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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Oct 31. 2015

조선왕과의 만남(18)

예종 원비릉


제8대 예종 원비 장순왕후 1445~1461 (17세)


 illustrator / 이철원


▐  공릉(恭陵) 사적 제205호 /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4-1 (파주삼릉 내)

  

[파주삼릉]에는 비록 재위(在位)왕릉은 없지만 공릉을 중심으로 한 세 능이 있기에, 조용히 사색하며 자연 속에서 역사를 탐미할 수 있는 곳이다. 공릉산자락에 자리한 파주삼릉 중 최초로 조영된 공릉예종의 원비인 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의 단릉이다. 공릉을 들어서니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참도(參道)가 ㄱ자로 꺾여있다. 


하지만 이곳의 참도는 태조 계비 신덕왕후 정릉처럼 의도적인 꺾임이 아니라, 협소한 능역에 맞춰 조영된 것으로 보인다. 봉분은 세자빈 묘로 조성돼  병풍석, 난간석, 망주석, 무인석이 모두 생략돼 있다. 그나마 외롭게 묘를 지키고 있는 문인석은 몸통에 비해 얼굴이 커 보이는데 그 모습이 마치 요절한 장순왕후를 바라보며 애틋함을 달래고 있는 듯하다.


참도(參道)가 ㄱ자로 꺾여있는 공릉

장순왕후 한씨는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셋째 여식으로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1460년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당시 11살 세자였던 예종과 16세에 가례를 올리고 부부가 되었다. 정숙한 성품에 아름다운 용모로 시아버지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세조의 책문(冊文)을 보면 세자빈을 두고 한씨가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나 아름답고 온유하며 정숙함에 종묘의 제사를 도울만하여 왕세자 비로 삼는다며 세자빈에 대한 큰 기대를 내비쳤다. 그러나 장순왕후는 세자빈으로 봉해진지 19개월 만에 왕실 적통인 원손을 생산하고, 닷새 후 산후병으로 요절하였다. 


정자각

세조는 정성을 들여 이곳 파주의 야산지맥에 터를 잡아 세자빈을 안장하였다. 1453년 10월 계유정란으로 정권을 잡은 세조는 한명회를 국정운영의 동반자로 삼았다.


한명회는 절세의 처세가이며 탁월한 책략가이자 당대의 모사가(謀事家)였다. 그는 조선 개국공신이던 한상질의 손자이며 사헌부감찰을 역임한 한기(韓起)의 아들인데 왜소하고 볼품없는 칠삭둥이로 태어나 아비를 일찍 여의고 불우한 소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명문집안의 자손이라하여 11살이 넘자 중추부사 민대생의 사위로 장가를 들었는데 부인 민씨는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그의 딸들도 모안(母顔)을 닮아 매우 예뻤다. 그는 과거시험의 운이 없어 낙방의 세월을 보내다가, 문음제도(門蔭: 공신자손 특별채용)에 의해 문종 2년 38세의 늦은 나이에 개성 경덕궁 궁지기가 되었다.     


그는 수양대군의 좌장이었던 권람의 주선으로 수양의 책사가 되면서 세조가 등극하자 승승장구 하였다. 3대왕에 걸쳐 정권의 핵심에서 권부수장을 지내며 임금을 사위로 맞아들여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이 과정에서 한명회는 해양대군(예종)과 셋째 딸(장순왕후)을 혼인시켰다.



또한 1467년 자신이 영의정으로 있을 때 넷째 딸(공혜왕후)을 의경세자(덕종) 차남인 자을산군(성종)과 혼인시켜, 겹사돈을 맺는 대단한 처세술을 지닌 뻔뻔한 아비였다. 셋째 딸 장순왕후는 11살 터울인 넷째 딸 공혜왕후의 친정 언니이자, 시댁숙모의 관계였다.


조선초기라 성리학이 뿌리내리지 못한 탓인지, 지엄을 갖추어야할 왕실의 촌수가 오히려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장순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1466년(세조 12) 한명회는 영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그가 반역을 도모함에 따라 난을 일으켰다고 이시애가 무고하여 옥에 갇히기도 했다.


illustrator / 정윤정

셋째사위가 즉위하자 1469년(예종1) 영의정에 복직했고 막내사위 성종 즉위년에 세 번째 영의정에 올랐다. 또한 네 차례나 일등공신에 추대되는 진기록을 남기며 엄청난 부와 권력을 누렸다. 


노년에는 압구정동의 한강변에 압구정이란 정자를 짓고 갈매기와 벗하며 한가롭게 살기를 원했다. 하지만 [압구정]에서 명나라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한 일로 탄핵돼 삭탈관직 되고,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천하의 한명회연산군 때 폐비윤씨 사건에 연루돼 부관참시의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야사에 전해지는 것처럼 세조의 직계자손들이 요절한 것이 단종어미 현덕왕후의 저주 때문이라면, 장순왕후(예종 원비)와 공혜왕후(성종 원비)의 요절 또한 세조를 꼬드겨 계유정난을 주도하고 살생부를 작성해 수많은 피를 흩뿌렸던 아비 한명회에 대한 현덕왕후(顯德王后) 저주였을지 모를 일이다.


세자빈이 세상을 떠나자 세조는 총애하던 며느리의 죽음에 비통해하며, 너그럽고 아름다우며 어질고 자애롭다는 의미에 장순(章順)이란 시호를 한씨에게 내리고 세자빈 묘를 조성했다. 1470년(성종1) 장순왕후로 추존되고 1473년 능호를 공릉이라 하여 왕후 예를 갖춰 제사를 지냈다고 하나, 당초 세자빈 묘로 조성됐던 까닭에 능역이 초라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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