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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Nov 07. 2015

조선왕과의 만남(29)

인종릉


제12대 인종 1515~1545 (31세) / 재위 1544.11 (30세)~1545.07 (31세) 8개월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효릉(孝陵) 사적 제 200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40-2 (서삼릉 내)


고양시의 중심을 이루는 주교동 동쪽 원당동 일대 구릉지에 위치한 [서삼릉] 경내에는 인종과 왕비 인성왕후가 함께 쌍릉을 이루어 잠들어 있는 효릉이 있다. 하지만 효릉(孝陵)은 비공개 능이어서 관람할 수 없다. 그 이유는 60년대 새마을운동을 빌미로 국가가 축협에 땅을 팔아넘겨 축협소유의 사유지 안에 효릉이 있기에 개방이 불가한데, 다만 매월 2, 4째 토요일에 한해 특별관람이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능역과 맞닿은 곳에 마사회 소유의 경마교육장이 들어서 있고, 축협 목초지 목장과 골프장 등이 들어서 있어 훼손된 서삼릉 능역의 복원이 절실해 보인다. [서삼릉]은 최초 중종의 제1계비인 장경왕후 ①희릉 터가 정해지면서 조영된 왕실 능이다.


서삼릉 능역

이후 한때 중종정릉이 이곳에 위치했으며 그 아들 인종의 ②효릉이 자리하고, 고종 즉위년에는 철종 예릉이 들어서면서 [서삼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서삼릉 주변에는 폐비 윤씨 ④회묘를 비롯해 숙종 이후 조선 말기까지의 역대 후궁, 대군, 군, 공주, 옹주의 묘지가 있으나, 이 또한 축협의 사유지 내에 속해있다. 


인종은 즉위 이듬해 7월 병환이 위독해짐에 따라 영의정 윤인경을 불러 이복동생 경원대군에게 전위하고 장례를 검소하게 치루라는 유교를 남긴 채 재위 8개월 만에 경복궁 청연루(淸讌樓)에서 숨을 거뒀다. 부모 옆에 묻어달라는 인종 유지에 따라 동년 10월, 부왕인 중종과 모후 장경왕후 능인 정릉(현 희릉) 옆에 능을 조성하고, 그의 지극한 효성을 기려 능호를 효릉으로 하였다.


효릉 홍살문

동원쌍릉으로 조영된 효릉의 상설물은 희릉에 비교해 다소 규모가 적다하는데 이는 인종이 자신의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도록 당부한 것도 있지만, 당시 인종의 외가인 대윤(大尹)과 명종의 외가인 소윤(小尹) 사이의 권력투쟁으로 인해  명종문정왕후 측에서 상례절차를 축소하고, 능역조성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1577년(선조10) 인종비 박씨가 세상을 떠나, 인종 능 옆에 왕비 능을 조성할 때 비로소 효릉병풍석을 설치하고 다른 석물들도 개수하였다. 안타깝게도 명종 17년 정릉이 [선릉] 옆으로 옮겨가면서, 인종은 부왕인 중종과 이별하여 장경왕후희릉 옆에 외로운 어미의 혼령과 함께하고 있다. 


쌍능인 효릉(孝陵)

인종중종의 맏아들로 1520년(중종 15) 세자로 책봉되어 25년간 세자자리에 있었다. 성품이 조용하고 욕심이 적었으며 어버이에 대한 효심이 깊고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였다. 학문을 좋아하여 4세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해 1522년에 관례를 행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매일 세 차례씩 글을 읽었다. 


세자시절 화려한 옷을 입은 시녀를 궁 밖으로 내쫓을 만큼 검약한 생활을 했다. 형제간의 우애가 깊어 누이 효혜공주가 어려서 죽자 이를 긍휼히 여기다 못해 병을 얻었으며, 이복형이던 복성군의 어미 경빈 박씨의 교만으로 인해 모자가 귀양을 가게 되자 방면해줄 것을 간절히 원하는 소(疏)를 올려 그의 깊은 우애에 중종도 감복해 복성군의 작위를 다시 주었다 한다.



