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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Nov 05. 2015

조선왕과의 만남(27)

중종원비 및 제1계비 능


제11대 중원비 단경왕후 1487 ~ 1557 (71세)



▐  온릉(溫陵) 사적 제210호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산19


1506년 9월 시녀(侍女) 한명만을 데리고 궁궐을 빠져나와 인왕산을 오르는 여인이 있었으니, 그가 단경왕후 신씨이다. 그녀는 중종반정 공신들에 떠밀려 폐비가 되고 설상가상으로 중종과 생이별을 했지만 남편에 대한 깊은 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신씨는 인왕산자락 하성군 정현조(세조 사위) 집에 잠시 머물며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인왕산에 올라 경복궁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느 날 중종이 자주 경회루에 올라 이곳을 바라본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치마바위를 바라보는 중종

신씨는 궁궐에서 입던 다홍치마를 경회루에서 잘 보이도록 인왕산 병풍바위 밑 우뚝한 바위 위에다 아침에 내다 걸어놓고 저녁에 거둬들였다. 이런 연유로 이 바위는 지금도 치마바위(裳岩)로 불러지고 있다. 


신씨는 익창부원군 신수근의 여식으로 본관은 거창(居昌)이며, 연산군 5년 13세에 진성대군과 가례를 올려 부부인에 책봉되고 중종반정으로 왕후에 올랐다. 당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있었던 진성대군은 생모 정현왕후의 혜안(慧眼) 덕분에 신수근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녀가 연산군의 아내 신씨의 조카가 아니었다면, 중종은 연산군에 의해 이미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부인 신씨중종의 목숨을 지켜준 일등공신이었다. 


하지만 그녀 아비가 매부인 연산군을 위해 반정을 반대했기 때문에 역적으로 몰려 살해당함으로서, 그녀는 역적의 딸이라 하여 7일 만에 20세로 폐위돼 조선왕실 중 가장 짧은 기간 왕비에 머물렀던 여인으로 역사에 남아있다.



연산군에 반발하는 세력의 정점에는 성종의 적자로 명분과 정통성을 갖춘 진성대군이 있었다. 1506년 신수근이 좌의정으로 있을 때에 반정을 모의하던 박원종(朴元宗)이 신수근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찾아가 "누이와 딸 중 어느 편이 소중하냐?"라고 물었다.


신수근은 이것이 반정에 참여하라는 뜻임을 알아채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지금의 임금이 비록 포악하나 세자가 총명하니 세자를 믿고 살겠다."라고 하였다. 연산군의 처남이자, 진성대군의 장인인 은 이러한 사실을 연산군에게 고변하지 않고 모든 것을 역사의 운명 앞에 내려놓았다. 



그는 결국 중종반정 때에 제일 먼저 수각교에서 살해되고 누이와 딸도 폐출되는 비극을 맞이하였다. 반정당일 사태파악을 할 수 없었던 진성대군은 갑자기 군사들이 자택을 에워싸자, 자살을 결심할 정도로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때 부인 신씨는 집 밖으로 나가 군사들의 말머리가 집 밖으로 향한 것을 확인하고는, 군사들이 자신들을 보호해주기 위한 것임을 알려 남편을 안심시켰다. 곧이어 진성대군이 입궐해 왕으로 추대되는 동안 사저에 머물던 그녀는 죽임을 당한 아비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illustrator / 최달수

이튿날 반정으로 왕이 된 중종은 서둘러 신씨를 왕비로 책봉했다. 그는 현명한 아내를 곁에 두고 의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사로운 정 때문에 종사를 그르칠 수 없다는 공신들의 집요한 요구를 중종신씨에게 전하자, 오히려 신씨가 남편 중종을 위로 하였다고 한다. 


결국 신씨는 자신이 원한 것도 아닌 반정으로 남편과 친정 모두를 잃은 채, 뒷날의 화를 염려한 박원종 등에 의해 폐출되고 말았다. 슬하에 자녀도 없었으니 당시 상황에서 중종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을 게다. 그녀는 잠시 머물던 죽동궁(竹洞宮)을 떠나 조부 신승선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고모인 [연산군 부인] 신씨와 함께 한 집에서 왕비에서 폐위된 두 여인으로 살았다. 



신승선은 성종 조에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로 신씨는 명문가에서 간택됐던 왕비였다. 중종 9년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가 세자를 낳고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사림파]들은 새로운 왕비간택 대신 사저에 있는 신씨를 복위시켜야 한다고 상소를 올려 한바탕 파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신씨가 복위될 경우 장경왕후 윤씨가 낳은 원자의 지위가 문제가 되어, 신씨 복위문제는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또한 [훈구파]와 싸움에서 밀려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 대다수가 유배지서 사약을 받거나 삭탈관직을 당했던 기묘사화로 그나마 신씨 복위를 논했던 사림파(士林派)가 몰락하면서, 그녀의 복위도  완전히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단경왕후 온릉(溫陵)

신씨중종이 꼭 다시 부르겠단 말만 믿고 궁에서 쫓겨나, 자식도 없이 그리움을 삭이며 71세의 나이에 한 많은 세상을 떠나 친정인 거창신씨 집안 선산에 묻혔다. 명종은 부왕 중종의 조강지처였던 신씨의 죽음소식에 그녀가 살던 집을 폐비 궁으로 승격시키고 노비와 전답을 하사하였다. 


