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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Oct 30. 2015

조선왕과의 만남(25)

중종릉_01


제11대 중종 1488~1544 (57세) / 재위 1506.09 (19세)~1544.11 (57세) 38년 2개월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정릉(靖陵)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 131 (선정릉 내) 


살아생전 3명의 왕후와 9명의 후궁을 두었던 중종은 부왕인 성종과 더불어 조선의 왕 중 최다의 부인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사후에는 어느 왕비와도 함께 있지 못하고 부모능역인 선릉 옆에 홀로 묻혀, 조선조에 몇 안 되는 단릉(短陵)으로 쓸쓸히 남아있다. 


조선왕릉 중 왕만 홀로 있는 능침은 후대에 왕릉으로 바뀐 단종장릉을 제외하면, 사실상 태조 건원릉중종 정릉 단 2기뿐이다. 중종이 승하하자 아들 인종은 선왕을 1545년(인종 1) 1월 경기도 고양에 예장하고 능호를 희릉이라 정했다.   


중종 정릉(靖陵)

하지만 한 달여 후 현재의 고양시 [서삼릉] 능역에 있는 제1계비 장경왕후 능 오른쪽 언덕에 동원이강 형식의 중종 능이 완공되자 능호를 정릉(靖陵)으로 바꾸었다. 


이후 제1계비 장경왕후 아들인 인종이 8개월 만에 요절하고 제2계비 문정왕후 아들 명종이 등극하자, 1562년(명종17) 문정왕후는 중종의 능역이 풍수지로 좋지 않다 주장하며 시부모가 잠들어있는 [선릉] 능역으로 남편을 천장하였다. 


지금의 정릉은 문정왕후가 [봉은사] 주지 보우(普雨)와 의논하여 선릉 동쪽이 풍수상 길지라고 하여 옮긴 곳이었으나, 지세(地勢)가 낮아 당시 여름철 홍수 때면 재실(齋室)과 홍살문까지 강물이 범람하여 침수되는 피해를 자주 입었다. 


강남 선릉로 선정릉 터 

이런 연유로 계비 문정왕후는 자신이 중종과 함께 안장되길 바랐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녀 역시 태릉(泰陵)에 홀로 쓸쓸히 안장돼 있다. 3명의 왕후를 두었던 중종은 부부가 제각기 동서남북에 흩어져 모두 4기의 능역을 갖추고 있다.


남쪽에는 삼성동 중종 정릉, 북쪽 양주시 단경왕후(원비) 온릉서쪽 고양시 장경왕후(제1계비) 희릉동쪽에는 문정왕후(제2계비) 태릉이 있다. 조선왕릉 42기(개성소재 2기 제외) 중 일할(一割)을 이들 부부가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정릉임진왜란 때 선릉과 함께 왜병에 의해 능이 파헤쳐지고, 재궁(梓宮: 관)이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선릉정릉의 세 능상 안에는 시신이 없다.   


임진왜란 당시, 성종과 성종비의 능침은 파헤쳐진 채 잿더미들만 남아있었지만, 파헤쳐져 비어있던 중종의 능침에는 근처에 알 수 없는 시신이 남아 있었다. 당시 전란 중에 군사들이 이를 왕의 옥체라고 짐작하고 시신을 수습하였다. 


왕릉을 훼손한 임진왜란

하지만 이 시신이 중종의 것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기 위해 원로대신에서 부터 궁중나인들까지 동원해 살펴봤지만, 50년 세월이 흘러 왕의 용안(龍顔)을 기억하는 이가 거의 없었고, 그나마 살아있는 사람들도 고령인지라 확인이 힘들었다. 


이때 남아있던 기록과 시신의 모습이 달랐고, 시신도 부패하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때문에 무지몽매한 왜군에 의해 죽어간 타인의 시체일지 모른다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혹시라도 왕의 시신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선조는 이 시신을 다른 곳에 잘 묻어주라고 명하고 문제를 종결지었다. 이후 전해내려 오는 정릉 야담(野談)에는 능에서 밤마다 비통한 울음소리가 들려와 주변 고을사람들은 옥체를 능에 모시지 않은 탓이라 했다고 전한다. 


왜란이 끝난 후 선정릉(宣靖陵)은 개보수를 하면서 새로 지어올린 수의(壽衣)를 태운 재를 관에 넣어 묻었기에, 중종 능을 비롯한 [선정릉]의 세 능상(陵上)은 모두 비어있다. 



