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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Nov 14. 2015

조선왕과의 만남(32)

선조릉_01


제14대 선조 1552~1608 (57세) / 재위 1567.07 (16세)~1608.02 (57세) 40년 7개월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목릉(穆陵) 사적 제 193호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4-3 (동구릉 내)


[동구릉]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목릉에는 [선조]와 원비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의 세 혼백이 잠들어 있다. 하나의 능역 안에 각기 다른 언덕을 조영해 남좌여우(男左女右) 음양설에 따라 의인왕후를 중심으로 선조의 능은 좌측에, 인목왕후 능을 우측에 조성한 동원삼강릉(同原三岡陵) 형식을 취하고 있다. 


목릉의 능역은 원래 1600년(선조33) 의인왕후 박씨가 승하하자 왕비 능인 유릉(裕陵)터로 정해진 곳이었다. 당시 7년간에 걸친 왜란직후 어수선한 때였기에 의인왕후의 국상 중 묏자리를 정하지 못하고 반년쯤 지나 포천에 능지를 택해 능역공사를 하던 중 그곳이 흉터라는 상소가 올라와 결국, 태조건원릉 동편에 유릉을 조성해 [의인왕후]가 안장되었다.



선조가 승하하자, 광해군 즉위 해에 건원릉 서편(헌종 경릉자리)에 목릉을 조영했다. 하지만 두 차례의 왜란을 겪으며 장인(匠人)이 부족했던 탓에 능역공사가 부실로 이어져 병풍석이 기울어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능침에 물기가 차오르자, 심의겸의 손자인 심명세가 능 터가 불길하다는 상소를 올려 1630년(인조8) 현 위치인 의인왕후 곁으로 천장하였다. 


인조 10년 계비인 인목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이곳에 능지를 정하고 선조 능 동편언덕에 능을 조성해 혜룽(惠陵)으로 정했다. 이로써 [목릉 경내]에는 각기 다른 능호를 지닌 3기의 부부 능이 자리하게 되었으나, 같은 해 유릉과 혜릉이 모두 [목릉의 경내]에 있음으로 합칭(合稱)하여 목릉(穆陵)이라 부르게 되었다. 


목릉 동원삼강릉

목릉의 [정자각]은 능이 들어설 때마다 형태가 바뀌었다. 당초 의인왕후 능 앞에 정자각이 있었으나, 선조의 능이 천장되면서 왕릉 앞에 정자각을 옮겨 세웠다. 후일 계비 인목왕후의 능이 들어서면서 왕릉 한쪽으로 치우쳐있는 정자각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왕비 능은 혼령이 다니는 길인 신도(神道)만 정자각에 접하도록 하는 것으로 결정되어 현재 목릉의 [정자각]은 왕릉을 향해 서있으면서 [신도]는 세 능으로 각기 뻗어있다. 


조선왕릉 중 세 개의 각기 다른 언덕이 조성된 동원삼강릉목릉이 유일하다. 선조의 능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과 구름 문양이 조각돼 있고, 봉분 바깥쪽으로는 난간석을 비롯한 석물이 전형적인 국조상설(國朝喪設)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선조 능(좌) / 의인왕후 능(우)

선조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군의 셋째 아들로, 명종 7년 경복궁 서쪽 인달방(仁達坊)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행동이 바르고 용모가 빼어나, 순회세자를 잃고 후사가 없었던 선왕 명종의 사랑을 받으며 하성군에 봉해졌다. 순회세자가 어린나이로 생을 마감하자 왕실은 중종의 손자들 중에서 후사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명종덕흥군의 세 아들을 대궐로 불러 왕의 관을 벗어 들고는 3조카 중 누구의 머리가 가장 큰지 보자며, 각자에게 익선관을 써보라 했다. 선조의 두 형은 아무생각 없이 받아 써 보았지만 가장 나이가 어린 하성군은 "성상께서 쓰시는 것을 어찌 신하된 자가 쓸 수 있겠습니까?"라며 극구 사양하였다.


     

또한 왕손들에게 충과 효에 대한 생각을 써서 올리게 했는데 하성군은 충과 효는 서로 다르지 않아 근본이 같다(忠孝本無二致)라고 써 올려 명종이 매우 기특해 하였다. 훗날 명종이 위급해지자 왕비는 명종의 마지막 유언을 따라 하성군에게 보위를 잇도록 하여 1567년(명종22) 선조는 경복궁 근정전에서 16세 왕위에 올랐다. 


나이가 어려 처음엔 명종비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으나 이듬해부터 친정하게 되었다. 선조는 그때 왕의 관을 쓰지 않은 덕에 평생 익선관을 쓸 수 있게 됨으로서 적자가 아닌 서자(庶子)로서 보위를 이은 조선최초의 군왕이 되었으며, 그의 생부였던 덕흥군 역시 대원군으로 봉해짐으로서 이때에 최초로 "대원군제도"가 시행되었다.



선조가 즉위하자, 명종의 부름에도 출사(出仕)하지 않던 퇴계 이황이 예조판서의 임명을 받았다. 1568년 친정을 시작한 선조는 68세 노학자 이황이 올린 군주학인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바탕으로 성리학적 왕도정치를 표방함으로써 사림(士林)들에게 중앙정계 진출의 길을 열어주고자 과거제를 개편해 현량과(賢良科)를 부활했다. 


