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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Nov 05. 2015

조선왕과의 만남(28)

중종 제2계비 능


제11대 중종 제2계비 문정왕후 1501 ~ 1565 (65세)

      


▐  태릉(泰陵) 사적 제 201호 /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산313-19 (태강릉 내)


옛 부터 삼각산은 살아있는 임금을 지키는 산이요, 불암산은 돌아가신 임금을 지키는 산이라고 하였다. 그런 탓인지 태릉의 진산인 [불암산] 주변에는 태강릉동구릉 등 왕릉이 산재돼있다.


유교가 뿌리내리던 시기 조선의 측천무후(則天武后)라 불릴 정도로 철(鐵)의 여인정치를 주도했던 문정왕후가 잠들어있는 태릉은 왕비의 단릉이라고 믿기 힘들만큼 웅장하게 느껴지는 능이다. 이는 문정왕후가 살아있을 당시 그녀의 위력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문정왕후 태릉(泰陵)

명종 20년 4월 문정왕후는 창덕궁 소덕당(昭德堂)서 65세에 일기를 마감하여 시호가 올려지고 능호를 신정릉(新靖陵)으로 정했으나, 두어 달이 지나 다시 태릉으로 변경하고 그해 7월 현재의 위치에 예장되었다. 문정왕후는 자신의 사후에 중종 곁에 묻히기를 소원하였다.


하여 [서삼릉] 능원 내 장경왕후 능 옆에 있던 중종의 능을 봉은사주지 보우(普雨)와 상의해 현재 [선정릉]의 정릉자리가 풍수상 길지라며 천장하였다. 하지만 새로 옮긴 중종의 능은 지대가 낮아 여름철이면 한강물이 재실까지 차올라와 홍수피해가 자주 일어나는 흉당이었다.



문정왕후는 자신이 훗날 이곳에 묻힐 욕심으로 매년 능역에 흙을 돋우는데 국고를 탕진해가며 관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남편 곁에 함께 묻히지 못했다. 그녀가 막상 세상을 떠나던 해에도 홍수가 나자 정릉에서 장사를 지낼 수 없게 되면서 결국 중종과 함께 묻히고자 했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태릉에 홀로 묻히게 된 것이다.     


이때 중종의 능을 태릉으로 옮기자는 조정의견이 있었지만, 두 차례의 천장 불가론으로 중종의 정릉은 그대로 남아있게 되었다. 태(泰陵) 능침에는 봉분아래 구름과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병풍석을 둘렀으며 그 주위에 난간석을 둘렀다. 병풍석 위 만석(滿石)중앙에는 십이간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원래 십이간지를 문자로 쓰는 것은 병풍석을 없애고 신상(神像)을 대체키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등장한 것인데 태릉의 능침은 신상과 문자를 함께 새겨 넣었다. 특히 문무석인은 얼굴과 몸통의 비례가 1대 4 정도로 머리 부분이 크며 키가 거대한 형태이다.


따라서 태조건원릉보다 웅장한 느낌을 주는데 당시 이러한 태릉의 상설규모를 두고, 이를 지적하는 상소가 빗발쳤다고 한다. 문정왕후 윤씨는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여식으로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그녀는 중종 10년 제1계비 장경왕후인종을 낳은 뒤 7일 만에 승하하자, 2년 뒤 17세에 세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



당시 반정공신 세력들은 저마다 사리사욕에 혈안이 되어 서로 분열되고 있었다. 반정공신이자 세자의 외삼촌이던 윤임중종의 총애를 받던 후궁 경빈 박씨를 견제하고, 어미를 잃은 세자를 보호해주기 위해 세자를 보살펴 줄 왕비로 자신 가문에 윤씨를 왕비후보로 밀었다.    


이때 윤씨는 어미 없이 자랐지만, 당시 여자아이들이 교육에서 배제돼있던 것과 달리 집안에서 글을 배우고 학문을 익혀 아비 윤지임으로부터 아들들보다 뛰어나다는 얘기를 들을 만큼 총명했다. 왕비에 오른 윤씨의 초기 삶은 자신보다 나이 많은 후궁들의 견제와 딸만 넷을 낳은 탓에 별반 주목받지 못했다.


illustrator / 이철원

또한 반정공신들의 세력에 흔들리는 힘없는 왕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자신이 언제 단경왕후의 처지가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며 살아야 했다. 이런 연유로 윤씨는 세자의 보호자임을 자처하면서 세자를 끼고 돌며 자신의 안위를 유지했다. 


