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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Oct 31. 2015

조선왕과의 만남(22)

성종 폐비묘


제9대 성종 폐비 윤씨 1445~1482 (38세)

 


▐  회묘(懷墓) 사적 제200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8-4 (서삼릉 내)


폐비 윤씨가 잠들어있는 회묘는 한때 왕비릉이었다. 하지만 역사에는 이곳이 묘로 남아있다. 불과 2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회릉이라 했고, 그때의 능상과 석물 등 무덤의 격식이 왕릉과 다름없으니 외양만으로 본다면 능(陵)이라 할 수 있다. 고양시 원당의 서삼릉(西三陵) 지역에 있는 윤씨 묘는 평상시 공개하지 않는다. 


회묘는 한 달에 한번 해설사를 뒤쫓아 잠깐 둘러보는 기회를 이용할 수 있다. 폐비 윤씨의 [회묘]는 원래 동대문구 회기동 지금의 경희대학교 정문 옆 자리였으나, 경희의료원이 세워지면서 1969년 현재의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이장되었다. 


서삼릉 회묘 입구

성종은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리기는 했지만, 세자를 생각하여 당시 양주 땅이던 망우리 윤씨의 묘에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그는 초라하게 자리 잡은 생모 윤씨의 [회묘]를 양주 천장산(天藏山: 現 고황산)아래로 이장해 석물 등을 설치하는가 하면, 왕비 능에 걸맞게 꾸미고는 명칭도 회릉(懷陵)으로 고쳐 부르게 함으로서 이 지역은 회릉리로 불리게 되었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회릉]은 다시 회묘로 격하되고 [회릉리] 회묘리로 바꿨다. 세월이 흐르면서 회묘의 품을 회()가 돌아올 회()로 바뀌어 회묘리(回墓里)로 불리다가 1914년 묘(墓)자가 좋지 않다고 하여 회기리(回基里)로 바뀌고, 1946년 다시 회기동으로 바뀌게 되었다.


폐비 윤씨 회묘

폐비 윤씨는 봉상시판사 윤기무의 여식으로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성종의 두 번째 왕비로 제1계비이다. 성종4년 후궁으로 간택돼 숙의에 봉해지고 뛰어난 자태와 미색을 겸비해 왕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가 죽자, 성종보다 12살 연상이던 윤씨는 임신한 몸으로 성종 7년 7월 왕비에 책봉돼 4개월 뒤 원자(연산군)를 낳았다. 


당시 성종은 자식이 없던 터라 윤씨를 매우 총애하여 중전의 위치가 확고해졌으나, 그녀는 집안배경이 한미(寒微)하고 힘이 없었다. 그에 비해 시어머니 인수대비는 막강한 집안이었고 [훈구세력]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윤씨는 자신보다 8살 위였던  인수대비와 잦은 대립을 하며 다른 후궁들을 시샘하기에 이르렀다. 



성종실록 기사(記史)를 보면 당시 대왕대비(세조비)는 첫 손자를 잉태한 폐비 윤씨를 왕비로 책봉했지만, 자신의 친정 족친(族親)이던 숙의 윤씨(정현왕후)가 왕비가 되지못한 서운함 때문인지 축하연서 청해진 술잔을 거절했다 한다. 성종 8년 왕비의 친잠(親蠶)이 끝난 후 윤비가 대왕대비를 위해 베풀려한 진연(進宴)을 또다시 거절하는 일이 있었다.


보름 뒤 덕종(의경세자) 후궁처소에서, 성종 후궁 엄씨정씨가 중궁전과 왕자를 모해한다는 투서가 발견돼 이들을 처벌하려 했으나, 성종이 중궁처소에서 비상과 연시를 넣은 주머니를 직접 발견함에 따라 폐비 윤씨는 왕과 주변 후궁을 독살하려했다는 혐의를 받게 됐다. 



그러나 이 사건은 윤씨가 후궁을 질투해 꾸민 사건으로 종결지어졌다. 또한 임금이 궁녀와 오붓하게 즐기는데 뛰어들거나 대비에게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는가하면, 아들이 왕이 되면 두고 보자 실언하며 임금에게 맞았다고 무언(誣言)하고 궐을 나가겠다며 소동을 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조정에서 첫 번째 폐비론이 거론됐다. 하지만 신하들의 완곡한 반대로 성종은 왕비와 화해한 후 폐출을 철회하였다. 그 대가로 원자를 궐 밖에서 위탁양육하게 하고 왕비 생일 축하연도 취소시키는 등  당시 윤씨로서 참기 힘든 처사들이 뒤따랐지만, 그녀는 성종 9년 또다시 임신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왕성한 정력가 성종은 이미 여러 젊은 후궁들에게 관심이 쏠려 있었다. 이듬해 윤씨는 다시 대군을 낳았으나 다른 후궁들 역시 많은 자식들을 낳고 있었기에 왕의 총애가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윤씨는 둘째 아들을 낳자마자 불타는 질투심으로 남편의 얼굴을 할퀴어 손톱자국을 남겼고, 이 일로 인수대비(仁粹大妃)는 크게 진노했다. 결국  2년 전에 있었던 비상(非常)사건과 투서사건이 빌미가 되어 성종 10년 유월 폐출돼 사가로 쫓겨났다.


