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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Nov 14. 2015

조선왕과의 만남(31)

명종릉_02


제13대 명종 1534~1567 (34세) / 재위 1545.07 (12세)~1567.06 (34세) 21년 11개월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강릉(康陵) 사적 제 201호 /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산313-19 (태강릉 내)


사실상 명종 조의 진정한 대도(大盜)는 임꺽정이 아니라 실권자였던 문정왕후의 혈육 윤원형이었다. 그는 명종의 외삼촌이자 문정왕후의 동기간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었다. 임꺽정이 활약했던 황해도의 지방 관리들은 대부분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의 친정세력들 이었다. 


윤원형은 중종 23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후 문과에 급제해 명종 6년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는데, 그에 대한 우스개 일화가 전해져오고 있다. 그가 병조판서로 있을 때 한 무인이 함경도 권관(權管)으로 임명해준 대가로 화살통을 보냈다. 



이때 윤원형은 "나는 활 쏘는 것을 배우지 않았는데 화살 통을 어디다 쓸 것인가?"라고 벌컥 화를 내며, 다락 안에 내던져 버리고 그 무인을 파직시켰다. 파직된 무인이 윤원형을 찾아와 "보내드린 화살통 안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물었다. 


다락에 처박혀있던 화살 통을 열자 담비가죽이 쏟아져 나옴에 윤원형은 그 무인을 다시 살기 좋은 고을의 수령으로 임명했다. 또한 그가 이조판서로 있을 때 누에고치 수백 근을 바치고 참봉자리를 부탁한 자가 있었다.



벼슬을 임명하는 날 윤원형이 졸고 있느라 장시간 임명대상자 이름을 부르지 않아 교지를 쓰던 이조낭관이 재촉하니 졸고 있던 윤원형은 그자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해 얼떨결에 "고치"라 했다. 


이조(吏曹)의 서리는 고치를 바친 자를 끝내 찾지 못해 조선팔도를 수소문하여 고치(高致)라는 이름에 가난한 시골선비를 찾아 임명했다는 웃지 못 할 야사가 전해지고 있다.  명종은 횡포를 일삼던 윤원형을 죽이고자 마음먹고 어느 날 경연에 나아가 중신들에게 한나라의 문제(文帝)가 외삼촌인 박소(薄昭)를 죽인 일에 대해 물었다.



여러 신하들이 왕의 내심을 알아차리고 윤원형을 탄핵해 관직을 삭탈하고 도성 사대문 밖으로 내쫓기를 주청하여 명종이 그대로 시행하게 했다. 당시 윤원형이 쫓겨날 때 백성들이 기왓장과 돌을 던지며 심지어 활로 쏘아 죽이려는 자도 있었다. 


그는 몰래 황해도 강음(江陰)에 은거하며 정난정과 마주앉아 날마다 울음으로 지새웠다. 이때 윤원형 전처인 김씨의 계모가 정난정이 김씨를 독살한 사실을 고발하였다. 조정에서 이들의 처결논의가 제기되며 이를 간파한 정난정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자, 윤원형은 정난정의 시신을 끌어안고 오열하다 독약을 마시고 함께 자결했다.



명종 조의 내우외환은 나라밖으로 이어져 삼포왜란 이래 세견선(歲遣船)의 감소로 곤란을 겪어오던 왜인들이 1555년(명종10) 배 60여척을 이끌고 전라도 연안에 침입해 영암과 장흥, 진도 등을 유린하는 을묘왜변이 발생했다. 명종이준경을 도순찰사로 삼아 왜인들을 영암에서 격퇴시키고 이를 계기로 비변사(備邊司)를 설치했다.


비변사는 설치연대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1510년(중종5) 삼포왜란 때 설치돼 임시기구로서 존속되어 오다가 을묘왜변을 계기로 상설기구화 되었다. 왜구가 물러간 후 쓰시마 도주는 을묘왜변에 가담한 왜구들의 목을 베어 보내 사죄하고 세견선의 부활을 거듭 요청함에 따라 세견선 5척을 허락하였다.



명종 조에는 문정왕후가 독실한 불자였기 때문에 불교의 교세(敎勢)가 일어났다. 1550년에는 선교(禪敎) 양종을 부활시키고 승과를 설치해 불교의 중흥을 꾀했으나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어미의 굴레를 벗어난 명종은 먼저 나라를 농단하던 윤원형의 소윤 [척신세력]을 제거했다.