이후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낳자, 세자를 위협할까 의심하던 윤임의 견제를 받으며 중종이 총애하던 경빈 박씨와 그 아들 복성군이 "작서(灼鼠)의 변"과 같은 정쟁에 휘말려 죽는 모습도 지켜보았다.  젊은 날에 문정왕후는 바늘방석과 같은 왕비자리에서 굴욕을 참아가며 그 참담함을 고진감래를 향한 경험으로 체화시켜 나갔다.



문정왕후중종과 혼인한지 17년 만에 30대 후반 나이로 훗날 명종이 되는 경원대군을 낳음으로서 본격적으로 정쟁에 끼어들게 되었다. 지난 긴 세월동안 윤씨가 방패막이 삼아 싸고돌며 키워온 세자였지만, 그녀가 경원대군을 낳게 되자 세자(인종)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 제거해야 할 정적이 되었다.


세자를 끌어내리고 경원대군에게 다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서, 문정왕후는 적극적으로 정쟁에 뛰어 들었다. 그녀는 오라비 윤원형과 그의 첩 정난정 등의 도움을 받으며 세자를 보호하려는 윤임의 세력과 맞섰다.


이로써 조정에선 세자를 폐하고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小尹(윤원형)과 기존의 세자를 지키려는 (윤임) 간에 권력다툼이 일어나게 되었다. 문정왕후는 세자를 없애고 경안대군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동궁(東宮)에 불을 지르기도 하고, 무속을 이용해 저주하며 한편으로는 윤임김안로 등을 내세워 자신을 폐위시키려는 음모에 대해 날카롭게 대응했다.



중종이 승하하면서 인종이 즉위하자, 그동안에 병약한 세자를 내치기 위해 온갖 술책을 동원했던 노력은 물거품이 되면서 그녀의 정적이었던 [대윤세력]이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이로 인해 울분을 삭히지 못하던 문정왕후인종에게 탄식하길 "대윤의 득세가 당당하니 앞날이 캄캄하여 이제 외로운 자식하나 보전치 못하겠구나.


아예 절로 들어가서 선왕의 명복이나 빌어야겠다."라며, 자신을 키워준 문정왕후에게 효심을 품고 있던 인종을 근심스럽게 하였다. 이때 윤씨는 권력을 잡은 윤임에게 대놓고 맞서지 못한 반면, 심약한 인종에게 여러 가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힘들게 했다.



효심이 깊었던 인종은  대비전 앞에 거적을 깔고 며칠씩 엎드려 빌었지만, 그녀의 포악함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결국 인종은 확인되지 않는 독살설에 의해 재위 8개월 만에 자식도 남기지 못하고 이승을 떠났다. 중종의 유일한 적자로 남은 경원대군이 12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문정왕후는 8년간의 수렴청정을 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문정왕후는 명종에게 정사를 일일이 지시하며, 왕이 자신의 생각을 따르지 않으면 "네가 왕이 된 것은 모두 나의 힘이다"라며 윽박지르고 때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문정왕후는 권력을 거머쥔 뒤에, 먼저 자신을 핍박했던 [대윤세력]을 일소하기 위해 을사사화를 일으키며 다시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대윤세력]윤임이  봉성군(중종 8남)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고 [소윤일파]가 무고해 일으켰던 을사사화윤임일파가 제거되며, 인종 때 등용됐던 사림들도 대거 피해를 보았다. 이는 표면적으로 [대윤]과 [소윤]의 정쟁이었으나, 내면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훈구세력]과 이를 개혁하려는 [사림세력]간의 갈등이었다.


이때 [사림세력]이 정계에서 축출되고 [훈구세력]이 승리했지만 사림들은 훗날 선조 조에 대거 중앙에 진출해 을사사화를 일으킨 문정왕후와 그 일파를 명종실록에 기록하는 위치에 서있었으니, 예나 지금이나 쳇바퀴 도는 권력의 끝판은 결국 허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사 이치인 듯싶다.



1547년(명종2) 광주부(廣州府) 양재역에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이 권세를 휘둘러 나라가 망하려하는데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벽보가 붙었다. 이 벽서사건은 [을사사화]에 이은 큰 피바람을 일으키며 문정왕후는 반대파를 유배시키거나 죽이는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다.


문정왕후의 섭정이 당시 선비들에게 어떻게 비춰졌는지는 대학자 조식(曺植)이 벼슬을 사양하며 올린 상소에 잘 드러나 있다. "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가지 재앙과 억만 갈래 민심을 무엇으로 감당해 내며 수습하겠나이까?"라고 하였다.