선조는 매일 강연에 나가 경사(經史)를 토론하고, 밤늦도록 책읽기에 열중하며 학문에 정진했다. 사림의 명유(名儒) 이황과 이이 등을 극진히 예우하고 유학을 장려하며 국정쇄신을 통한 선정을 펼치고자 했다. 조선중초기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림들을 신원해주고 [훈구세력]과 [척신세력]을 배척하며 [사림]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를 증직하고 그에게 피해를 입힌 남곤의 관작을 추탈했으며,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을 죽인 윤원형의 공적도 삭탈해 민심을 수습하였다. 이를 계기로 학행이 뛰어난 새로운 인재들이 등용되고 기묘사화이후 물러났던 사림들이 조정에 복직되었다. 


이렇듯 선조초반의 조정은 신진사류인 [사림세력]이 정권을 잡아가며 안정을 찾아가는 듯하였으나, 조정 내에는 여전히 인순왕후 아우인 심의겸이 [외척세력]의 핵심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중앙정계 진출로 정국을 주도하던 사림들과 심의겸 간의 알력은 당파(黨派)라는 새로운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면서 이후에 조선의 정치적 파란을 몰고 오는 계기가 되었다.


고뇌하는 선조

1574년(선조7) 이조정랑에 있던 오건(吳健)이 자리를 옮기며 김효원을 추천하자, 그가 척신 윤원형 집에 들락거렸던 문객(門客)이라는 이유를 들어 심의겸이 반대하고 나섰다. 김효원이황의 문인으로 문과에 장원급제한 [신진사림]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는데, 심의겸김효원이 권신에게 아첨이나 하는 소인배라고 여겼다.


김효원이 탈락하자 오건은 관직을 버리고 낙향을 하면서 파문이 일었다. 당시 이조정랑은 품계는 낮지만 인사행정을 담당하는 막강한 요직이었으며 이조정랑 직을 어떤 세력이 차지하느냐에 따라 권력이 움직여졌다. 후일 김효원은 이조정랑에 등용되었지만 이 일을 가슴에 담아두고 심의겸에게 복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선조 8년 김효원의 후임으로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이조정랑에 천거됐다. 이에 김효원인순왕후의 아우인 척신이라는 이유를 들어 이들을 인신공격하며 다른 사람을 추천했다. 결국 사림(士林)은 김효원으로 결집하는 [신진사림]과 심의겸을 중심으로 하는 [기성사림]으로 분열하며  동서분당이 생겨났다. 


당시 김효원은 도성 동쪽 건천동(현재 仁峴洞)에 거주해 그 세력을 東人이라 하고, 심의겸은 서쪽의 정릉(현재 貞洞)에 거주하여 그의 세력은 西人이라 불렀다. 동인유성룡 등 이황조식의 문인들이 많았고, 서인정철 등 이이성혼의 문인들이 많았다. 이렀듯 조선당쟁의 시발은 단순한 감정대립에서 시작돼 학맥과 사상의 갈등으로 이어지며 후일 정치적 반목으로 확산되어 갔다. 



1576년(선조9) 동서인의 대립갈등이 심화되면서 이이는 분열을 막기 위해 선조에게 개혁안을 올렸으나 채택되지 않아 당파간의 중재를 위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벼슬을 내놓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했다. 1580년(선조13) 45세에 복관하여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올리고,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


하지만 선조의 미온적인 태도로 이이의 개혁안은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당파의 대립은 더욱 격화돼갔다.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려고 노력한 이이는 동인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삼사(三司)로 부터 강력한 탄핵을 받아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가, 이듬해인 1584년 49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낙향하는 이이

이러한 때 1583년(선조16) 야인들이 침략해 4년간에 걸쳐 경원부가 함락되고, 부내(府內)의 각 진(鎭)이 오랑캐의 손에 들어가자 신립과 신상절 등이 그들의 소굴을 반격하여 두만강유역을 회복했으나, 다시 일본의 침략을 받아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다. 


1590년(선조23) 왜국의 동태가 수상하여 통신사를 파견해 동향을 살펴오게 했다. 이듬해 조정에 돌아와 상소를 올렸던 통신사 황윤길(西人)은 왜군침입이 있을 것으로 보고했으나, 부사 김성일(東人)은 침략우려가 없다는 상반된 보고를 했다. 



이러한 견해 차이는 당시 세자건저(建儲)사건으로 정치적 수세에 몰려있던 西人이 전쟁위험을 빙자해, 동인의 공격을 막아보려는 꼼수라고 東人이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1589년(선조22)에는 정여립의 모반을 계기로 일어난 기축옥사가 발생했다. 


정여립이이의 문하생시절 "공자는 익은 감이고 율곡은 덜 익은 감이다."라 극찬했던 서인의 문인이었다. 그러나 율곡이 죽은 뒤 정여립 동인으로 전향하면서 이이를 소인배라고 비난하였다. 이로 인해 선조의 미움을 사게 되면서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계속되는 천거에도 불구하고 등용되지 못했다. 


낙향한 그는 진안군 죽도에서 불만이 있는 사람들을 규합해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고 무술훈련을 시켰다. 그러던 중 황해도 관찰사 한준의 비밀장계로 반란음모가 발각돼 옥사가 시작되면서 정여립은 자결하였고 이때 동인의 명사들이 대거 처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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