생모 장경왕후 윤씨가 인종을 낳고 7일 만에 죽었기 때문에 인종은 계모인 문정왕후 윤씨의 손에서 자라야했다. 하지만 문정왕후 윤씨는 성정(性情)이 억세고 시기심이 많은 여인이였기 때문에 전처 자식인 인종을 무척이나 괴롭혔다. 야사에 따르면 문정왕후는 몇 번이나 인종을 죽이려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가 세자에 머물던 1543년, 그와 빈궁이 잠들어 있는데 주위에서 뜨거운 열기가 번져 일어나보니 동궁이 불에 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당황치 않고 빈궁을 깨워 먼저 나가라하고, 자신은 조용히 앉아서 그대로 죽겠다고 하였다. 이미 방화범의 배후가 문정왕후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정왕후는 몇 번에 걸쳐 그를 죽이려 했는데 그때마다 요행이도 인종은 죽음을 면하곤 했다. 비록 계모이긴 하나 어미인 문정왕후가 자신을 그토록 죽이려고 하니, 자식 된 도리로 죽어주는 것이 효를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조용히 불에 타 죽겠다고 작정한 것이었다. 


세자의 말을 들은 빈궁은 자신 혼자는 절대 나갈 수 없다고 하면서 자리를 지켰다. 두 사람 모두 불길에 타 죽을 지경에 처했는데 그 때 밖에서 중종이 애타게 세자를 부름에 인종은 자신의 죽음이 부왕에게는 큰 불충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빈궁과 함께 불길을 헤쳐 나왔다 한다. 



이는 쥐꼬리에 화선(火線)을 매달아 동궁에 집어넣은 방화사건이었다. 이때 인종은 "조(朝) 종조(宗祖)부터 100년 동안 전해온 집을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로 만든 것은 하늘의 꾸지람이요, 자신의 잘못으로 발생한 일인지라 위로는 성심을 놀라게 하고 아래로는 여러 대신들에게 황당함을 끼치게 되었으니 여러 신료들과 스승께서 어찌해야 할 바를 가르쳐주시오."라고 했다.


인종은 동궁의 화재가 자신의 잘못이라는 소를 시강원에 내리고 방화범을 잡아들이라 명하지 않음에 이 사건은 유야무야 마무리 됐다. 친어미가 없던 인종의 설움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세자 시절이던 1527년에는 중종의 총애를 받던 경빈 박씨가 자신의 소생 복성군을 세자로 만들고 싶어 하던 점을 이용해 김안로가 획책한 동궁 작서(灼鼠)의 변을 격기도 했다.  



꼬리가 반쯤 잘리고 사지가 불로 지져진 쥐가 동궁숙소 근방에서 발견된 이 사건은 정권을 농단하다가 권세를 잃게 된 김안로의 엇나간 사건으로, 당시 정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인종은 조선의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짧은 치세를 남긴 왕이다. 


8개월 보름 남짓 왕위에 머물러 있던 인종은 원인 모를 병으로 드러누워 시름시름 앓더니, 훌쩍 세상을 떠나버렸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를 성군이라 일컬었다. 지극한 효성(孝誠)과 너그러운 성품을 갖추고 금욕적인 생활을 실천한 전형적인 선비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세 명의 부인을 두었으나 후사가 없다. 조선조에 자식이 없던 왕은 단종(6대), 인종(12대), 경종(20대)과 순종(27대)이 있다. 인종실록 기사(記史)에는 중종이 승하하자 장례 후에도 늘 빈소를 지키며 다섯 달 동안 곡소리를 그치지 않고 소금과 간장 없이 죽만 들어 그의 병이 더욱 위중하게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부왕을 잃은 슬픔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인종은 즉위기간 중 몇 가지의 치적을 남겼다. 중종의 원비였던 단경왕후가 거처하는 곳에 폐비궁(廢妃宮)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그녀의 생활을 보조해 주었으며 이듬해에는 기묘사화로 폐지된 현량과(과거제도가 아닌 추천에 의한 인재등용제도)를 복구하고 조광조 등의 기묘명현을 신원(伸冤)해 주었다. 



