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주 Oct 31. 2015

조선왕과의 만남(21)

성종 원비릉


제9대 성종 원비 공혜왕후 1456~1474 (19세)



▐  순릉(順陵) 사적 제205호 /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4-1 (파주삼릉 내) 


[파주삼릉] 입구를 지나서 우측 안쪽 깊숙이 들어서니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 능이 나타난다. 순릉은 [파주삼릉] 중에서 중앙능선의 동쪽 끝자락에 자리해, 서쪽을 바라보는 묘좌유향(卯坐酉向)을 이루고 있기에 유좌묘향(酉坐卯向)인 공릉(예종원비)과는 반향(反向)을 이루고 있다. 


세조의 유훈에 따른 병풍석이 생략되었을 뿐 모든 석물제도를 갖추고 있으며 문무인석 표정이 사실적으로 조각돼있다. 순릉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공릉에 비해 왕비의 예를 다해 조영돼 있었다. 춘관통고(정조12)에 따르면 공릉순릉은 주변둘레가 24리로 기록돼있으나,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왕실재산을 찬탈하는 과정에서 많은 면적을 상실케 되었다고 전한다.    



조선왕조실록 기사(記史)에는 1648년(인조 26) 순릉의 혼유석과 문무인석이 훼손되고 정자각의 신문(神門)이 부서졌으며, 1667년(현종 8)에는 제기를 도둑맞는 등 수난을 겪었다 한다. 또한 1699년(숙종25)과 1757년(영조33) 순릉에 큰 호랑이가 출현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순릉주변은 수목이 울창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1930년경 일제는 공릉을 약 3만4천평, 순릉과 영릉을 약 2만3천평으로 축소하고 이 밖의 지역을 동양척식회사에 임대하여 조선시대 잘 가꿔온 [파주삼릉]의 전나무 숲을 남벌했다. 이곳 주민들은 이 지역을 지금도 전나무 골이라 부르고 있기에, 일제에 의해 사라져버린 파주 송림(松林)에 대한 아쉬움이 짙게 남는다. 



공혜왕후 한씨는 영의정 한명회의 넷째 여식으로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성종의 첫째 왕비이다. 그녀는 아비 한명회의 야심에 의해 12세(세조 13)에 가례를 올려 군(君)부인이 됐다. 1467년(세조 12) 성종을 자을산군으로 봉하고 마땅한 배필을 찾았는데, 한살 위인 한씨가 덕 있는 용모를 지녔음을 확인하고 혼인을 정했다. 


왕비책봉 후에도 언행이 온화하고 정숙하여 세조부부가 매우 사랑했다 한다. 또한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왔으나 예의 바르고 효성이 지극해 궁내 어른인 세조비(정희왕후), 덕종비(소혜왕후), 예종계비(안순왕후)의 귀여움을 받았다. 


illustrator / 이철원

그녀는 남편 성종이 폐비 윤씨를 왕궁에 들였을 때에도 투기하지 않고 직접 옷을 지어주며 패옥(佩玉: 궁복에 차던 옥)을 하사하는 덕을 보이기도 하였다. 불행하게도 14세 왕비에 오른 공혜왕후는 18세 무렵에 병환이 깊어져 친정으로 거처를 옮겼다. 


성종은 생일잔치까지 물리며 하루걸러 그녀를 찾아 간호했다. 이후 환궁을 했지만 왕비의 병치레는 계속됐다. 이듬해 창덕궁 구현전(求賢殿)으로 거처를 옮겨 성종과 세 왕후가 날마다 거동해 보살피며, 그녀의 쾌유를 빌었으나 성종 5년 19세를 일기로 이승을 등졌다. 



왕비로서 자식을 낳지 못한 부담감에 따른 스트레스와 삼전(三殿)을 모시는 과중한 업무까지 더해진 것이 요절 원인이었을 것이다. 시할아버지의 왕위찬탈을 주동했던 아비 한명회의 죄 값을 대신 치른 탓인지, 한명회가 정략적으로 왕비를 만든 두 딸은 모두 요절 했고 후손도 남기지 못했다.


1474년 4월 공혜왕후는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인데, 세 왕후를 모시고 효도를 다하지 못해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을 한탄할 뿐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는데, 이에 성종은 "공경하는 마음으로 윗사람을 섬기고 너그럽고 인자했다"하여 공혜(恭惠)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녀는 [파주삼릉] 서편에 자리한 공릉의 장순왕후와 자매간이다. 조선왕조에서 이렇게 자매가 나란히 왕비에 오른 경우는 전무후무하다. 뿐만 아니라 한명회의 첫째 딸은 신숙주의 장남 신주(申澍)와, 둘째 딸은 명문거족 충경공 윤사로의 장남 윤반(尹磻)과 혼인했다.


당시 한명회의 권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녀의 친언니 장순왕후가 13년 전 안장됐던 공릉부근을 정인지신숙주, 정창손서거정 등이 살피고 묘좌유향(卯坐酉向)에 터를 잡았다.



자매였던 장순왕후와 공혜왕후는 궁에 들어가서는 시숙모와 조카며느리 관계로 살다가, 죽어서는 500년간 100여m 거리의 다른 언덕에 잠들어있다. 그러나 공릉과 순릉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능선사이에 관통도로가 만들어져 능역의 혈기(血氣)가 끊기고 말았다. 


다행히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최근 관통도로가 폐쇄됨에 따라, 지엄한 궁중에서 주눅 들어 살다 죽어나간 가련한 두 자매의 혼령이 그나마 자유로이 오가며 무료함을 달랠 수 있게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조선왕과의 만남(18)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