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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Oct 28. 2015

조선왕과의 만남(24)

연산군 묘_02


제10대 연산군 1476~1506 (31세) / 재위 1494.12 (19세)~1506.09 (31세) 11년 9개월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연산군 묘(燕山君 墓) 사적 제362호 / 서울 도봉구 방학동 산77


연산군은 벼슬아치나 선비들로 하여금 흥청들을 태운 가마를 메게 하였다. 자신이 말이 되어 흥청들을 태우고 기거나 그녀들 등에 올라 타 말놀이를 즐겼다. 그도 모자라 예쁘다는 민간의 유부녀까지 불러다 함부로 겁탈하는 일들이 있었다.


성종의 서녀이며 이복누이인 유부녀 휘숙옹주를 범하였고 급기야 백부 월산대군의 부인까지 성추행 하였다. 결국 연산은 그렇게 흥청들과 놀아나다 망했다하여 이때 흥청망청(淸)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말년에는 더욱 패악해져 많은 대신들을 죽여 없앴다.


illustrator / 유환영

그는 "포락(단근질), 착흉(가슴 뻐개기), 촌참(토막 내기), 쇄골표풍(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의 형벌까지 행하였다."라고 기록돼 있을 만큼 폭군이었다. 연산군이 궁중기생을 가까이 방탕한 생활을 일삼으며 국고를 탕진해가던 어느 날 장안에서 유명한 기생 장녹수(張綠水)를 알게 됐다.


당시 어미에 대한 그리움으로 몸부림치던 연산군장녹수의 치마폭에서 모성애를 느끼려했던 것 같다. 반면 영악한 장녹수연산군을 통해 강력한 신분상승을 노리며 기생으로서는 누릴 수 없는 부귀영화를 누리다, 중종반정 후 왕이 폐위되면서 처형되었다.



장녹수는 1502년(연산군 8) 3월 [연산군 일기]에 처음 등장한다. 연산군이 승지에게 그녀의 아비인 장한필의 내력을 조사시켰고 그해부터 장녹수에게 빠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장한필은 본관이 흥덕(興德, 興城)으로 문과에 급제해, 성종 19년 충청도 문의현령을 지낸 인물이었다.


어미가 첩이었기에 장녹수는 천인의 신분으로 불행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가난하고 천한신분이라 몸을 팔아 생활하다, 제안대군(예종 차남)의 가비(家婢)로 들어가 노비의 아내가 되어 아들까지 낳았지만 뒤에 노래와 춤을 익혀 기녀가 되고 이름을 떨쳤다.



실록에는 연산군이 그녀의 창(唱)을 듣고 기뻐하여 궁중으로 맞아들였는데 총애함이 날로 융성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좇았고 숙원(淑媛)로 봉했으며, 그녀가 빼어난 미인은 아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나이도 연산보다 두세 살 이상 많았다.


30대의 농염한 여인이었지만 17세의 앳된 소녀로 보일 만큼 동안이었고 영리했으며 교사(敎唆)와 요사스러운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으므로 왕이 혹하여 많은 금은보화와 노비, 전택(田宅)을 내렸다.



당시 연산은 왕비 신씨를 현모양처요 훌륭한 국모로 인정하며 존중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왕과 왕비의 관계였을 뿐이었다. 그가 국왕이 아닌 세속적 인간으로 돌아올 때 장녹수가 아내의 자리를 대신한 셈이다.


기사(記史)에는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 같이 하였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했으며, 왕이 비록 몹시 노했더라도 녹수만 보면 반드시 기뻐하여 웃었으므로 모든 상형(賞刑)이 그녀의 입에서 행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간본연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천박함이 오히려 연산이 바라보는 미(軟媚)였는지 모를 일이다.



그녀가 인사에 개입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다지만 당시 사적청탁이 불가능한 사회였던 점을 감안하면 이는 낭설인 듯싶다. 장녹수의 일가친척 중 크게 출세한 사람은 형부 김효손 뿐으로 7품 무관직인 사정(司正)이었으며 연산군 12년 벼락승진을 하여 정3품 당상관까지 오른 기록이 전부이다.


장녹수는 1503년(연산군 9) 종 3품인 숙용에 봉해지면서 이듬해 그녀의 사가주변 민가를 모두 철거해 선공감으로 하여금 새로이 단장시켰다. 1506년 오라비 장복수와 가솔들을 양인 신분으로 올리고, 관선(官船)을 이용해 평안도 미곡 7천석을 무역토록 하였다.


이때 왕이 대간을 보내 감독을 시킨 일과 내시와 승지에게 그녀 가마를 뒤따르게 한 일이 있었는데 이는 그녀의 청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연산군의 관료 길들이기에 일환으로 보여 진다. 그녀의 최후는 비참하였다.