부왕이 처벌했던 신하들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신원해준 것은 당시 쉽지 않은 결단으로 보여 지지만 그는 국왕으로서의 통솔력과 주변인물에 대한 장악력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야사에는 천성이 유약했던 인종이 대비 전에 문안을 갔다, 문정왕후가 내놓은 다과를 먹고 이후 이유 없이 앓다 숨을 거뒀다고 전한다.


생후 7일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30세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 8개월 만에 승하한 인종의 가엾은 혼령은 그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마저 쉽게 마주대할 수 없기에, [서삼릉] 경내에 단아하게 잠들어있는 모후 장경왕후와 함께 그의 적막함을 달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인종 능

    

제12대 인종비 인성왕후 1514~1577 (64세) 


인성왕후 박씨는 본관 반남(潘南)으로 첨지중추부사 박용의 여식이다. 1524년(중종 19년) 11세가 되던 해에 한살 밑의 인종과 혼인하여 세자빈에 책봉되고, 1544년 11월 인종이 왕으로 즉위함에 31세에 왕비에 올랐다. 남편인 인종은 시기심이 많은 계모 문정왕후에 의해 여러 차례 죽음을 모면해야 했다. 


그럼에도 인종은 자신의 효성이 부족함을 자책하고, 문정왕후의 아들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인성왕후와의 슬하에 자녀를 두지 않았다고 한다. 박씨는 인종승하 후 32년간을 자녀 없이 홀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문정왕후인종뿐만 아니라, 세자빈 박씨(인성왕후) 또한 미워했다. 비록 인종이 왕위에 오른다고 해도 병약하여 일찍 세상을 떠나면 경원대군이 왕위에 오를 것을 상정(想定)해서, 세자빈 박씨가 세손을 낳게 되면 자신의 아들이 왕위에 오를 명분이 없어져 문정왕후에게 불리했기 때문이었다. 


문정왕후는 인종의 세자시절 세자빈 박씨도 함께 불태워 죽이려 했고, 박씨가 중전이 되어 대비 문정왕후에게 문안인사를 가도 달가워한 적이 없었다. 이런 연유로 인성왕후는 명종즉위 후 왕대비, 선조즉위 후 대왕대비로 봉해졌어야 했지만 명종 조에는 서슬 퍼런 시어머니 문정왕후가 박씨를 달가워하지 않아 왕비로 머물다가 선조즉위 후에야 왕대비로 진봉될 수 있었다.



박씨는 명종 때 왕대비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선조 조에 대왕대비로 추봉되지 못했다. 선조인성왕후를 왕대비와 대왕대비로 한꺼번에 두 차례 추봉할 명분을 찾지 못해 왕대비로 진봉한 것에 그쳤다. 성종 조에도 세 명의 선왕비가 공존했지만 이때는 한명의 대왕대비에 두 명의 왕대비로 마무리를 지은 선례가 있었다. 


결국 이복형제인 인종명종의 사망 후, 미망인이었던 인성왕후인순왕후(명종 비)의 왕실서열은 모두 [왕대비]로 불러지며 동서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당시 인성왕후인순왕후는 그다지 나쁜 관계는 아니었다. 인성왕후 박씨는 타고난 성품이 유순하고 조용하여 주변에 적을 만들지 않았다. 


병풍석 없는 인종비 능

인순(仁順)왕후 역시 포악스런 시어머니 문정왕후 밑에서 숨도 못 쉬고 지냈으니 오히려 인성(仁聖)왕후에게 동병상련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인종의 사후 박씨문정왕후의 경계대상에서 멀어지면서 문정왕후의 엄고시하(嚴姑侍下)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한 까닭인지 그녀는 인순왕후보다 2년간을 속세에 더 머물다 선조 10년 경복궁에서 64세로 이승을 하직했다. 후덕하고 온순한 성품에 인종인성왕후 내외는 효릉쌍분으로 묻혀있다. 인종의 능침에는 병풍석이 둘러져 있지만 인성왕후 능에는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고, 난간석으로 두 능을 연결시켜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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