 몹시 아끼던 궁중 애완동물 이었다. 하지만 융은 사슴이 자신의 옷을 더럽힌 것에 격분한 나머지 부왕이 보는 앞에서 사슴을 발길로 걷어찼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성종은 몹시 화가 나서 융을 크게 꾸짖었다. 후일 성종이 승하하자 왕으로 등극한 연산군은 가장 먼저 그 사슴을 활로 쏘아 죽여 버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성종은 12명의 부인을 두었다. 제 11대 중종도 12명을 거느린 탓에 부인 수로 조선 역대임금 중 공동 1위인 셈이다. 그는 모든 면에서 활동이 왕성했던 정력가였다. 세 왕비와 아홉 후궁에게서 16명의 아들과 12명의 딸을 두었으며, 맏아들 연산군(燕山君)폐비 윤씨의 아들이고 중종(中宗)은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아들이다.


illustrator / 전지은

성종은 12세의 어린 나이로 갑작스럽게 즉위했지만, 25년 동안 재위하면서 성실하고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조선개국 이후 추진돼온 여러 제도의 정비를 일단 완결함으로써, 전반기 왕조가 본격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던 조선 다섯 명의 대왕(大王) 중 한명이다.


성종은 재위 25년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38세의 나이로 승하하여 계비 정현왕후와 함께 선릉에 잠들어있다. 역사는 성종의 남달랐던 여인편력을 알고 있는지, 오늘도 강남의 꺼질 줄 모르는 휘황한 밤에 불빛은 적막한 선릉의 혼령을 유혹하고 있는 듯하다.


선릉(宣陵)

"전하, 생전에 그토록 많은 업적을 쌓고 조선전기를 마무리하셨건만, 전란 통에 시신마저 수습돼지 못한 비통함을 어찌하오리까. 혼령이라도 마주하며 대왕의 성덕을 추모하옵나이다."



제9대 성종 계비 정현왕후 1462~1530 (69세)


정현왕후 윤씨는 우의정 영원부원군 윤호의 여식으로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성종의 3번째 왕비로 제2 계비이다. 1473년(성종 4) 12살 나이에 대궐에 들어가 숙의에 봉해졌고, 1479년 제1 계비 윤씨가 폐위되자 이듬해 11월 왕비로 책봉되었다. 성종이 승하한 후 1497년에는 자순대비에 봉해졌다.


성종정현왕후를 총애하자 폐비윤씨는 정현왕후를 몹시 미워했다. 하지만 정현왕후는 중전이 된 후에도 성종의 바람 끼를 늘 모른척했고 폐비윤씨의 아들을 친자식처럼 보듬고 키웠으며, 이에 연산군정현왕후가 자신의 생모가 아님을 의심치 않았다.



정현왕후 윤씨는 본래 폐비윤씨와 함께 간택돼 입궁하였다. 당시 폐비윤씨는 19세 처녀였고 정현왕후는 12살 이였기에 호색군주 성종은 당연히 폐비윤씨를 가까이했다. 정현왕후는 질투심이 강했던 폐비 윤씨와는 달리 온순하였다.


그녀는 대왕대비인 정희왕후(세조비) 윤씨와 같은 문중이자, 당시 조정의 세력가였던 가문으로 왕실 어른들과 성종의 동의하에 중전에 오르게 되었다. 그녀는 후궁시절 연산군 생모 윤씨가 폐비될 위기에 처했을 때 폐비전교를 거두기 위해 노력했지만, 후일 폐비를 복위시키려는 움직임에는 자신의 위치가 뒤흔들릴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완강히 반대하였다.



그녀는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으로 주변사람을 배려하며 늘 신중한 자세로 말을 아끼는 여인이었다. 폐비윤씨 사건에 개입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에 순응했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과 아들을 지킬 수 있었다.


연산군이 어미를 죽게 한 숙의 엄소용을 잔인하게 때려죽이고, 그녀의 처소를 찾아 칼을 휘두를 때 정현왕후 처소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순간위기를 극복하였다. 이처럼 정현왕후는 결정적인 때에만 적극적으로 나서는 현명한 방법으로 위기를 모면하였고, 이후 자신이 낳은 진성대군반정으로 등극함에 따라 대비에 오를 수 있었다.



후궁들의 투기에 여러 차례 곤욕을 치렀던 성종은 늘 온화했던 그녀를 높이 평가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아들을 지키는 일에는 적극적이었다. 연산군을 친자식처럼 기르면서 자신이 낳은 아들 진성대군신수근의 딸과 짝을 지어주는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연산군의 부인이 신수근의 누이였던 만큼 겹사돈을 만들어 혹시 모를 연산군의 위협에 대비했을지 모를 일이다. 연산군이 네살 때 폐출된 폐비의 죽음에 대해 성종은 일체 함구령을 내렸기 때문에 연산군은 계모인 정현왕후가 친모인 줄 알고 성장하였다.



정현왕후는 친아들 진성대군이 태어나면서 전처 자식인 연산에게 친모로서의 진정한 사랑을 베풀지는 못했을 것이다. 할머니인 인수대비연산을 미워하고 진성을 유난히 사랑했다 한다.


때문에 연산군은 진정한 부모의 정을 느끼고 못하고 고독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중종반정 시 반정세력들이 정현왕후를 찾아가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는 교지를 내려줄 것을 간언할 때 그녀는 이들의 청을 거절했다.


동원이강 정현왕후 능입구

그러나 결국 연산군을 왕자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도에 유배토록 허락하고, 이튿날 진성대군근정전(殿)에서 즉위토록 하였다. 정현왕후는 1498년(연산군 4) 성종이 잠들어 있는 선릉을 위해 견성사 사찰을 중창하고 봉은사(奉恩寺)라고 이름 붙여 왕실의 원찰에 정성을 기울이다 자신도 남편 곁에 함께 묻혔다.


그녀는 슬하에 진성대군(중종)과 신숙공주를 두었으며 중종 25년 8월 경복궁에서 향년 69세로 이승을 하직하여, 후덕했던 까닭에 성종 옆에 동원이강릉을 이루어 편히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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