정릉의 상설은 선릉과 같이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으나, 석물 표현에 있어서는 좀 더 사실적으로 묘사된듯해 보인다. 문무인석은 키가 크며 얼굴은 튀어나온 방울눈이 특이한데 코 부분이 일부 훼손되고 검게 그을려 있어 오랜 수난(受難)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중종은 계비 정현왕후 윤씨에게서 태어난 성종의 둘째 아들이자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성종 19년 3월에 태어나 성종 25년 진성대군에 봉해졌다. 


코가 검게 그을리고 훼손된 무인석

연산군 12년에 계속된 폭정으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연산군의 비행을 상소하여 파직되었던 전(前) 이조참판 성희안은 중추부지사 박원종과 밀약하고, 이조판서 유순정의 조력을 얻어 왕이 장단(長端) 석벽에 유람하는 날을 기해 거사계획을 도모하였다. 


이들은 연산군의 총애를 받고 있던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신윤무까지 끌어들였다. 하지만 갑자기 왕의 행차가 취소되어 거사계획이 좌절될 뻔 했으나, 호남지역의 연산군폐위 거사 격문이 한양에 나돌게 되면서 당초계획을 강행하였다. 



1506년 9월 1일 밤 진성대군은 거사통보를 받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박원종과 성희안 등은 신윤무를 비롯해 훈련원에 장사(壯士)를 규합해 먼저 광화문 밖에 있던 연산군 측근인 궁중세력 임사홍과 왕비 신씨의 오라버니인 신수근의 집에 들이닥쳐 이들을 살해했다.


이어 창덕궁 어귀 하마비동(下馬碑洞: 효창동)에서 영의정 유순과 우의정 김수동을 만나 함께, 경복궁에 머물던 성종 비이자 진성대군의 모후인 왕대비(정현왕후)의 교지를 어렵게 받아냈다. 이들은 군사를 몰아 궁궐을 에워싸고 잠자던 연산군을 습격해 옥새를 빼앗아 왕을 폐하였다. 



이어 정변 이튿날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중종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조선의 제11대 왕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날의 사건은 중종이 주도하여 일으킨 반정이 아니었기에, 집권 초 그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중종은 즉위 초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기 위해 유신(維新) 정치를 추진하였다. 


연산 조에 두 차례 사화를 겪으며 화를 당한 이들의 원한을 풀어줌과 동시에 그간 폐지되었던 유학의 상징 성균관을 원상으로 복구했다. 또한 사화를 겪으며 귀양 갔던 선비들을 소환해 중용했다. 그러나 중종초반에는 반정공신들의 견제로 정국을 주도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illustrator / 전승훈

하지만 중종 9년 이후, 주요 반정공신들이 하나둘씩 사망하면서 본격적인 정치개혁을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중종은 공신세력을 견제코자, 사림파(士林派)의 영수이자 급진 개혁론자인 조광조를 조정 정면에 중용하였다.


1515년(중종 10) 중종 조광조와 함께 조정을 장악했던 공신세력을 견제하며, 철인(哲人) 군주정치를 표방해 철저한 유교정치를 펴나가기 시작했다. 왕의 자문을 담당하던 홍문관 기능을 강화하고 중국 여씨향약을 본받아 전국적으로 향약을 실시해 향촌을 유교적 질서로 자리 잡게 하여 왕권을 강화코자 했다. 



정치적 동지였던 조광조는 지방관이던 아비를 따라 함경도에서 머무는 동안 유배 중이던 김굉필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김굉필이 사림파 연원인 김종직의 수제자였기에, 조광조가 김종직 이후 [사림파]의 맥을 계승하고 있었다. 


그는 중종 10년 알성시 알성시(謁聖試)에 급제해 사간원 정언을 역임하며 이후 벼슬이 높아짐에 따라 요순시대 이상정치인 도학(道學)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중종 조의 기록 중 특기할만한 것은 조광조 출현이후 유교정치를 뿌리내리던 중종 11년 노산(단종) 묘를 찾으라는 왕명이 내려진 것이다.


illustrator / 유환영

이는 왕실에서부터 선왕들의 잘못을 바로잡아 유교사상의 솔선수범을 보이기 위함이었거나, 세조 조부터 끊이지 않던 현덕왕후의 저주설과 이어진 선왕들의 불행을 차단코자 함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노산부인 죽기 전에 묘를 찾아내어, 또 다른 여인의 저주가 발생되지 않게 하고 자신의 치세만큼은 태평세가 되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중종 16년 노산부인은 7대를 걸친 왕대를 살며, 남편의 묘 위치조차도 모른 채 82세로 사망했다. 중종은 대군부인의 예로 장례를 치르게 하고, 중종 36년에 비로소 노산군 묘를 찾아내 묘역을 정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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