1506년 9월 중종반정이 일어났을 때 장녹수와 전비(典備) 등은 당일로 군기시(軍器寺: 서울시청 부근) 앞에 끌려가 박원종(월산대군부인 동생) 칼날 앞에서 참형에 처하여지고 가산적몰 되었다. 많은 후궁 중에서 장녹수와 전비가 유독 비난과 처형의 대상이 된 것은 그녀들의 재산이 많았던 탓도 있지만 결국 출신이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종친과 고품관리가 천인출신 여인에게 굽실거리고 사족의 집과 땅이 그녀들의 수중에 들어가며, 상권 등의 이권 다툼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앞서서 채가는 현상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들의 진정한 죄는 자신들의 주제로 관여해서는 안 되는 특권에 참여한 죄였을 것이다.



연산군은 성종 말기에 나타난 사치풍조를 바로잡기 위해 금제절목(禁制節目)을 만들어 강력한 단속하였고 관료의 기강을 세우기 위해 암행어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왜인과 야인에 대비해 비융사를 설치하여 갑옷과 병기를 만들게 하고, 변경지방의 사민을 독려하며 국방에도 힘을 모았다.


또한 종묘제도를 정비하고 상평창을 설치해 물가를 안정시키며 국조보감, 동국여지승람 등을 수정하는 등의 일부업적이 있기는 했지만, 그의 잔인무도했던 폐정에 비한다면 그의 치적은 보잘 것이 없어 보인다. 성종이 승하하고 즉위한 연산군이 폭정을 이어가자, 병상에 있던 인수대비(성종 모친)는 손자의 무례와 부덕을 꾸짖다가 연산군의 머리에 치받쳐 어처구니없이 삶을 마감했다.


illustrator / 최달수

8년여 간 계속됐던 연산군의 실정은 반정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결국 강화도 서북쪽의 섬 교동도에 위리안치 되었다. 바닷바람이 세차게 몰려오던 섬에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불안과 지난날 회한으로 고통 받던 연산군은 역질(疫疾)로 건강이 악화되면서 부인 신씨가 보고 싶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서른한 살 나이로 파란만장한 세월을 등졌다.


연산군의 등극은 개국100년 조선전기 한 시대 획을 긋게 하여, 이후 50년간 4대 사화라는 유혈참극이 잇달아 발생하면서 다가올 조선중기의 불안한 정세를 암시하고 있었다. 그는 역사에 폐주로 남아, 묘호와 능호조차 없이 무관(無冠)의 왕으로 남아 외떨어진 방학동 야산줄기에 처연히 잠들어 있다.




제10대 연산군 폐비 신씨 1472~1537 (66세)


연산군 정비(正妃) 신씨는 영의정 신승선의 여식으로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임영대군(세종 4남)의 여식인 중모현주 이씨가 그녀의 어머니이다. 족보를 따지자면 남편 연산군은 7촌 조카뻘이 된다. 1488년(성종 19)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연산군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다.


신씨는 덕을 갖춘 여인으로 세자빈 시절 4명의 왕대비인 사전(四殿)을 받들어 모시기에 정성을 다하였고 매우 총명하여 소학(小學)과 내훈(內訓)을 쉽게 익히고 연산군이 황패해질 때마다 바로잡아 준 일이 많았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과 함께 폐출되고 거창군부인으로 강봉돼 정청궁(貞淸宮)에 잠시 거처하다 친정사저로 쫓겨났지만, 중종은 빈의 예를 갖추어 대하였다. 후일 한양에 집을 내리고 정현왕후(성종 계비)는 특별히 종을 하사하였다.



그녀가 병으로 죽자 왕후의 예로 장사를 지내게 하는 등 남다른 대우를 하였다. 그녀는 조용하면서도 정중하고 말이 적어, 왕비에 머물며 있는 동안 친척들이 우러러 보았으며 또한 아래 종들을 어루만지며 사랑해주었다 한다. 의정궁주 조씨 묘가 지금의 연산군 묘역에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세종 4년 태종의 후궁으로 조씨가 간택되었으나, 곧 태종이 승하하여  빈으로 책봉되지 못하고 궁주의 작호를 받았다. 조씨가 사망하자 임영대군은 왕명으로 후사가 없던 의정궁주(義貞宮主)의 제사를 맡게 되어 현 위치에 조씨 묘를 조성하였다.



그 후 임영대군의 외손녀인 거창부인 신씨의 요청에 의해 의정궁주 조씨 묘 위쪽에 연산군 묘를 이장하였다. 신씨는 중종 32년에 66세로 별세하였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으나 아들들은 모두 반정 때 사사되었다.


그녀는 폭군의 아내로 비운의 생을 살았지만 패악의 군주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지켜준 정숙한 조강지처였다. 남다른 덕(德)과 의(義)를 지녔던 여인의 혼령 앞에 서서 숙연한 마음으로 잠시 옷깃을 여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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