인수대비(仁粹大妃)

며칠뒤 윤씨의 둘째 아들이 사망했는데 석 달 뒤 성종이 새로운 후궁 권씨를 숙의로 책봉해 입궁시키는 일이 벌어지자, 임금이 후궁을 너무 많이 두는 것에 대한 상소가 올라오기도 했다. 


뜻밖에 실록에는 군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냈다는 기록이 없고, 야사총서인 [연려실기술]에만 기록돼 있을 뿐이다. 역사는 승자 편에서 기록되다 보니 실록보다는 야사의 기록이 더 정확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야사에서 인용한 자료의 손톱자국은 그저 생채기가 용안(龍顏)에 났다는 정도로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그녀의 출궁은 성종이 후궁의 침소에 갔을 때 윤씨가 왕이 머물러 있는 후궁 침소에 무작정 쳐들어간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 


출궁 후 그녀는 친정집에서 머물며 자중하고 지내는 동안 세자가 장성함에 따라 폐비 윤씨의 처우문제가 쟁점화 되면서 여론도 폐비에 대한 동정론으로 기울어갔다. 어느 날 성종은 윤씨에 대한 연민으로 후궁 엄씨와 정씨를 보내 은밀히 윤씨의 형편을 알아보라 하였다.


illustrator / 이철원

 이들은 염탐관리에게 뇌물을 주어 폐비가 잘못을 뉘우치기커녕 날마다 왕실을 저주한다고 거짓을 아뢰도록 모함해 성종을 진노하게 했다. 부부의 정이 남아있어 고민하던 성종은 조정대신을 불러 모아 윤씨 문제를 논의했으나 결국 사사(賜死)하게 되었다.


그녀가 사사된 것은 자신의 잘못도 있지만 왕의 총애를 받던 엄숙의정숙의 그리고 성종 모(母)인 인수대비가 합심해 윤씨를 배척한 것도 하나의 이유로 볼 수 있다. 


illustrator / 전지은

그녀는 죽어가며 토한 피를 적삼에 묻혀 세자에게 전해달라고 유언했다. 성종의 결정은 세자가 왕위를 물려받았을 때 왕권을 위시해서 윤씨가 더 큰 악행을 저지를 것에 대한 예방차원 이었지만, 이는 후일 갑자사화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폐비 윤씨의 무덤은 당초 묘비도 없이 버려져 있었다. 그 후 7년이 지난 성종 20년에 “윤씨지묘”라는 표석을 세우도록 허락했다. 묘하게도 성종은 폐비 윤씨와 같은 38세 나이에 이승을 하직했다. 



슬픔과 한(恨)을 품은 여인 윤씨는 왕이 된 아들에 의해 다시 세상의 이야기로 회자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임금이라 해도 거대한 권력구조 속에서 어미를 복권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1504년(연산군10) "폐비의 추숭을 허하지 말라"는 성종의 유교를 무시하고, 연산은 끝내 폐비 윤씨를 복권시켜 제헌왕후로 추숭하고 묘호를 품을 회(懷)를 써서 회릉으로 격상하여 추봉하고 능상과 석물을 왕릉수준으로 재 단장하였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의 폐위와 함께 폐비 윤씨는 다시 관작이 추탈되는 수모를 겪게 되고 회릉은 다시 윤씨 묘로 강등되었다. 윤씨 묘역에 칼을 짚고 갑옷을 입은 무인상이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 역사한편의 슬픔을 간직한 억울한 어미의 죽음을 애닮아 하던 연산군도 석물의 표정처럼 저리 닮았을지 애처로움이 더해진다. 


다행히 회묘는 한(恨)이 많은 묘인지라 무덤을 건드리면 동티난다는 민간속설에 의해 능지기 없이도 비교적 잘 보존돼 왔다. 이토록 폐비 윤씨는 이 아닌 에 홀로 외로이 잠들어 오늘날까지도 모진 풍상을 이겨내고 있다.  - 庚寅年 십일월 초여드렛날


슬픈 얼굴의 무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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