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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Oct 30. 2015

조선왕과의 만남(26)

중종릉_02


제11대 중종 1488~1544 (57세) / 재위 1506.09 (19세)~1544.11 (57세) 38년 2개월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정릉(靖陵)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 131 (선정릉 내)


조광조의 [사림파]는 민본정치를 내세워 조정의 언로 확충을 강조하고, 정치개혁을 착수하며 사회윤리를 강조한 성리학의 생활규범을 규정하는 소학과 향약의 보급운동을 추진해, 조선을 성리학적 이상사회로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조광조를 비롯한 젊은 사림파는 이상만을 추구하며 현실을 도외시하는 등 개혁과정이 너무 과격하고 급진적이어서, 반발을 불러일으키며 사림파간에 의견충돌로 알력과 반목이 일어났다. 1519년(중종 14) 조광조 등은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개혁에 걸림돌인 세력을 제거하고자 했다.



당시 권력핵심에 있던 중종반정 공신세력을 직접 겨냥해 공신 중 부당하게 작호가 부여된 76명의 공훈이 삭제돼야 한다는 위훈삭제문제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목숨을 내건 공신세력의 반격으로, 이른바 "주초위왕" 이라는 술수에서 비롯된 기묘사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지진이 자주 발생하여 중종의 근심이 컸는데, 이때 조광조와 반대 측에 있던 훈구파 남곤심정 등은 그를 빗대  권세 있는 신하가 나랏일을 제 마음대로 하고  장차 모반을 일으키려 하기 때문에 그 징조로 지동(地動)이 발생했다고 왕에게 간언했다.


지진으로 근심하는 중종

그리고 남곤 등은 연이어 말을 지어내어 "민심이 점차 조광조에게로 돌아간다." 소문을 퍼트리고 어느 날 대궐 후원의 나뭇잎에 꿀을 발라 走肖爲王이라 글을 써 벌레가 잎을 갉아먹게 했다. 이어 훈구파의 홍경주는 후궁이었던 자신의 딸을 통해 중종에게 그 나뭇잎을 보여주도록 하였다.


走肖爲王의 [走]와 [肖]를 합하면 [趙] 자가 되니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을 암시한 것이었고 그가 조광조임을 당시 정세로 보아 중종은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틈을 타 남곤, 심정, 홍경주는 야밤에 입궐하여 신무문에 이르러 왕에게 조광조의 무리가 모반하려한다 아뢨다.


illustrator / 정윤정

이때 중종이 바보가 아닌 이상, 조작된 상황임을 모를 리 없었지만 때마침 중종 조광조의 지나친 언행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때였기에 이를 빌미로 중종 14년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림세력의 옥사가 벌어지고 귀양으로 이어졌다.


이후 남곤심정의 주청으로 조광조는 38세의 나이로 70여 명과 함께 사사되었으며, 이때 죽은 사람들은 역사에서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 불러지고 있다. 기묘사화로 그동안 조정에 진출해 있던 많은 사림이 화를 당하게 되었다.



조선의 쇄신 분위기는 일단 주춤해지면서 중종치세 중반 이후는 다시 훈구파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조광조의 죽음으로 4년에 걸친 중종의 개혁정치는 막을 내렸지만, 그 영향은 조선사회에 남아 전국에 유교적 향촌질서가 자리잡게 되었으며 인쇄술의 발달로 많은 서적이 편찬되었다.


조광조의 도학정신은 젊은 선비들로 하여금 [사림파]의 정치이념으로 이어받아 조정에 진출하게 하였고, 후일 이황이이 등의 유학자에게 계승되어 선조 조에는 [사림파]가 정치를 주도하며 앞서 조광조가 주장했던 도학정치를 현실에 적용하고자 하였다.


조광조와 사림파

기묘사화 이후에도 안당 일당이 처형된 신사무옥김안로의 파직, 유세창의 모역사건, 동궁 작서(灼鼠)의 변 등이 연이어 일어났다. 작서 사건은 중종 22년 김안로(老)아들 김희 심정을 제거하고자, 중종의 총애를 받던 경빈 박씨가 그녀의 소생 복성군을 세자로 만들려했던 점을 이용해 꾸민 사건이었다.


세자(인종) 생일에 동궁 뜰 은행나무에 쥐의 입과 눈, 귀를 불로 지져 매달아 놓은 끔직한 사건이 발생했고 아울러 생나무 조각에 세자를 저주하는 방서가 발견되었다. 이튿날 대전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여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국문끝에 죄 없는 경빈복성군이 배후로 지목돼 사사됐고 경빈 박씨의 후견인 좌의정 심정도 사사되었다.


illustrator / 최달수

1531년(중종 26) 그동안 정계에서 소외되었던 김안로가 다시 집권하게 되자 조정은 더욱 혼란에 빠지며, 이에 대립한 중종 외척인 윤원로 형제가 등장하여 조정은 [훈신]과 [척신]간에 대립으로 충돌하면서 김안로는 전라도 진도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사약을 받았다. 이러한 척신의 대두는 마침내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의 전주(前奏)를 이루기도 했다.