이후로 신씨가 궁궐에서 쫓겨 난지 233년이 되던 영조15년 단경왕후로 추존되고 온릉이란 능호가 내려졌다. 실록에는 예(禮)를 따르고 의(義)를 지켰던 것을 단(端)이라 하고 늘 공경하고 조심했던 것을 경(敬)이라 한다고 돼있는데, 온릉은 지아비인 중종의 따스한 정을 그리워하여 붙여진 이름인 듯싶다. 


  

통일로에서 의정부 쪽으로 가는 39번 국도변에 출입금지 표지가 있는 온릉은 도로에서 울타리 안쪽 숲에 가려져 능의 모습을 볼 수 없다. 7일간에 찰나의 영화(榮華)와 51년간의 그늘 속에서 싸늘히 살아야 했던 단경왕후의 온릉은 비공개 능으로 외부인과 차단되어 있기에, 그녀의 고혼(孤魂)을 보듬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는 마음이 괜스레 저미어 온다.  - 庚寅年 십일월 스무날



제11대 중종 제1계비 장경왕후 1491 ~ 1515 (25세) 


▐  희릉(禧陵) 사적 제 200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40-4 (서삼릉 내)


1515년(중종 9) 28세였던 중종은 왕통을 이어갈 적자가 태어남에 매우 기뻐하였다. 더욱이  등극한지 10여년 만에 얻은 원자(인종)이었기에 장경왕후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이 더했다. 하지만 그녀는 스물다섯 나이로 출산 7일 만에 산욕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윤씨는 임신 중 꿈에 나타난 선인이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억명(億命)으로 지으라고 했던 자신의 꿈 이야기를 죽기 전 남편에게 글로 써서 올렸다. 하지만 인종의 이름을 억명으로 부른 흔적은 없어 보인다. 당초 경기도 광주 대모산 아래 태종의 헌릉 서쪽언덕에 윤씨의 희릉을 조영했으나,  22년 후인 중종32년 그녀의 능을 서삼릉(西三陵) 능역으로 천장함에 따라 [서삼릉] 내에 최초로 능이 조성되었다.



왕비가 죽자 좌의정 정광필을 3도감(빈전, 국장, 산릉) 총호사로 삼아, 중종은 자신의 수릉과 함께 쌍릉 터를 조성하고자 풍수지를 택한 끝에 헌릉 옆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런데 중종의 사돈이던 이조판서 김안로(金安老)가 세자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정적이던 정광필남곤 등을 제거하기 위해 천릉사건을 일으켰다. 


희릉 봉분 밑에 큰 돌이 깔려있어 불길하고 능침의 돌이 물에 젖어 있는 흉당이라며 천릉(遷陵)을 주장했다. 이때 중종은 백성에게 피해를 준다며 천장을 반대했으나, 김안로는 집요한 주청으로 중종의 허락을 받아내며 왕비를 흉당에 묻은 죄를 물어 능역조성 당시 연루된 정광필 이하 관련자들의 신분을 박탈하고 처벌하는 옥사를 일으켰다.



그로부터 7년 후 중종이 승하하자 유명(遺命)을 받들어 중종 능을 [서삼릉] 능역 희릉 곁에 동원이강으로 조영하고 능호를 정릉(靖陵)으로 바꿨다. 그 후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요절하며 그의 유지에 따라 부모 곁에 묻혔는데 이 능이 서삼릉의 효릉이다. 이로써 [서삼릉]은 부자내외가 단란하게 잠들어 있는 가족능역을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남편이 제1계비와 나란히 누워있는 것에 대한 질투심을 참지 못한 제2계비 문정왕후의 주장으로 왕비 능은 그대로 두고, 중종의 능만 파헤쳐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선릉 곁으로 다시 천장하였다. 이런 연유로 장경왕후의 능은 다시 단릉(單陵)으로 남아 또다시 희릉으로 불리게 되었다. 



윤씨는 영돈령부사 윤여필의 여식으로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반정 주도세력이었던 윤임의 여동생으로 중종원년, 외종숙인 반정공신 박원종의 천거로 16세에 궁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숙의에 봉해지고 단경왕후 폐위 이듬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윤씨는 당시 여자로서는 드물게 글을 익혀 경서(經書)에 능했으며 자애롭고 총명하며 덕을 갖춘 여인이었다. 


그 때문인지 한때 원비였던 단경왕후를 못 잊어했던 중종은 이승을 떠나며 현숙했던 장경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했다. 중종이 사랑했던 윤씨의 능침은 짧은 세월을 조용히 살다간 그녀 인생만큼이나 단아한 느낌이지만, 남편 천장 후 홀로 남아있을 혼령(魂靈)이 적막해 보일 뿐이다.

    

서삼릉 내 희릉(禧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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