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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Nov 14. 2015

조선왕과의 만남(33)

선조릉_02


제14대 선조 1552~1608 (57세) / 재위 1567.07 (16세)~1608.02 (57세) 40년 7개월



 ■ 목릉(穆陵) 사적 제 193호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4-3 (동구릉 내)


동서분당 이후 벼슬에 오르지 못한 [서인세력]은 정여립(立) 사건을 계기로 주도권을 장악코자했다. 정국전환을 주도한 서인의 중심에는 송강(松江) 정철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인의 거두 정철이 우의정에 임명되고 이 사건의 심문관이 되면서 사건진위와 상관없이 동인의 유력인사들이 대거 처벌됐다.


정철은 평소 사사로운 감정이 있던 자들을 모두 역당으로 몰아 보복하여, 이 사건으로 죽은 자만도 1천여 명이 넘었다. 정여립 사건에 연루돼 처벌된 [동인세력]들은 왕의 실정에 대해 "임금이 시기심이 많고 모질며 고집이 세다"며 선조를 비판하고 있었다.


松江 정철

결국 [모반사건]을 조사한 정철과 서인들은 이를 빌미로 선조에 대한 괘씸죄를 저지른 세력까지 역모죄로 몰아간 것이다. 사사건건 대립하던 정국은 기축옥사로 주도권을 잡게 된 [서인세력]이 1591년(선조24) 세자책봉과 관련된 건저의(建儲議) 문제로 승부수를 띄웠다.


선조가 친정하는 상황에서 세자책봉은 신하들이 쉽게 꺼낼 수없는 민감한 문제였다. 하지만 삼정승인 이산해유성룡, 정철은 함께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도록 건의하기로 약속했다. 이때 선조가 총애하던 인빈 김씨의 소생 신성군을 의중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영의정 이산해(東人)는 인빈의 오라버니 김공량과 연결돼 있었다.


정여립 사건 / illustrator 장선환

이산해는 삼정승이 약속한 날에 나타나지 않고, 김공량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 인빈 김씨에게 전해지고, 인빈은 곧 선조에게 달려가 정철이 자신의 모자(母子)를 죽이려 한다고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고했다. 뒷날 경연에서 정철이 세자책봉을 건의하자 선조는 진노하며, 즉시 정철을 좌의정에서 파직하여 평안북도 강계로 유배하였고 서인은 실각하게 되었다.


이로써 동인이 다시 세력을 회복하게 됐지만 이 사건을 전후해 서인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동인은 또다시 두 파로 갈리게 되었다. 정철을 죽여야 한다는 강경파 북인(北人) 귀양으로 종결짓자는 온건파 남인(南人)로 분열돼 조정은 극심한 당쟁에 휘말리며, 왜국의 동향보고에 대한 제대로 된 국방대책마저 마련하지 못한 채, 1592년(선조25) 조선개국 200년 만에 최대위기인 임진왜란을 맞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정벌을 추진해, 불만세력을 잠재우고자 20만 병력을 이끌고 전쟁을 일으켰다. 1582년 이이의 [십만양병설] 주장이 있었지만 조선사회는 오랜 평화 속에서 지배계층인 사대부의 파당정치와 전세제(田稅制)의 문란으로 민심이 흐트러졌다.


1591년, 일본사신이 1년 뒤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를 칠 것이라고 통고하자 뒤늦게 조정은 각 도에 왜군의 침공에 대비해 성곽을 수축하고 군비를 정비하라는 대책을 마련했다. 하지만 민폐를 야기한다는 원성이 높았고 기강이 해이해진 일부 수령들은 전쟁준비를 중지하라는 장계를 올리기도 했다.



급기야 1592년 4월 13일 부산진을 필두로 각 고을이 무너지고 왜군침략 보름 만에 한성도 위급하게 되자 수성(守成) 계획을 포기하고 개성으로 몽진(蒙塵)하였다. 그러나 적이 한강을 건너면서 도성이 무너지자 다시 평양으로 퇴각하였다. 당시 왕실에는 적손(嫡孫)이 없어 세자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장자인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했고 총애하던 신성군도 병사했기에 피난길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사신을 명나라에 급파해 원병을 청하고 선조는 의주로 올라가며 조정을 둘로 나눠 분조(分朝)를 설치하고 광해군으로 하여금 의병과 군량을 확보하는 임무를 수행토록 하였다.



국토가 왜군에 짓밟히자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는 자발적인 의병이 백성과 향리를 구하고자 모여들어 무능한 관군을 대신하였다. 이때 의병장은 지방에서 추앙을 받는 유생과 관원들인 문반출신이 무인보다 훨씬 많았다. 1593년 정월에 명나라 진영에 통보한 전국 의병 수는 2만2천6백여 명에 이르렀다.


홍의(紅衣)장군 곽재우 현풍 유생으로 붉은 옷을 입고 경상도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낙동강을 오르내리며 왜군과 싸우는 등 전국도처에서 의병이 봉기해 적의 후방을 위협했다. 또한 묘향산에 노승(老僧) 휴정은 수천의 승군을 일으키고 각 사찰에 격문을 보냈다.



호남(湖南)의 처영, 관동(關東) 유정, 해서(海西)의 의엄 등 휴정의 문도들이 호응하며 전국사찰에서 승병을 일으켜 활약함으로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에 힘입어 관군들도 전력을 가다듬어 각처에서 승전을 거두고, 이순신 장군의 수군활약으로 제해권을 완전 장악했으며 명의 원군과 관군의 협공으로 평양성을 수복하였다.