이와 같이 중종 조는 정치적으로 조선 전기사회가 중기사회로 전환해가는 과도기적인 시기로 각종 모순이 일시에 쏟아져 나옴으로서, 반정공신들의 훈구파와 신진 사림파의 갈등뿐만 아니라 훈구파 상호간의 갈등 및 [훈구파]와 [척신파]간의 세력다툼이 극심하게 벌어지며 조정은 더욱 혼란해졌다.   


김안로(金安老)

중종 조는 정국의 불안으로 잦은 남왜북로(南倭北虜)에 시달렸다. 삼포(三浦; 제포,부산포,염포)에 거주하던 왜인들 수령이 대마도주 지원을 받아 폭동을 일으킨 삼포왜란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일본 막부와 [임신약조]를 체결하여 제포(薺浦) 하나만을 개항하고 왜인 내왕을 엄격히 제한했다.


하지만 이러한 규제에도 불구하고 추자도, 동래, 전라도에 왜변이 빈발하고 중종 말년에는 왜선 20여척이 경상도 사량진(蛇梁津)에 침입함에 따라 왜인의 내왕을 일체 금지토록 하였다. 또한 국경지대 북방야인의 침입이 빈번해, 4군과 6진 지역을 중심으로 북방 방어에 노력했으나 야인들의 부단한 침입으로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삼포왜란(三浦倭亂)

때문에 왕의 호위강화를 위해 정로위(定虜衛)를 설치하고 왜구에 대비해 비변사(備邊司)를 설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유교적 도덕윤리가 정착되어 갔다. 불교 도승제도를 폐지하고 절을 새로이 세우지 못하도록 하여 향약이 전국화 되며 유교적 향촌질서가 자리 잡게 되었다.


조광조 몰락 후에도 유교정책은 계속 추진되며 백성교화에 힘썼다. 역대실록을 등사하여 사고에 배치하고 새로운 법령을 모아 법률제도의 확립을 꾀하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저화와 동전의 사용을 적극 장려하고 도량형(度量衝)의 통일을 꾀했으며 의복, 음식, 혼인의 사치를 금하는 등, 민생안정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중종 조에는 명기였던 명월(明月) 황진이가 있었다. 정사기록이 아닌 송도기이(松都奇異)와 어우야담(於于野談)과 같은 야사에 등장하는 황진이는 진사(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나, 사서삼경을 읽고 시와 음률이 빼어났던 기개 있던 여인이었다.


동네 총각이 자신을 연모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자, 기계(妓界)에 투신해 학식과 권세를 겸비한 명사들과 교유하며, 뛰어난 시재(詩才)와 용모로 사대부들을 매혹시켰다. 그녀는 세종의 증손자인 벽계도정(碧溪都正:이종숙)을 유혹하기 위해 시작(詩作)을 통해 애정관을 표현하기도 했다. "청산리 벽계수(碧溪守)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렵거늘, 명월이 만공산(滿空山)할 제, 쉬여간들 어떠리."



중종은 재위 38년 동안 12명 아내에게서 9남 11녀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오랜 기간 왕위에 머물렀지만 살아서는 우여곡절의 삶을 살았고, 죽어서도 편히 잠들 수 없었던 불행한 군왕이었다. 연산군이 왕위에 머무는 동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숨죽이며 살아야했고, 친할머니(인수대비)에 대한 패륜적 사건 및 부왕 후궁들과 이복동생들이 참살당하는 비극도 목격해야했다.


자신의 등극 후 7일 만에 조강지처와 생이별하고 재혼한 아내마저도 이내 사별해야 했으며, 또한 선비들이 떼죽음을 당한 조선 조(朝)의 4대 사화 중 3대 사화가 중종 살아생전에 발생하여, 그는 일생을 피비린내를 맡으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야만 했다.


소혜왕후(인수대비) / 이영우 illustrator

그는 1544년 11월 14일 세자(인종)에게 양위하고 이튿날 창경궁 환경전에서 승하하였다. 죽어서는 함께 묻히기를 원했던 제1계비 장경왕후와 강제로 이별하고, 제2계비인 문정왕후 계략에 의해 명당 아닌 명당에 누워, 여름철 물난리를 겪으며 왜란 중 능침이 파헤쳐지는 수모까지 당했으니 그의 혼령이 안쓰러울 뿐이다.


하지만 세상이 변하여 그가 잠들어 있는 정릉 능역은 강남 도심의 한가운데에 자리하며, 이 나라 최고의 부를 뽐내는 백성들이 머무는 값 비싼 명당이 되어있다. 고적해 보이는 정릉의 혼령은 그나마 친부모 능역과 함께 자리하고 있기에 서로의 영혼을 보듬어주며 편안한 안식처로 남아 있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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