이어 잇따른 불교배척 상소와 유림(儒林)의 기세에 밀려 보우를 제주도로 유배시키고 양종(兩宗)을 폐지했다. 명종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해 선정을 펴보려고 노력했으나 자신의 독자적인 치세를 접한 지 2년도 못돼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적손조차 남기지 못한 채 34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였다.


이러한 역사의 안타까운 사연을 알고 있는지 인적조차 끊긴 빛바랜 정자각만이 외로이 그의 능을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웅장한 태릉에 홀로 쓸쓸히 잠들어 있는 어미와 달리 명종은 그나마 쌍릉을 이루고 있기에, 그들 부부의 혼령이 함께 가을하늘 아래 고즈넉한 풍경을 만끽하며 평안히 잠들어있기를 기원해 본다.



     

제13대 명종비 인순왕후 1532~1575 (44세)

      

인순왕후 심씨는 본관이 청송(靑松)으로 돈령부영사 심강의 여식이다. 1543년(중종37) 12세에 명종과의 가례를 올리고, 인종이 승하한 해인 14세에 왕비에 올랐다. 시어머니 문정왕후의 오랜 섭정과 윤원형 등 외척세력의 득세로 명종인순왕후는 허울 좋은 왕과 비(妃)에 불과했다.


1551년(명종6)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13세에 죽어 적손이 없었다. 여섯 명의 후궁들에게서도 후사가 없자, 인순왕후중종의 후궁인 창빈 안씨 아들인 덕흥군(중종 일곱째아들)의 셋째아들 하성군을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그가 바로 선조이다. 



소윤(小尹)세력은 혈연관계 인물 외에 대부분 윤원형이 정국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면서 자발적으로 접근했던 자들이었는데 윤원형은 자파세력의 저변확대 및 지지기반 강화를 위해 신진세력도 포섭하고 있었다. 


당시 이러한 [척신체제]에 또 다른 외척세력이 가세하였는데 그 중심에 명종비 인순왕후가 있었다. 인순왕후 심씨의 조부 심연원은 명종 3년부터 10년이 지나 병사할 때까지 3정승을 두루 역임하면서 윤원형의 정국운영에 참여하고 있었다. 


강릉(康陵)의 쌍릉 

명종 즉위년  호조판서 심연원은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위사공신 2등에 책봉된 후 의금부판사 및 좌의정과 우의정을 거쳐 명종6년 영의정에 올랐다. 명종8년 7월 명종이 20세가 되자, 수렴청정의 명분이 없어짐에 따라 문정왕후의 수렴이 끝나고 친정이 시작됐다. 


지난 8년간 수렴청정을 통해 반정세력을 대부분 제거해 체제가 안정돼 있었으나 명종의 치세는 여전히 문정왕후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기에, 모후와 윤원형의 척신체제는 계속되고 있었다. 어미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명종은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가진 [척신] 존재가 부담스러웠기에 독자적인 정국운영을 모색했다.

 


그는 [소윤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을 확보해 정치세력간의 균형을 꾀하며 왕권을 강화하고자 이량(李樑)을 발탁했다. 이량 인순왕후 친정인 심씨 집안의 도움으로 윤원형의 대응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심씨 집안은 왕실과 연결되어 인순왕후의 조부가 공신에 추록되는 등 크게 번성했지만 반면에 윤원형의 견제를 받았다. 


명종이 인재를 찾고 있을 때, 심씨 집안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인물로 인순왕후 외삼촌인 이량을 추천했다. 하지만 이량은 명종의 신임을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며 지지세력을 규합해 나갔으며 지나치게 재산을 축적하는 등 조정을 농단하였다. 


illustrator / 오연

이량의 정치세력은 자파세력을 언관직에 진출시키며 인사권의 대부분을 장악코자 했다. 이에 대항해 [소윤세력]은 윤원형의 인척인 황대임의 딸을 병이 있는 것을 숨기면서까지 순회세자 빈으로 삼아 후일을 기약하고자 했다. 


