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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Oct 28. 2015

조선왕과의 만남(23)

연산군 묘_01


제10대 연산군 1476~1506 (31세) / 재위 1494.12 (19세)~1506.09 (31세) 11년 9개월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연산군 묘(燕山君 墓) 사적 제362호 / 서울 도봉구 방학동 산77


[북한산] 동북편 산줄기가 이어져 내려와 멈춘 동산 아래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연산군 묘는 그가 왕위에서 쫓겨난 지 500년이 되던 해인 2006년 7월 일반에게 개되다. 좁다란 계단길이 조그마한 언덕을 향해있고 올라서니 다섯 기의 묘가 조촐하니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원래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의 땅이었다. 연산군은 강화로 유배되던 그해 11월(양력) 병사하여 장사를 치루고 묘를 조성했다. 하지만 중종 7년 부인 신씨가 상소하여 외조부였던 임영대군 땅인 양주목  해등촌(현 방학동)으로 이장하기를 청하였다.


연립주택과 공장사이 연산군 묘지 

이듬해 대군의 상례(喪禮)를 갖춰 이장하고 양주의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를 관리하도록 하였지만 형식적인 것에 불과해 사실상 방치된 것과 다름없었다. 폐주(廢主)의 과보는 역사의 홀대로 남아있기에 연산군 묘 주변은 지저분한 공장들이 들어서 있고, 정면에는 낡은 연립주택이 즐비해있다. 


묘역을 살피니, ①연산군과 부인 폐비 신씨쌍묘가 제일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그 아래에 태종의 후궁 ②의정궁주 조씨의 묘가 있고 맨 아래에는 연산군의 딸인 ③휘순공주와 사위인 구문경의 묘가 나란히 있다. 왕릉이 아니고 묘역인지라 일반왕자의 묘 정도의 규모이다. 



슬하에 네 명의 아들과 한명의 공주를 두었는데 휘순공주는 출가해 화를 면했지만, 아들 넷은 연산군이 폐위되며 바로 사사되었다. 묘 앞에는 800 여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노거수(老巨樹) 은행나무가 연산군 부부의 묘역을 지켜주고 있는 듯 우람하게 서있다.


연산군 성종과 폐비 윤씨 사이에 태어나, 7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어 19세에 왕위를 이었다. 그는 붓글씨를 잘 쓰고 실록에 실려 있는 시가 130편이나 될 정도로 글재주가 있었다.


연산군 묘역 앞 은행나무

즉위 초에는 성종 조에 형성된 치평(治平)의 기운이 남아있었고, 인재와 사림(士林)이 성하여 질서가 유지되던 가운데 연산군은 성종말기의 퇴폐풍조와 부패상을 없애는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3년이 지나면서 패악한 폭군으로 군림하며 두 차례의 큰 옥사를 일으키는 참극을 벌였다. 


연산군4년 무오사화와 연산군10년 갑자사화였다. 이 두 사화는 조정(朝廷)의 질서가 흩어지면서 생겨났던 것이기도 하지만 연산군의 개인성품 또한 많이 작용했던 사건이었다. 그는 훈구파 유자광과 이극돈의 계략에 빠져, 사초(史草)를 문제 삼아 사림파의 많은 신진사류를 죽이는 조선시대 최초의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세조 조에는 부국강병을 추구함에 따라 공신인 훈구대신들의 지위가 강화되면서 이들의 부정축재가 횡행하자 성종은 훈구파를 견제키 위해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신진정치 세력인 사림파를 정계로 진출시켰다. 


연산 조에 이들은 삼사(三司)의 언론직 및 사관직을 차지하며 훈구대신들의 비행을 폭로 규탄하고, 왕의 향락을 비판하며 왕권 전제화를 반대했다. 이에 [훈구파]는 [사림파]를 야생(野生) 귀족으로 규정하고, 사림들이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망친다고 비난함에 따라 그들의 대립이 연산군 때 비로소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김종직 유자광은 일찍이 개인감정이 있었고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성종 조에 춘추관 사관으로 있을 때 이극돈의 비리와 세조의 찬탈 및 궁중 비행을 사초에 기록한 일로 노골적인 반목이 생겨났다. 결국 유자광이극돈은 사림파를 보복코자했디.


성종실록(연산군 4)이 편찬될 때 실록청 당상관이던 이극돈김일손이 사초에 삽입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일을 비방한 것이라 문제삼아 연산에게 고했다. 조의제문은 기원전 초나라 의제(義帝)를 죽이고 제위를 찬탈한 항우(項羽)를 김종직이 비판한 글이다.



이극돈을 비롯한 훈구대신들은 자신들의 정쟁에 선비를 싫어하던 임금을 교묘히 이용했다. 마침내 연산김일손을 심문하고 이는 스승이 선동한 것이라며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시체의 목을 베는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김일손은 선왕 무록(誣錄) 죄로 죽고, 정여창 등은 무고 죄로, 김굉필 등은 조의제문 삽입방조 죄로 귀양을 보냈다. 한편 이극돈은 수사관(修史官)으로 사초를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 당했다. 연산군은 성종의 능에 묻을 지석초안에서 그때까지 알고 있던 정현왕후가 생모가 아니라 인수대비 미움으로 사약을 받았던 윤씨가 친어미라는 출생 비밀을 알게 됐다. 


