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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Nov 14. 2015

조선왕과의 만남(30)

명종릉_01


제13대 명종 1534~1567 (34세) / 재위 1545.07 (12세)~1567.06 (34세) 21년 11개월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강릉(康陵) 사적 제 201호 /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산313-19 (태강릉 내)


불암산 줄기가 정남(正南)을 향해 내려오다 구릉을 이루는 노원고개 묘향(卯向)에 강릉이 있다. 문정왕후태릉이 [불암산] 정상과 일직선상에 축을 이루고 있어, 강릉태릉의 동쪽으로 밀려난 형세다. 철의 여인이었던 모후 탓에 명종은 죽어서도 어미의 위세에 눌려 가려져 있다. 


현세를 사는 많은 사람들은 태릉은 알아도 옆에 있는 강릉은 존재조차 모르는 듯하다. 문정왕후 사후 4백여 년이 흘렀지만, 세상은 혹독했던 인물만을 오래도록 기억하는지 지역명과 주변시설물 모두가 강릉이 아닌 태릉(泰陵)의 명칭을 쓰고 있기에 많은 아쉬움을 남게 한다. 



더욱더 기가 막힌 것은 왕의 능인 강릉이 비공개 능이라는 점이다. 문화재청이 진정 역사의 유산을 제대로 관리하는 기관인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태릉선수촌] 건립이 추진되면서, [태강릉] 능원 중앙의 수십만 평을 잘라내어 1966년 선수촌이 들어섬에 따라 태릉에서 약 1Km 떨어져있는 강릉은 능역을 달리하는 모양새가 되어있다. 


또한 강릉 우측에는 [삼육대학교]가 들어서 있어, 명종의 혼령은 양방(兩方)이 막혀있는 비공개 능에 어미의 호령을 피해 숨죽여 누워있는 형세이다. 강릉입구는 삼육대학 정문 앞 좌측에 있으며, 철망 울타리로 삼육대학교 캠퍼스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어렵사리 방문하게 된 강릉은 출입제한으로 방문객 발길이 끊겨서인지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參道)에 어둑한 이끼만이 무성하다. 이렇듯 돌아보는 이 없는 적막한 강릉에는 하나의 언덕에 명종인순왕후의 봉분이 가지런한 쌍릉을 이루고 있다.

     

병약했던 명종은 1563년 유일한 소생이었던 순회세자를 서른 나이에 잃고 2년 뒤에는 생모인 문정왕후를 여의면서 세자와 모후를 잃은 허탈감에 마음의 병까지 더하여 1567년 6월 34세의 나이로 경복궁의 양심당(養心堂)에서 승하하여 동년 9월 태릉 동쪽 언덕에 안장되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선조 8년 1월 명종비 인순왕후가 44세로 이승을 하직해, 동년 4월 명종 능인 강릉에 쌍분으로 왕비릉을 조성했다. 능제는 태릉과 마찬가지로 병풍석을 두르고 12칸 난간석으로 연결돼있다. 왕릉과 왕비릉의 병풍석에는 구름무늬와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으며 만석 중간에 십이간지(十二干支)를 문자로 새겨 넣었다.


명종중종의 둘째 아들로 인종의 아우이다.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에게서 인종(仁宗)을 낳고 제2계비 문정왕후 윤씨에게서 명종(明宗)을 낳았다. 이들 두 계비는 같은 파평(坡平) 윤씨였지만 왕위계승을 둘러싸고는 민감하게 대립했다. 



이들의 대리권자인 장경왕후 오라버니 윤임문정왕후의 아우 윤원형은 각자 왕실 외척세력을 형성하며 정권을 독점코자 일찍부터 반목하고 있었다. 처음 인종이 세자로 책봉될 때 문정왕후는 표면적으로 이를 옹호했으나, 자신이 명종을 낳자 왕실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윤임문정왕후인종을 몰아내고 그녀의 아들인 명종을 세자로 옹립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김안로 등과 함께 세자를 보호해야한다고 주장해 문정왕후와 알력이 생겨나게 되었다. 1537년(중종32) 김안로가 실각하고 문정왕후 세력인 윤원형 등이 등용되자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암투가 더욱 치열해졌다.



세간에서는 윤임 일파를 대윤(大尹)윤원형 일파를 소윤(小尹)이라고 했으나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왕위계승 문제는 일단락되어 윤임이 세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에 윤임은 이언적 등 사림(士林)의 많은 명사를 등용하며 그 기세를 회복하는 듯 하였다.


하지만 1545년 7월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명종이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12세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써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며 정세는 급반전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실권을 잡은 윤원형 일파는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중종 여섯째아들)에게 왕위를 옮기려 한다고 무고(誣告)하였다. 또한 인종이 죽을 당시에 계성군(성종 셋째아들)의 양자 계림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명종 즉위년 이를 구실삼아 이들의 숙청을 강청(强請)해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을 사사하고, 이들의 일가는 물론 그들을 따르던 사림(士林)을 유배시키는 이른바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이어서 1547년에는 여주(女主)가 나라를 망친다는 내용으로 문정왕후의 권세를 비난하는 "양재역 벽서사건"이 발생하였다.