또한 권율장군의 행주대첩으로 1593년 4월에 강화를 조건으로 왜군이 한성에서 철수하며 선조는 그해 10월 환도하게 되었다. 이듬해 [훈련도감]을 설치해 군사훈련을 강화하고 투항한 왜군을 통해 조총사격과 탄환제조법을 관군에게 가르쳤다.


illustrator / 이철원

왜란 초기에는 왜군을 최우선 격퇴하기 위해 군공(軍功)에 따라 논공을 시행토록 했는데, 전쟁이 장기화되고 명의 원군이 장기간 머물며 군량미 조달이 심각해지자 납속을 한 자에게도 논공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군공을 세우거나 납속한 자는 공명첩이나 실직(實職)을 주어, 하층 신분의 자가 양반으로 격상된 일이 허다해져 조선중기 신분변화의 계기가 이뤄졌다.


왜란 중 굶어죽는 백성이 속출해 인육(人肉)까지 먹는 일들이 발생하자 왕에게 공급되는 쌀의 양을 줄여 긍휼한 곳에 보태도록 하고 전국에 산재한 유해를 수집해 단(壇)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1597년(선조30) 명나라와 일본 간에 진행된 강화회담이 결렬되면서, 또 다시  왜군이 침입한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조정은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는 한편 관군의 정비를 촉구했다. 이때 일본은 이중첩자로 하여금 조정에 거짓정보를 흘려 계략을 꾸몄다. 이를 간파한 이순신이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자, 이로 인해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모함을 받고 투옥돼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후임인 원균이 조정의 무리한 명령에 따라 칠천해전(漆川海戰)에 나섰으나 참패하며 그동안 마련했던 수군의 기반이 붕괴되었다. 하여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은 13척의 빈약한 함선을 거느리고, 명량대첩에서 133척 적군과 대결해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어 해상권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


이후 도요토미가 병사하면서 왜군은 일본으로 퇴각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하였다. 1598년(선조31) 11월 이순신은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명의 수군과 연합해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로써 왜군은 완전히 대패하고 물러갔지만, 이순신은 유탄에 맞아 54세로 전사하였다.



조선개국이래 최대 위기였던 두 차례의 왜란 중에는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하며 어려운 조정을 총지휘한 유성룡이 있었다. 참혹한 시기에 재상(宰相)으로 발탁된 유성룡은 명(明)의 협력을 얻어내며 왜군에 대응하고 민생을 돌봤으나, 전란이 끝나기 직전 북인의 정치적 탄핵으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내려가 기나긴 전쟁의 실상을 기록한 징비록(懲毖錄)을 남겼다. 


西厓 유성룡 / illustrator 정윤정

7년간의 왜란이 끝난 후 양반 관리들의 체통이 추락하고, 노비문서가 불에 타 위계질서가 무너지는 등 국가체제가 완전히 붕괴됐다. 조선은 새로운 왕조를 세울 힘마저도 잃어버린 국가로 전락하면서, 전후복구 작업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거듭된 흉년과 동인서인들의 여전한 당쟁으로 불안정한 왕권이 지속되게 되었다. 왜란으로 인한 문화적 손실로는 왜병의 방화로 三宮(경복궁, 창덕궁, 창경궁)과 불국사 등이 소진되었고, 춘추관이 불타 사고(史庫)에 보관 중이던 역대 왕조의 실록과 서적 등이 소실되고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당했다.



선조임진왜란으로 궁궐이 없어지자 1593년부터 왕실의 임시거처와 정실(政室)로 경운궁(현 덕수궁)을 사용했다. 원래 성종 형인 월산대군의 저택이었던 이곳은 이때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우다, 1615년(광해군7) 재건한 창덕궁으로 어가가 옮겨가며 경운궁(慶運宮)이라는 궁호를 붙어 별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한편 전쟁으로 인한 질병의 만연으로 1596년 선조허준 등에게 명해 질병퇴치를 위한 의서(醫書)를 편찬하게 하였다. 하지만 정유재란으로 집필이 중단되었다가 전란이 끝난 뒤 허준이 단독으로 진행해 1610년(광해군2) 동의보감(東醫寶鑑)이 완성되기도 했다.



조선왕실은 건국 초부터 음양오행에 따라, 목성(木性)은 금성(金性)과 상극(相剋)이라 하여 김씨와의 혼인을 꺼렸다. 하지만 선조의 후궁 6명 중 공빈 김씨, 인빈 김씨, 순빈 김씨 등 3명이 김씨였으며 계비인 인목대비까지 김씨가 입궁하면서, 세간에는 불길한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후궁출신의 서자로 왕위에 오른 선조는 전란(戰亂)의 마무리도 제대로 못한 채, 57세로 파란만장한 치세를 마감했다. 그는 일본의 침략을 내다보지도 못하고 전란 뒤에도 제대로 난국을 수습하지 못한 조선의 무능한 왕으로 역사에 남아있다.

 

illustrator / 온리콤판(OnrieKompan)

목릉문무인석은 여타의 왕릉 석물보다 매우 크고 우람하다. 하지만 왜란의 인명피해로 제대로 된 장인(匠人)을 구하지 못한 채, 능이 조성됐기 때문에 석물들의 크기만 클 뿐 조형물의 조각은 사실적이지도, 입체적이지도 않다. 오랜 전란을 겪으며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갔을 선조를 위해 마치 보상이라도 해준 듯 목릉은 드넓은 능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목릉(穆陵) 지키는 문무인석이 장대한 까닭은 죽어서라도 그의 혼령이 고통 없이 편히 쉴 수 있도록 호위를 강화한 배려였는지, 아니면 조선에서 가장 무능했던 왕이란 열등감을 극복코자 허세를 부려 크게 세워진 것인지, 능을 마주하는 내내 혼란스러움이 더해질 뿐이다.


목릉의 장대한 문무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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