조의제문(弔義帝文)

이후 속이 끓고 정신이 혼미하여 방탕한 향락생활을 자초하다 보니 나라재정이 궁핍해져 이를 메우기 위해 공신들의 재산일부를 몰수하려 했다. 이때 임사홍이 왕을 사주해 공신배척의 음모를 꾸몄다. 그는 폐비의 어미 신씨로부터 윤씨에 폐출과 사사경위를 알아내 연산군에게 밀고하면서 사건이 확대되었다.


울고 싶은데  뺨 맞을 명분이 생기게 되었다. 연산군은 이 기회에 어미의 원한을 푸는 동시에 공신들을 압박해 재산을 몰수할 결심으로 폐비 윤씨의 복위문제를 거론하며 이를 반대한 선비들을 무참히 죽이는 갑자사화(연산군 10년)를 일으켰다. 


illustrator / 유환영

당시 조정은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을 억제하려는 사림파 중심의 부중(府中)세력과 왕을 이용하여 향락을 즐기며 세력을 키우려는 궁중세력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때 임사홍은 양 구도를 적절하게 활용해 연산군의 복수 심리를 교묘히 이용했다. 


그는 자신이 22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원한을 앙갚음하기 위해  궁중세력이던 연산군 비(妃)의 오라버니 신수근을 끌어들여, 무오사화(연산군 4년) 때 남은 선비들과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옥사를 꾸몄다. 마침내 연산군 10년 계춘(季春) 스무날 밤, 연산정숙의엄숙의를 창경궁 뜰에 묶어놓고 정씨 소생 안양군봉안군을 잡아들여 그녀를 때리게 했다. 



날이 어두워 안양군은 어미임을 짐작치 못하고 마구 때렸으나 봉안군은 이를 알아채고 왕명에 응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연산군은 더욱 화가 솟구쳐 그녀들을 때리고 짓밟아 죽게 하였다. 심지어 안양군봉안군인수대비에게로 끌고가 대비도 한패라 하며, 병상에서 난동을 부려 그 화병으로 인수대비가 세상을 떠나게 했다. 


또한 내수사를 시켜 그녀들의 시체를 모두 찢어 젓갈을 만들어 산야에 뿌려버리라고 명하였고, 안양군과 봉안군도 유배한 후 이듬해에 사사(賜死)하였다. 이어 생모 윤씨를 복위시켜 왕비로 추숭하고 왕릉의 격식을 갖추려 했다. 


illustrator / 이철원

이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귀양보내고 윤씨 폐출에 가담했던 윤필상김굉필 등 수십 명을 사형에 처하고 이미 죽은 한명회, 정창손, 정여창, 남효온 등을 부관참시(剖棺斬屍) 하였다. 이때 성종 조에 양성한 많은 선비가 수난을 당했으며, 사형을 받았거나 부관참시의 욕을 당한 사람들 중에는 역사상 그 이름이 빛나는 명신과 대학자, 충신들이 많이 포함되어있다. 


그의 포학(暴虐)한 성품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그나마 귀인 정씨와 엄씨 두 사람은 중종 1년 10월에 그 신원이 복위되고 3년 동안 제물을 하사받을 수 있었다. 갑자사화는 윤씨의 원한에 대해 벌인 살육으로 평가할 수도 있겠으나, 조정대신들의 보이지 않는 알력다툼의 결과였으며, 한편 연산군 자신의 사치와 향락 때문에 벌어졌던 사건이기도 했다. 



이때 연산군의 난행과 폭정을 비방하는 언문(諺文) 방서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글을 아는 사람들을 잡아들여 옥사를 벌였고 언문교습을 중단시키며 언문구결을 모조리 불사르는 등 이른바 한글 학대까지 자행해 이후 국문학 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다. 


그가 광포한 성품을 갖게 된 동기가 생모를 잃었었던 배경에 있을지 몰라도 실록인 [연산군 일기]에는 시기심이 많고 모진성품을 갖고 있으며, 자질이 총명치 못한 위인임에 문리(文理)에 어둡고 사무능력도 없던 사람으로 서술돼 있다.   


illustrator / 유환영

이로 인해 왕과 대신들 사이에 점차 갈등이 생기자 연산은 문신들의 직간을 귀찮게 여기어 경연을 없애, 학문을 마다하고 사간원(司諫院)을 폐지해 언로를 차단했다. 또한 왕에게 조정상황을 간언하던 홍문관을 없애고 사간원 正言(정6품)직도 감원했으며, 상소와 상언 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를 중단시켜 버렸다. 


팔도에 채홍사, 채청사 등을 파견해 미녀와 양마(良馬)를 구해오게 하고 원각사를 폐지해 기생양성소로 개편하였으며 성균관을 주색장으로 삼는 등 황음에 빠졌다. 당시 기녀가 궁중에 들어가면 명칭이 흥청(興靑)으로 바뀌며 지체가 높아졌는데 이때 임금과 잠자리를 같이하면 천과(天科) 흥청에 높은 급수를 주었고, 그렇지 못한 경우는 지과(地科) 흥청에 머물렀다.


연산군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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