[소윤세력] 문정왕후를 앞세워 [이량세력]을 반격함에 따라 명종은 하는 수 없이 이량을 평안도 관찰사로 내쳤으나, 이후 윤원형의 극심한 권력독점을 우려한 명종은 1562년 그를 이조참판에 제수하여 다시 중앙으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이량의 세력 강화는 명종에게 또 다른 걸림돌이란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 



이량의 안하무인 세도가 자행되면서 그의 권력남용은 극에 달했다. 결국 명종인순왕후의 아우 심의겸의 조력 하에 이량이 사림(士林)의 중진 등을 지방으로 좌천시키려는 계획을 문제 삼아, 홍문관을 통해 사화(士禍)를 획책했다는 죄목으로 탄핵하게 하여 그를 삭탈관직 했다. 윤원형은 정적인 이량이 제거되자, 자신의 딸을 덕흥군의 아들과 혼인시켜 명종사후 자신의 지위를 보전하려 했으나 명종의 반대로 실현하지 못했다. 


명종즉위와 함께 수렴청정을 시작했고 국왕의 친정후에도 [소윤세력]의 보호막 역할을 하면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해가며 정국을 주도했던 문정왕후의 죽음은 [훈척세력]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사림세력]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는 16세기 역사에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문정왕후 사후 훈구세력척신세력의 몰락을 가속화시킨 것은 사림파 언관(言官)과 지방의 유생들이었다. 이들 사림세력들은 문정왕후가 죽자, 곧 바로 [척신세력]의 상징이었던 보우윤원형에 대한 탄핵을 시도했다. 윤원형의 사후에도 [훈척세력]의 청산은  완전히 이뤄지지 않았다. 


권신과 밀착되었던 대부분의 관료들은 여전히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라 모후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명종 또한 척신 정치의 형성과 전개과정에서 전혀 책임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완전히 몰락시키지 못한 [훈척세력]은 윤원형의 사후에도 왕권과 결탁해 조정에 재복귀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더욱이 명종은 문정왕후 사후 급격히 약화되어가는 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이들을 다시 등용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심에 인순왕후의 외척 심씨 일가가 있었다. 



[소윤세력]의 몰락이후 정국은 국왕중심으로 운영되는 가운데 조정은 크게 심통원으로 대표되는 [심씨세력]과 [사림세력]의 양 체제로 개편되었다. [심씨세력]은 윤원형과 이량으로 대표되는 [척신세력]이 제거된 공백을 메워나갔다. 이때 이량을 제거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명종의 장인인 심강과 처남인 심의겸은 이후 영향력이 더욱 확대되었다. 


당시 이들 부자는 사류(士類)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심강의 숙부였던 심통원은 김안국의 문인으로 [친사림파] 인물이었으며 심강 역시 그들에게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인순왕후의 외척이었던 이들 또한 무모하게 권력을 남용하였기에 역사 속에서 윤원형과 이량심통원은 조선의 3흉(凶)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조선전기 세조의 왕위찬탈로 [훈구공신]세력이 등장한 이후 이를 견제하기 위한 후대 왕들의 노력은 조선중기, 중종 조에 들어서면서 제1계비 장경왕후의 외척 [대윤세력]과 문정왕후 외척 [소윤세력]을 만들어내 인종 조를 거치며 [척신세력]으로 확대돼갔다. 


명종 역시 어미의 외척세력을 척결하고자 부인 심씨의 외척인 또 다른 [척신세력]을 등장시켰다. 세조이후 명종에 이르기 까지 1백여 년에 걸쳐 왕권이 실추돼가는 역사의 과정을 보며 정당치 못한 정권의 출현이 남긴 부작용과 후유증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일깨워본다. 


강릉(康陵) 홍살문

인순왕후 심씨는 선조가 16세로 즉위하자, 잠시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시어머니의 수렴청정으로 남편이 고통 받던 것을 지켜보았기에 수렴을 1년 만에 철회했다. 당시 선조가 미성년자에 머물러 있었지만 친정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녀는 간혹 친정집안의 이익을 대변하기는 했지만 정사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다. 심씨는 수렴청정을 거둔 후 조용한 여생을 보내다 선조8년 1월 창경궁 통명전(通明殿)에서 44세로 이승을 마감하여 명종 옆에 한적히 잠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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