양재역 벽서

이를 대윤의 잔당무리들 소행으로 몰아 남아있던 [대윤세력]을 모두 숙청하는 옥사가 일어나면서 윤원형의 권세는 더욱 강해졌다. 명종 초기의 정치세력은 문정왕후를 정점으로 하는 소윤의 척신파와 훈구파사림파 등이 있었다.


그러나 대윤세력의 몰락이후 일부 생존한 [사림파]가 정국운영 핵심에서 철저히 제외되면서, 왕실 및 문정왕후와 혈연관계에 있거나 그들의 정치적 입장에 동조하는 인물로 구성된 [척신파]는 이기(李芑)의 [훈구파]와 사화를 주도하며 정국을 장악하고 있었다. 



특히 윤원형이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서 이른바 "외척전횡시대"가 도래했고, 이때부터 명종은 그들의 횡포에 시달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명종윤원형 세력을 견제하고자 인순왕후(명종비) 외삼촌인 이량(李樑)을 등용했으나 그 역시 작당(作黨)하여 정치가 더욱 문란해지고 파벌정쟁이 그칠 틈이 없었다.

 

윤원형은 권력을 독점하자 자신에게 불만을 토로했던 친형 윤원로를 사사하고 기생첩인 정난정과 공모하여 정실부인 김씨를 내쫓아 독살한 후, 정씨를 정경부인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문정왕후에 의해 정경부인이 된 정난정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제멋대로 궁중을 드나들었다.



또한 그녀는 명종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한편, 궐 밖 상권을 완전히 장악해 전매와 모리(謀利) 행위로 부를 축적했다. 이 때문에 윤원형 집에는 뇌물이 폭주해 한성 안에 열여섯 채의 집을 소유하며  남의 노예와 전장(田莊)을 제멋대로 빼앗고, 그가 축재한 뇌물을 더 이상 쌓아둘 곳이 없어 집 앞에 시장을 열기까지 했다. 


당시에 권력을 탐했던 조신(朝臣)들은 정난정의 자식과 앞 다투어 혼인 줄을 놓기도 했다. 명종은 1553년(명종 8) 20세가 되면서 8년간의 문정왕후 수렴청정을 거두고 친정(政)하게 되었다. 그는 외척을 견제하고 고른 인재등용을 하려 했으나, 당쟁과 파당의 문란한 정치를 막을 길이 없었다. 



게다가 친정을 한다 해도 큰일은 일일이 문정왕후의 지시를 받아 처결해야 했으므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왕후의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명종을 불러다가 회초리로 때리고 반말로 훈계하였다. 이로 인해 왕권은 실추되고 조정대신들이 권력을 독점하며 사리사욕을 채우도록 만들었다.


백성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어야 하는데, 외척일족의 창고에는 곡식과 재물이 넘쳐 썩어갔다. 이러한 수탈로 민생이 피폐해 사회가 불안하고 거듭되는 흉년으로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러한 때에 양주의 백정출신인 임꺽정이 황해도에 출몰해 재물을 약탈하고 탐관오리를 죽이는 등 조선 전체를 뒤흔드는 난이 일어났다.



1559년(명종14) 3월 삼정승과 윤원형 등 당대 최고 실권자가 모여 황해도를 휩쓰는 도적떼를 없앨 대책을 세웠다. 이후 관군에 소탕된 것이 1562년(명종17) 1월 초였으니 난은 무려 3년 넘게 관군의 추적에도 불구하고, 황해도와 경기도 등 전국5도 일대에서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명종실록]에는『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苛斂誅求) 탓이며, 이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재상들의 탐오한 풍습이 한이 없기에 수령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 권력자들을 섬겨야하므로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임꺽정 무리의 약탈대상은 이른바 부자들이었다. 양반이나 토호의 가택을 습격해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인 재물을 도로 가져갔고 심지어 과감하게 관청을 습격하는 등 공권력을 향해 항거하기도 했다.


 

이는 임꺽정 무리가 일개 좀도둑이 아닌 농민저항 수준의 반란이었음을 말해준다. 백성들이 관군의 동향을 미리 알려주고 그들의 활약에 환호를 지른 것은 그들이 단순한 도적떼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록에는 임꺽정을 흉악범으로 기록해 놓고 있지만, 사관(史官)의 기록에서 당시 명종 조정에 대한 민심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명종은 이들 무리를 반란군으로 규정했다. 단순한 도적이 아닌 체제를 뒤엎을 수 있는 존재로 본 것이다. 왕의 특명에도 불구하고 신출귀몰한 임꺽정을 잡기란 쉽지 않았다. 1561년 황해도의 순경사 이사증이 임꺽정의 형인 가도치(加都致)를 잡아 임꺽정을 잡았다고 허위보고 했다. 



그는 출세를 위해 가도치를 때려죽이면서 까지 진실을 덮으려 했으나 발각되어 중형을 받았다. 또한 의주 목사 이수철은 임꺽정의 무리와 전혀 관련이 없는 자들을 잡아 온갖 고문을 동원해 거짓자백을 하게하고 심지어 늙은 노파를 잡아다 임꺽정의 처로 몰아 인두질을 해댔다. 


1562년 임꺽정은 황해도 토포사(討捕使) 남치근과 강원도 토포사 김세한 토벌대의 화살을 맞고 붙잡혀 15일 만에 처형됐다고 하지만 정작 실록 등 당시 기록에는 임꺽정이 처형당했다는 구절이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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