    

을사사화를 일으켜 정적을 제거한 문정왕후는 당시 그녀에 대한 불충한 언급이 금기가 될 정도로 커다란 권력을 거머쥐며 명실상부한 최고의 통치자로 군림하였다. 조정의 중요사안 발생 시 중론을 모으는 과정에서도 대신들과 몇 시간씩 토론을 하는 등 남성들에 조금도 밀리지 않고 정치를 해나갔다.


1553년 수렴청정을 물린 이후 명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그녀는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서 정계와 학계에서는 문정왕후가 여인으로서 조정을 주무르며 권력을 휘두른 것에 대해 매우 불편한 심사를 드러냈다. 


명종실록에는 "서경(書經) 목서(牧誓)에,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이 다함이다. 했으니 이는 윤씨를 지칭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선비들은 숭유억불 시대에 문정왕후가 펼친 불교정책에 대해서도 불만을 갖고 있었다.


illustrator / 이영우

그녀는 도첩제를 실시해 승려를 뽑고,전국 300개의 절을 공인하는 등 불교 중흥을 도모했다. 양주 회암사에 있던 보우봉은사 주지로 임명하고, 중종과 함께 묻히기 위해 봉은사 근처에 중종의 능을 천장하기도 했다. 폐지되었던 승과를 부활시켜 불교 교단의 활기를 불어넣었다.


이로 인해 유생들은 문정왕후의 불교정책에 심한 반발을 보이며 각지에서 보우를 타도하란 상소와 종단 및 승과 폐지상소가 빗발쳤다. 요승(妖僧) 보우를 죽여야 한다며 유생들은 성균관을 비우는 집단시위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보우를 도대선사로 올리며 불교정책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성난 유생들은 회암사로 몰려가 불상 목을 자르고 절을 불질러버렸다. 명종 역시 불교를 중흥하라는 어미의 유언을 무시하고, 깊은 산 절로 도망친 보우를 추포하였다. 전국에서 보우를 처형하라는 여론이 빗발쳤으나 율곡 이이가 이를 만류해 명종보우를 제주도로 유배 했다.


보우는 이곳에서 험악한 여론을 살피던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결국 살해됐다. 문정왕후가 정치에 관여했던 20년 동안 많은 옥사가 발생하고 국고가 탕진되어 백성은 헐벗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출몰한 임꺽정의 의적행각에 백성들이 호응하며 그를 잡으려는 관군에게 비협조 했던 것을 보면 당시의 민심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명종 조에 강한 카리스마를 발휘했던 문정왕후의 섭정 중 불교 중흥정책은 많은 유생들로부터 끊임없는 지탄을 받았지만 명종 7년 승려를 선발하기 위해 봉은사에서 치러진 승과에 인재들이 모여들며 이 시기에 서산대사 휴정(休靜)이 배출되고 사명당 유정(惟政)도 그 후 승과에 의해 등용되었다.


역대 왕실과 조정은 정치적으로 척불을 지향했으나 문정왕후에 의해 15년간 활기를 보였던 숭불시기에 배출된 인물들로 후일 임진왜란과 같은 국난을 극복하는데 큰 힘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문정왕후가 서거한 이듬해인 명종 21년 승과가 폐지되고 도승법도 금지되며 다시 불교와 승려의 지위가 추락해 사역(使役)과 천대로 이어지며, 불교는 산중으로 깊숙이 숨어들게 되었다.


사명대사(四溟大師)

세조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이후 조선왕실에는 몇 차례 왕비의 수렴청정이 있었지만, 조정 관리들을 뜻대로 움직이며 마음껏 권력을 휘두른 여인은 문정왕후뿐이다. 그녀는 명종20년 65세로 이승을 등졌으나 남편 곁에 묻히지 못했다.


중종 능역에 홍수가 범람하자 한성이북에 태산을 봉하면 나라가 안정될 것이란 지관의견으로 문정왕후 능을 불암산 자락 공릉동 언덕에 조영하였다. 명종에게 어미는 늘 태산(泰山)과 같은 존재였다.



그녀는 죽어서도 태능(泰陵)이란 거대한 능침에 묻혀있지만, 그녀의 곁에서 전횡을 휘둘렀던 오라비 윤원형과 정난정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그녀의 웅장한 능침을 마주 대하며 스쳐가는 속세의 권력에 무상함을 다시금 일깨워본다.


문정왕후 태릉(泰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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